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91화 (691/956)

돌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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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마을의 틀어막힌 입구 앞에서는 소소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이언과 뜻을 함께 하는 일부는, 같이 노력하면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뚫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바이언의 말에 동조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단유를 도와 지하 도시 건설에 조력했던 이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지하 도시가 차근차근 건설되어 완성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바이언의 말에 반발심을 내보인 이들은 마을의 건설에 일부 비협조적이었던 이들과 피난민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수는 바이언과 함께하는 이들에 비해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분노에 찬 경계심과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담긴 독설은 다수의 목소리를 누를 정도였다.

“그럼 언제부터 저 돌을 깨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거요?”

“지금은 할 수 없죠. 혹시 바위를 깨뜨리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리면 병사들이 듣고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바이언의 대답에 혀를 차는 사람과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럼 이대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일단은 넉넉하게 5일 정도는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5일? 5일이나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란 말이오?”

5일이란 말에 바이언에게 동조했던 이들 중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다.

“거 보시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작전이었단 말이오. 5일이나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을 수 있겠소? 그러다 보면 식량은 모두 바닥이 날 것이요. 그리고 집에서 나온다는 물도···솔직히 편리하긴 하다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 나올지, 설마 물이 다 떨어져서 멈추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오?”

붉은 단발 머리의 사내가 머리색 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물은 지하에서 끌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질 리 없다고 그랬소.”

“그것도 그 마법사의 말뿐이지 않소? 그의 말을 어떻게 믿소? 솔직히 마법사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이 지하에 이런 마을을 짓고 사람을 돕겠소? 아무런 도움도 바라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없을 것이오.”

바이언의 곁에 서 있던 눈이 작은 마을의 사내 한 명이 그 말에 발끈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 당신이 그 마법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기나 했소? 지난 겨울 동안 그 마법사가 이곳, 이 도시를 짓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나 아시오?”

“그걸 내가 어찌 아오? 그래, 솔직히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것은 아오. 그래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니 말하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 말처럼 난 그 마법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모르오. 하지만 일찍이 마법사란 이들이 어떤 짓을 해 왔던 가에 대해서는 당신보단 많이 아는 것 같소.”

이때쯤, 집 안에 머무르고 있던 이들도 바위가 떨어지면 난 소음에 놀라 나와서 모여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날 선 대화가 오가는 주변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한 사람이 물었다.

“무슨 짓을 했는데 그러시오? 그 마법사가 당신 가족을 죽이기라도 했소?”

마을 사람의 질문에 붉은 단발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마법사란 이들은 나라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수도에서 왕을 위협하기도 했으며, 사람 목숨을 벌레 보듯 하였소. 그를 막기 위해 나선 수많은 이들이 눈 깜빡할 사이에 비명횡사 했다 하오. 그뿐인가? 어떤 마법사는 사람을 조각내어 생체 실험을 했다는 말도 있소.”

“그···진짜요?”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소문이 돌까? 그래서 예전에 전 세계의 나라들이 힘을 합쳐 마법사를 죽이려 들었던 거지.”

“난 모르겠소.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다 다른 법인데, 마법사라는 이들이 모두 그럴까 싶소. 더구나 지난 겨울 동안 함께 지내본 그는 절대 잔인한 마법사라거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성격이 아니었소.”

단유를 비호하는 발언에 붉은 단발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생각이 있으면 대놓고 그랬겠소? 특히 이런 지하 마을을 지으려는 계획을 미리 세웠던 것이라면 더욱 자기 속내를 감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소?”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여태 입술을 굳게 닫고 있던 바이언이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은 그가 일부러 우릴 여기 가둔 것이란 말이군. 하지만 저 장치를 조작한 것은 우리요.”

“당신들이 속은 것이오. 바이언, 당신도 마찬가지로 속은 것이오. 만약 일찍 계획을 세워놓았던 거라면 우리 모두에게 알렸어야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만든단 말이오?”

“상황이 갑자기 변해서 그런 것 아니오? 게다가 저 장치도 만든 건 얼마 전이었소. 처음에는 입구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많은 병력이 이곳에 도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오.”

“그걸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는 말이오. 설마 바이언 당신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오?”

“모르고 있었소.”

“거 보시오.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건 마법사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의심스럽지 않소? 만약 그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인 온정을 베푼 것이라고 믿는 이가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바라오. 이제껏 살면서 난 그런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소.”

피난민 출신 사내의 말은 모인 사람들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

전단의 숙영지에서 멀리 벗어난 단유와 사울른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음 일을 논의했다.

단유는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사울른.”

“네.”

“남은 일은 저 혼자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둥치에 기대어 있던 사울른이 단유를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이제는 제가 짐이 되겠군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아뇨. 확실히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체력이 부족하네요. 더구나 같이 가더라도 제가 도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사울른은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울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마워요.”

사울른은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단유는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울른이 그 손을 붙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일단 지금은 마을에 돌아가기 힘들 테니까 지상 마을에 가서 좀 쉬는게 어때요? 데려다 줄게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부축해드릴게요.”

“제가 발목을 잡는 거 아닌가요?”

“그리 서두를 일은 아니잖아요?”

단유는 어깨뿐 아니라 허벅지와 옆구리에도 깊지 않은 상처로 출혈을 보이는 사울른을 부축해 지상 마을로 향했다.

“근데 루치드.”

“네.”

“마을은, 괜찮을까요?”

“흠···괜찮을 거예요. 당장은. 하지만 필요한 일이고 한 번은 거쳐야 할 문제일 거라고 생각해요.”

“······.”

“좋은 집, 넓은 땅이 있다고 살기 좋은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압니다.”

사울른은 흐린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살기 좋은 곳은 그곳에 사는 이들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네.”

단유는 조그만 빛의 구슬을 띄어 앞을 밝히고 사울른과 함께 밝아진 길을 따라 걸었다.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길에 난 억센 풀들이 흔들리며 우는 소리가 났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졌던 싸움이 무색하게 두 사람이 걷는 길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사울른이 가끔 신음을 참으려 끙끙대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저 밤산책을 나온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사울른도 나름의 생각에 빠진 듯 입을 열지 않았고, 단유도 딱히 말을 하지 않으니 땅을 스치는 두 사람의 걸음 소리만이 전부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싸움의 와중에도 불쑥 치밀던 의문이 거침없이 솟아올라 단유의 기분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간 숱한 결정들을 내려야 했던 단유. 그가 판단하고 선택했던 것들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되짚어보았다. 이성적이려고 노력했지만, 때때로 감정에 치우쳐 섣부른 결정을 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이기적인 선택들로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적의 목숨을 빼앗는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단유는 직접 손을 써서 상대의 생명을 뺏었다. 익숙하지 않은 칼로 상대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고, 머리를 내리쳤었다. 피가 튀고, 잘려진 내장이 베인 틈을 비집고 나오며, 끔찍한 얼굴을 한 채로 식어가는 적들의 모습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강렬한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미지만큼이나 무덤덤했던 자신의 당시 감정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흡사 사이코패스가 된 기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이 단유의 첫 살인은 아니다. 분명 오래된 기억 속에 저장된 첫 살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마법을 이용했던 탓도 있고, 그 살인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고, 굳이 핑계를 들 수 있겠지만, 이번 일은 예전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같은 지도 모르겠다. 번번이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서 본인은 어떤 선택을 했던가? 어떤 때는 동정 없는 무자비한 마음으로 적을 처단했고, 또 어떤 때는 변덕스런 인내심으로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선 적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당시에는 대화로 서로의 엇갈린 생각을 조율하여 화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화의 어려움을 느꼈고, 어떤 이들을 상대로는 대화라는 방식이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어떤 말로도 서로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는 사실은 단유를 지치게 만들었고, 효율을 중시하는 단유의 성향과 맞물리면서 서서히 방법을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급생의 목을 졸랐고, 위협을 가하려던 불량배들을 마법이라는 힘으로 죽였다. 그리고 마법의 통제력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용, 수십 명의 병사들이 폭발에 휘말려 죽었지만, 단유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오늘, 몇 달 전과 달리, 비록 마법을 쓸 수 없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기라는 의식이 없었던 상황이었건만 단유는 대항한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 당시 손에 전해졌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분명 지구에 있다가 이곳으로 왔을 때 마음먹긴 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것을 부셔 버리겠다고, 거침없이 나가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죽이고 피로 물든 땅 위를 걷겠다는 다짐은 아니었다. 그건 그야말로 살인광이나 할 법한 소리 아닌가.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느냐? 그건 또 아니다. 이런 의문을 품는 이 순간에도 단유는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노라고 판단했고, 그 상황에서 단유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하지 않은 출신이고, 남들이 쉽게 겪지 않을 일들도 겪으며 자랐지만, 그래도 단유는 본인이 평범한 현대 시민들이 가지는 정도의 이상(理想)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히어로 무비에나 나올 법한 대사처럼, 박애주의에 가득차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공부를 계속하며 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조금 더 욕심이 있다면,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며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 정도. 그래서 그의 친구들, 그의 가족들이 행복할 수 있게 돕는 것 정도가 전부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또 다른 피를 손에 묻히게 될 터인데. 과연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또 지루한 대화의 평행선을 내달리면서 간극을 좁히려 노력해야 하는 걸까?

문득 ‘힘의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한 사회학자의 책을 번역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 학자는 대화의 불균형은 곧 힘의 불균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화는 힘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완벽히 동일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힘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 격차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상당히 요원한 일이라고 말했다.

‘힘이 없으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다. 때로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대화의 우위에 서려고 무리하거나, 혹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화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힘이 있는 자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 상대의 자극에 맞설 수도 있고, 상대의 포기를 비웃을 수도 있다. 혹은, 지루한 대화를 끝낼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다. 사실 원만한 대화를 위해서는 힘을 가진 이가 자신의 힘, 또는 권리를 포기하면 된다. 그러면 그 즉시 대화의 균형점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권리를 포기할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도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겼던 문제지만, 지금에 와서 특히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마지막 문장.

단유는 자신이 가진 힘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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