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92화 (692/956)

돌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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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숨을 들이쉬니 서늘한 밤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와 정신을 일깨운다.

‘난 괴물이 아니야.’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잘 제어한다면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만으로도 단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설령 이 손에 또 다른 피가 묻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 이를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지 말아야 한다.

‘나는 괜찮아.’

수십 번을 되뇌자 어지럽던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좋을 텐데.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돌아가면 가장 먼저 뭘 먹을까?’

명수를 찾아가서 같이 햄버거를 먹을까? 상미랑 선생님이랑 같이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을까? 새벽이랑 유영을 불러 맛있는 스테이크 집을 찾아가 볼까?

‘그냥 집에 있는 컵라면도 좋을 거 같긴 한데.’

뭐든 맛이 없을까?

마을에 도착한 단유는 중대장이 거처로 사용하던 곳에 사울른을 데려다주었다. 전단장을 찾기 전에 이미 정리를 끝냈던 마을이라 남아 있는 병사들은 없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전단장이 그 병사들을 수습해서 물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급히 철수하느라 이런 건 두고 갔나 보네요.”

소모성 보급품들 몇 개가 숙소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몇몇 개는 당장 쓸만해 보였다. 중대장이 갑옷 안에 입는 여벌 옷인가 본데, 그것을 사울른에게 건넸다. 피로 얼룩진 데다 여기저기 찢어진 지금의 옷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루치드가 입어요.”

“전 찢어진 곳이 없잖아요.”

남은 옷은 북북 찢어 붕대 대용으로 썼다. 붉게 젖은 천을 떼어내고 새로 감아준 뒤, 옷을 입자 그나마 몰골이 나아 보였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사울른이 잠시 아무 말 않다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마을을 벗어난 단유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가는 달이 보였다. 첫 동살이 내리비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간을 많이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단유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행군으로 하루 반나절 거리를 이동했다고 패잔병들이 진술했었다. 조금 부지런히 가면 그보다 일찍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거를 미리 빼놓길 잘했네.’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숲 언저리에 자전거를 숨겨놓았던 곳으로 이동한 단유는 수풀 속에 숨겨둔 자전거를 꺼냈다. 수레와 분리를 시켜놓았던 터라 숨기기가 쉬웠다.

수레에 꽂았던 돛대를 자전거 뒤에 꽂는 방법도 생각했었지만, 그러면 숨기기도 불편하고 새로 거치대를 만들어야 하는 귀찮음이 있어 그냥 발로 페달을 구르는 원래 방식을 이용해야 하지만, 그래도 단유에겐 마법이 있었다. 등을 밀어주는 바람을 일으키면 덜 힘을 소모하면서 갈 수 있으리라.

****

간밤의 소란에도 아침 해는 여지없이 떠올랐다. 천장이 밝아지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 마을이지만, 여느 때와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로 아침을 열었다.

이유는 당연히 마을 통로를 막고 있는 바위와 그로 인한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졌던 토론은 별 성과 없이 끝이 났고, 어중간하게 패가 갈리면서 사람들은 서먹한 아침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우선 바이언을 중심으로 하는 패거리는 처음 바이언이 말한 것과 같이, 시일을 기다렸다가 바위를 뚫겠다는 계획을 지지했다.

다음 패거리는 피난민 출신의 붉은 단발을 가진 스토보라는 이의 생각에 동조한 이들이었다. 피난민 출신 뿐 아니라 기존 마을에 살던 이들 중에도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나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단유 역시 외부인이고, 그와 함께 지낸 시간도 짧은 터라 신뢰가 없다는 것이 스토보의 이야기에 동의한 이유였다.

물론 이도저도 아닌 입장을 취한 이들도 있었다. 딱히 중립을 표방했다기보단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기 어렵다는 우유부단함이 그런 포지션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었다.

간밤 늦게까지 설전을 벌였던 터라 마을의 아침은 꽤 늦게 시작되었다. 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래도 각 집마다 걸려 있는―단유가 만들어 선물한―시계를 보면 활동을 시작할 시간임을 알 수 있었음에도 피곤이 몸을 짓누르는 탓에 쉽게 나오지 않았다. 더러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서로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반가운 아침 인사는 없었다.

한참 후, 천장이 좀 더 밝아졌을 때 집 안에만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무리든 지금 당장은 할 게 없었다. 바깥 사정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니 딱히 뭐든 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이.”

“어이.”

“···잘 쉬었나?”

“뭐···그냥 그렇지.”

굼뜬 굼벵이마냥 집에 박혀 뒹굴거렸지만 편히 잘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어정쩡한 답이 돌아왔다. 시원치 않은 답이었지만 이해한다는 듯 물어본 상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겠지?”

“못 할 게 뭐 있나? 절박하면 뭐든 하게 되는 걸. 이 마을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하긴.”

두 사람은 지난 겨울, 단유와 함께 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 힘을 썼던 이들이었다. 말이 되냐고 했던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들은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팔꿈치로 옆을 툭툭 찔렀다.

“응?”

돌아보니 팔꿈치로 찔렀던 이가 눈짓을 보냈고, 그 눈짓을 따라가니 붉은 단발의 사내, 스토보가 미간을 좁힌 채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딱히 마주치기가 싫어서 자리를 이동했고, 그 두 사람의 어색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토보는 뒷머리를 긁던 중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피난민 출신 중의 한 명이었는데, 여태 눈치를 보고 있었던지 숨어 있다 나온 사람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다가왔다.

“어디 가시는 길이오?”

“여기에 갈 곳이 어디 있다고. 돼지우리 같은 곳인데.”

“저기 마을 바깥에 과실 나무가 있다 하던데 같이 가보시겠소?”

몇 그루 되지 않지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열린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한 곳이다. 그리 넓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각자 자기만의 텃밭도 가질 수 있고 마을 밖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다. 가축은 기르지 못하는 상황이라 돼지니, 말이니 하는 것들은 볼 수 없지만, 그 때문인지 늘상 맡던 악취가 느껴지지 않아 숨을 쉰다는 행위가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집에서 간단한 조작으로 물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비록 그 물에 대해서 본인이 의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 물로 씻고 그 물을 마셨다. 물에도 맛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 아침 마신 물은 예전에 마시던 우물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바꿔 말하면, 살기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다. 저 바위가 입구를 틀어막고 있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때 우연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금 막 집에서 나와 어디론가로 향하던 바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스토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바이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바이언이 그를 스쳐 지나갈 때까지 시선을 마주하다가 그가 지나간 후, 자신에게 말을 건 이의 제안에 대답했다.

“일단 살피러 가보죠. 만일에 대비해서. 하지만 그건 우리 것이 아니오.”

아직은 이 마을에 있는 것들, 심지어는 자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집까지 자신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해가 중천을 지날 때, 사울른은 무겁게 눌려 있던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등에서 찌릿하는 통증이 느껴져 사울른은 절로 이를 악물었다. 꾹 참고 일어나 주변을 살피니 지난 새벽의 일들이 떠올랐다.

몸을 추스르고 나오니, 조용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정말 유령 마을이 된 것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마저 불지 않으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아.”

뭔가 아무 소리도 없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사울른이 입을 열고 소리를 내 보았다. 목이 채 열리지 않아 뭔가 막힌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행태가 조금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린 사울른은 옆구리를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바닥과 주변을 살피며 수색 활동을 한 사울른은 에토신스 군이 떠나며 남긴 몇 가지 물건들을 더 찾아냈지만, 대부분은 쓸 데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 잠깐의 움직임도 조금 힘들었는지, 사울른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다음 행동을 생각할 차례였다. 미리 단유와 계획을 맞춰 세울 때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돌아온 단유와 함께 마을로 가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따르자니 너무 무료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사울른도 사람인지라 부상도 입은 마당에 푹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동료’가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마냥 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어젯밤의 일들을 돌아보다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말뚝.’

적들은 다른 말로도 불렀던 것 같지만, 사울른이 보기엔 영락없는 말뚝이었던 그것. 사울른은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본들 뭘 알아본다거나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 주위에 남은 것들은 사울른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리라.

멀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걸음이 느려서 그런지 그곳에 도착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혹시 살아남은 녀석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가져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사울른에겐 다행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효과가 없어진 물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달아나기 급급해서일까? 어느 쪽이든 사울른에겐 훌륭한 전리품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자체보다 그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이 더 만족스러운 전리품이다. 사울른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무릎걸음으로 기듯이 걸어 주변을 살핀 사울른이 일어난 건 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 건 우리 것이고, 저건 달아난 놈들의 것. 그리고 이 건···.’

사울른은 또 다른 흔적을 찾았고, 그 흔적을 거슬러 따라갔다. 매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고 느껴지는 흔적이었는데, 추측하면 말뚝을 설치하기 위해 왔던 적들의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갔더니 사울른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에.’

거기에는 온전한 말뚝이 그대로 있었다. 조금의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고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던 이들이, 이런 기물을 거둬가지 않고 그대로 남겨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가져갔겠거니 했던 것이 눈앞에 있으니 사울른은 갑자기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그것 자체는 여전히 사울른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 그저 ‘말뚝’일 뿐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저것은 훌륭한 ‘미끼’가 될 수 있다.

사울른은 눈을 반짝이며 말뚝 주위를 살핀 후, 예상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자신의 다음 행보가 마련되었다.

****

어느새 긴 하루의 끝이 보일 무렵, 하늘에 붉은 석양이 드리워질 때 단유는 멀리 세워진 부대의 숙영지를 발견했다. 마을 북쪽 언덕 뒤에서 발견한 숙영지와는 전혀 다른 규모의 것이었다.

규모만 따지면 녹스 성 외부에서 단유와 맞섰던 공국군보다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바꿔 말하면 에토신스가 이번 침략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말이고, 게다가 이 군이 에토신스에서 출전한 유일한 군이 아니니 그들의 야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단유의 관심이 아니었다.

사실 이곳의 전쟁 양상에 대해서 눈으로 본 것은 아니고, 전쟁 이후 침략을 받은 땅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단지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지배자가 바뀔 뿐이고 이들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 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확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에토신스의 왕이 무능하다고 알려진 대공보다 더 좋은 지배자일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이곳 사람들의 처지이니 딱히 달라질 게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지배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지구 여러 나라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런 전쟁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단유는 그런 도박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살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면, 스스로 살고 싶은 곳으로 바꿔야 한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단유가 나서는 것은 언행불일치다. 하지만 이 정도를 해주지 않으면, 이곳의 사람들, 특히 에밀리아가 앞으로 살게 될 그곳의 사람들은 결코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금 단유는 오직 에밀리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 에밀리아에게 약속했던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단유는 자전거를 바위 옆에 세우고 에토신스 군의 숙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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