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90화 (690/956)

돌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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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그냥 여기서 잠시 쉬세요. 저 혼자 가도 충분하니까.”

“아닙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방해는 안 될 겁니다.”

“방해가 안 될 건 알아요. 도움이 많이 되겠죠. 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정말 괜찮습니다. 지난번보다 덜 다쳤는걸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젓는 사울른을 지켜보던 단유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선 제가 나서서 정리할 테니, 사울른은 숨겨진 적들이 없는지만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신호 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인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단유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뗐다.

지금 단유가 찾는 것은 바로 에토신스 군의 숨은 병력. 숨은 병력이라 표현하니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사울른의 말에 따르면, 처음 관측했던 것 이상의 병력이 모여든 상황이라고 했다. 이후 이어진 상황을 보면 흑의인들과 협력 관계였던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흑의인들을 물리친 것에서 끝날 일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처음에 단유와 사울른을 포위했던 궁병대도 에토신스 군이었으니, 그들이 비록 물러나긴 했어도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오늘 밤의 전쟁은 끝이 났다고 할 수 없었다.

작은 언덕을 오르는 대신,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두 사람은 곧 넓지 않은 목초지에 세워진 숙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언덕을 넘어야 보이는 이곳은 야생의 억센 풀들이 길게 자라난 곳이었는데, 낮지만 충분히 시야를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언덕이 주변에 솟아난 덕분에 들키지 않고 병력을 대기시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숨기려 들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사울른이라는 정찰병의 수색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어쩌면 그냥 서로의 시야가 엇갈려 발견이 안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의도치 않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경우가 있다. 시쳇말로 ‘운때가 맞았다’고 표현하는 경우다.

그러나 지금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단유는 손바닥 위에 바람을 일으켜 마법이 잘 된다는 것은 확인 후, 횃불이 타오르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숙영지의 정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누구냐!”

“여기 전단장을 보려고 왔습니다.”

오는 동안 사울른에게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단유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누군데, 전단장을 찾는 것이냐?”

복장으로 보건대 그저 허름한 망토(cloak) 하나만 걸친 단유였기에 숙영지의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재 작전으로 병력들 일부가 나가 있는 상황이라 외부인의 접근을 경계할 뿐이었다.

“당신들이 찾던 사람.”

“응?”

경계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누굴 찾고 있었나?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시간 단축을 위해 간단한 마법을 썼다. 바로 눈앞에서 터지는 섬광에 경계병들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감쌌다. 그리고 그 사이를 단유는 유유히 지나갔다.

경계병들이 비상을 외치는 소리에 숙영지 내부에 머무르고 있던 소규모 병력들이 무기를 들고 분분히 일어서 달려왔다. 단유는 손을 한 번 크게 내저었고, 그에 따라 바람 마법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리들을 간단히 치워버렸다.

“마인이다!”

병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며 물러서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단유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금방 멈추고 말았는데, 기다렸던 대상이 직접 앞에 나선 까닭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을 두 손으로 쥐고 경계 태세를 한 채 굳은 얼굴을 한 사내는 주변의 병사들과 사뭇 다른 복장―공을 들인 철제 갑옷(chainmail)과 건틀렛, 전혀 해진 부분이 보이지 않는 가죽바지 등은 일반 병사들이 착용하기 어려운 복장이었다―이라 척 봐도 계급이 높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냐?”

“당신이 전단장인가요?”

“누구냐고 물었다!”

“마법사요.”

흠칫 놀라는 얼굴의 전단장에게 단유는 자신을 증명할 겸 다시 바람을 일으켜 주위에 뿌렸다. 사막의 모래폭풍 마냥, 흙과 먼지, 그리고 작은 풀잎들이 휘돌며 다가오니 팔을 들어 얼굴을 막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단유는 전단장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엉겁결에 칼을 놓치고 만 전단장의 얼굴에 당황이 물들 때, 단유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지팡이처럼 짚고는 말했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이익!”

전단장의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서 있는, 그래서 너무 많은 틈을 보이고 있는 마법사가 두려웠다.

그 시간, 사울른은 단유가 소란을 일으키는 사이 몰래 숙영지를 돌아 전단장이 머물고 있었던 텐트로 숨어들었다. 내부를 뒤져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낸 뒤, 다시 조용히 물러났다. 물러나는 사이에 멀지 않은 곳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있던 단유와 눈이 맞았다. 사울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의 시선은 다시 전단장에게로 돌아갔다.

“당신이 책임자라면, 이 병력들을 물릴 권한이 있지 않나요?”

“지금 우리보고 항복을 하란 말인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충돌을 피하자는 이야깁니다.”

“그럼 네가 물러나는 게 어떤가?”

“저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제가 지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위대한 폐하의 명에 따라 출전한 에토신스 군이 고작 한 사람 때문에 후퇴를 명한다면 우리의 명예가 아니라 위대하신 폐하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여러분들의 목적지는 이곳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저도 더는 물러나라 하지 않겠습니다.”

미묘한 어감에 전단장은 발끈하려던 것을 멈추고 단유를 노려보기만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전단장은 다시 단유에게 물었다.

“무슨 뜻인가? 넌 공국을 위해 우리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전 공국군이 아닙니다. 또한 공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전 그저 이곳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 할 뿐입니다.”

전단장은 단유의 말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게, 무려 마법사다.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세상에서 두려울 게 하나도 없는 존재가 바로 마법사 아닌가?

“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하소연도 못하고 그저 빼앗기거나 짓밟힐 뿐인, 힘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당신이 왜?”

그들은 어차피 그렇게 살 운명인데, 그것을 왜 억지로 비틀려 하는가? 이런 의미가 담긴 반문이었고, 단유는 그의 반문에서 머릿속에 뿌리박힌 선민의식을 읽었다.

예전, 노예제도가 성행하던 시절, 사람들은 노예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했던가? 앞에 선 전단장도 양민, 시민, 백성 이란 명칭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울른이 특이하다. 계급이 낮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공국군에 환멸을 느꼈다는 사울른의 고백을 떠올리며 단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전 여기에 지킬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곳 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역시 당신들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단유도 앞에 선 전단장과 크게 다르진 않다. 사실 이 땅에서 평생을 산 것도 아니다 보니 사울른이 말하는 국민, 백성을 위하는 마음, 소위 애국심이란 게 있을 리 없었고, 전단장과 같은 선민의식으로 뭇 백성들을 하찮게 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는 영웅심도 없었다. 그저 연이 닿아 알게 된 이들, 이른바 ‘인연’에 대해서는 소중히 생각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주지 않는 단유였다. 그것은 이곳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지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단유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이다. 석양이 지기 전 시행된 작전은 이들의 출현으로 실패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전단장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에겐 권한이 없다. 이 작전의 최종 명령권자는 부대장에게 있으니.”

단유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음?”

“이제 당신이 이 부근에 남은 에토신스 군의 명령권자일 겁니다.”

전단장의 눈이 커졌다.

****

숙영지를 찾기 전, 단유와 사울른이 곧바로 향한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언덕을 내려오자마자 마을을 향해 갔다. 당시까지는 에토신스의 숙영지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마을로 가는 길에서 단유는 뜻밖의 매복과 만났다.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엎드려요!”

단유는 소리치며 바람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감싸는 모양으로 회오리가 휘몰아치며 솟아오르더니 거침없이 날아오던 화살들을 모두 튕겨냈다.

바람에 시야가 많이 제한되었지만, 단유는 드러난 적 부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번갈아가며 시위를 매기는 적의 동태를 확인한 단유는 다른 생각 할 것 없이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폭음 속에서 단유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수가 확연히 줄었을 때, 단유는 회오리를 흩어버렸다. 사울른의 어깨를 짚으며 ‘눈 감아요’라고 짧게 말한 후, 머리 위에 섬광을 터뜨렸다.

그 섬광이 그들을 포위한 궁병대의 마지막 빛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단유와 사울른이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일단의 경보병들이 창과 칼을 들고 경계태세를 한 상태였다.

“겁먹지 마라!”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으려는 부대장의 목소리는 폭음에 묻혔다.

****

“죽였는가?”

전단장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단장의 죽음 덕분에 30명 가량의 병사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숙영지의 위치를 알아낸 뒤, 이곳으로 온 단유와 사울른이었다.

“그럼 나도 죽이지 그러나?”

사울른이 당부하지 않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현재 이 부근에는 숙영지의 병력까지 포함해 대략 60명 이상이 남은 상황이었고,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을 생각이라면 전단장 한 명 정도는 살리는 게 좋다는 사울른의 의견이었다.

“다시 부대에 복귀하는 병력도 있겠지만, 어떤 녀석들은 여기저기 떠도는 도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마저도 애국심으로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사울른이 걱정하는 범위는 단유가 생각하는 것 이상인 것 같긴 했다.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사울른이 단유와 함께 하는 것도 단유가 그 힘을 아무 데나 투사하지 않도록, 그래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막으려는 생각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단유는 전단장의 물음에 답했다.

“당신이 여기, 그리고 마을에 남아있는 병력들을 모두 통솔해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전단장은 단유의 속내를 알고 싶다는 얼굴로 그의 눈동자를 주시했지만, 단유의 검은 눈동자는 그저 잔잔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단유가 약속된 장소로 돌아왔을 때, 사울른은 나무 둥치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대답하며 품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단유가 이를 받아 펼쳤을 때, 그곳에는 예의 그 낯선 문자들이 묘한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종이 두루마리를 한 장 꺼내 단유에게 건넸는데, 그것은 단유가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사울른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슨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게 되었네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두루마리를 펼쳤다.

“해 보셨어요?”

“하긴 했는데, 그게 되는지 안 되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더군요.”

“해 보세요.”

단유는 사울른에게 두루마리를 다시 건네고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마게이아의 이름으로 선언하니, 크리프(κρ?βω).”

그 순간 사울른의 모습은 물론이고 기척까지 사라졌다.

“이게 진짜 ‘마법’이네요.”

곧 두루마리를 말아 넣는 사울른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래서 마을에서는 찾을 수 없었나 봅니다.”

다시 건네진 두루마리에는 조금 전 봤던 글자가 사라지고 텅 빈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마을에서 부대장의 거처를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단유는 빈 종이를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회용이라니. 신세계네요.”

사울른이 큭큭 웃음을 흘렸다.

“왜요?”

“마법사가 마법을 보고 신기해하니 신기해서요.”

정말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이가 바로 눈앞의 단유 아닌가? 고작(?) 모습을 감추는 이런 마법 정도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 사울른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새 이런 마법을 두고 ‘고작’이라고 평할 정도가 되었나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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