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89화 (689/956)

돌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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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사울른은 달리던 도중에 흔적을 발견했다. 흔적이라기보다는 기척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뒤에서는 여전히 적들이 쫓아오는 상황이지만, 사울른은 끝까지 집중하여 그들이 말하는 ‘결계’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언덕을 내려가며 몇 번은 발을 헛디디며 구를 뻔도 했지만, 끝내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붙여 달아나는데 힘을 썼다. 그리고 거의 언덕 아래로 내려왔을 때, 사울른의 방향에서 왼쪽 부근, 수목과 바위가 솟아난 곳에 기척이 느껴졌다. 자신들이 싸우던 곳과 너무 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매복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장소인지라 사울른은 의심을 품었고, 곧바로 달리던 속도에 제동을 가하며 몸을 틀었다.

“막아!”

고맙게도 뒤에서 친절하게 사울른이 짚은 곳이 옳다는 것을 인증해주는 외침이 있었다.

언뜻 바위 오른쪽으로 그림자가 슬쩍 비쳤다가 사라졌는데, 어둠 속이라 들키지 않을 뻔도 했지만, 사울른의 오랜 수색 경력이 이를 발견해냈다.

단검을 고쳐 쥐고, 다리를 박차 바위를 딛고 위로 뛰어오른 사울른. 아래에서 달빛에 빛나는 곡도 하나가 반월을 그리며 사울른을 향해 휘둘러졌지만, 다리를 접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회전하는 사울른은 그 공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뒤돌며 다시 가로 베기를 시도하는 흑의인의 공격을 단검으로 쳐낸 뒤, 뒤돌아차기로 상대의 배를 걷어차고 잠시 자세가 무너진 틈 사이로 사울른의 놀라운 단검술이 빛을 발했다.

적이 바닥에 엎어진 틈에 사울른은 그의 발치에 가려져 있던 하얀 말뚝을 발견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있는 힘껏 발로 차면 어쩐지 그 말뚝을 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였다.

“악!”

발등에 금이라도 간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무식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러나 엄살 부릴 여유가 없었다. 뒤쫓던 이들도 거의 다다른 상황.

다시 말뚝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지름을 가진 말뚝의 위에는 꼬불꼬불한 선들이 정렬되어 새겨져 있었다.

****

예전 동판 조각들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단유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동판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글쎄요. 일단 그렇게 보이니까요.”

솔직히 상대가 마법사만 아니라면 코웃음 쳤을 대답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사울른은 쉽게 수긍했다.

“그럼 이···.”

“문자요.”

“이게 문자인 건 맞습니까? 그냥 다 벌레 기어간 자국 같은데.”

“규칙성이 있거든요. 여기에 쓰인 글자는 총 79자이고, 그중 27쌍은 중복성이 있어요. 그리고 3자 이상의 동일 단어가 반복되고 있고요.”

“그런 걸 알 수 있는 겁니까?”

“그냥 세어보면 알 수 있어요.”

“네···뭐, 아무튼, 그럼 이 글자라는 게 루치드의 마법을 방해한 겁니까?”

“방해, 라기보다는 봉쇄라고 해야 옳을 듯 하군요.”

“신기하군요. 글자에 그런 힘이 있다니.”

“저도 그게 참 신기하네요. 무슨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도 아니고.”

“게임이요?”

“그런 게 있어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화제를 바꿨다.

“이런 문자를 그들은 몸에도 똑같이 새겼더랬죠. 아마 이 글자, 혹은 이 글에 어떤 초월적 힘을 내게 하는 효과가 있나 봅니다. 이 동판이 깨져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이 글자가 훼손되는 바람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죠.”

“들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도 어려운 이야기군요.”

단유는 싱긋 웃으며 깨진 동판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사울른은 이런 글자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래도 다시 그들과 붙게 된다면 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례가 많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이들이 몸에 새긴 것들, 그리고 이런 동판들을 보면 철저히 마법사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죠. 하지만 혹시라도 파훼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글자를 훼손시키는 정도로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거 같네요.”

조각 하나를 들어 손톱으로 긁는 시늉을 하는 단유였다.

****

사울른은 단검을 높이 쳐들었다가 말뚝 위, 벌레 기어가는 문양 위를 내리찍었다.

번쩍.

마치 부싯돌을 친 것 마냥 불똥이 튀고 잠깐 눈앞이 밝아졌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단유가 했던 마법처럼 눈을 멀게 하진 않았다.

‘된 건가?’

하얀 말뚝은 어느새 검게 변해 있었다.

****

“역시 악마의 힘을 빌린 것인가!”

일레아드의 감상에 단유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여전히 칼은 손에 익지 않았고,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밴 땀 때문에 몇 번을 고쳐잡는지 모른다. 그래도 놓치지 않으려 있는 힘껏 손잡이를 꽉 쥐고 그저 보이는 방향으로, 틈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찌르고 베어나갈 뿐이었다.

그저 보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진언의 힘마저 넘어서는 악마의 힘이라니!”

일레아드를 비롯한 살아남은 소수의 흑의인들은 이를 악물었다.

“저 악마를 기필코 처단하리라!”

각오를 다지는 모습만 보면, 진짜 단유가 무슨 악당, 아니 악마라도 된 것 같다. 그리고 저들은 그 악마를 죽여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힘쓰는 영웅의 무리 쯤으로 보이고.

그러나 그런 재미없는 스토리에 반응을 보일 기분은 아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흑의인들에게 쫓기고 있을 사울른이 걱정되고, 마을에 있을 에밀리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 염려된다.

숨을 깊게 들이쉰 단유는 다시 무릎을 굽혔다. 쉽게 접근하지 않을 모양새라면 자신이 먼저 뛰어들어 가리라. 이제는 자신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일단 일레아드는 피한다. 그는 생각 외로 날카로운 공격을 구사하는데, 단유가 쉽게 피하거나 막기 어려운 수준의 검술을 가지고 있어 그냥 대적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대신 다른 이들을 싸움판에 끼어들게 하면 일레아드도 쉽사리 칼을 휘두르지 못하는 제약이 생기니,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빨리 움직이는 것, 마치 적진에서 미친 듯한 드리블로 상대를 속이고 나아가는 명수처럼.

그때였다. 막 뛰어나가려던 그 순간, 단유가 마주 선 방향에서 미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

적들과 상대하는 동안 느껴지지 않던 바람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언덕 위를 내달리던 밤바람과는 다른 바람의 기운이란 생각이 들었고, 전신을 휘감는 묘한 느낌에 단유는 잠시 몸을 떨었다.

‘설마?’

생각에서 그칠 게 아니라, 실천에 옮겨 확인을 해 본다.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단유가 선 땅 위에 서 있던 풀들이 눕고 흙들이 휘날리며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성공했구나.’

단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니 곡도를 내밀며 준비를 하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조리 흩어져라. 조금의 앙금도 남기지 말고.’

“해제.”

빛이 번쩍이고, 거의 동시에 주변을 울리는 소리의 파장이 공기를 매질로 확산 되기 시작했다. 또한 열에너지가 발산하며 순간적으로 급격히 올라간 온도에 몇몇은 손에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화상 정도는 얌전한 수준. 쥐고 있던 칼이 사라지고 그것을 기폭제 삼아 터진 폭발에 손과 팔을 잃은 이들이 뜨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앞서의 공방에서 미리 숨을 거둔 이들이 부러울 정도.

그리고 일레아드 역시 다른 이들과 비슷했다. 특히 그는 쌍곡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다른 이들의 두 배에 달하는 폭발력에 휘말리고 말았다.

“끄아악!”

비명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던 언덕 위의 싸움터에서 오직 단유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아우성치는 적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리 여유있게 감상하고 있을 때는 아니라, 단유는 금방 몸을 돌렸다.

****

이변을 느낀 것은 사울른을 쫓아왔던 흑의인들도 마찬가지. 사울른을 사정거리에 두고 마지막 일격만 남겨두었던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아찔할 정도의 폭음과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비명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눈으로 그들이 세운 기둥이 훼손된 것을 확인한 상황. 말하자면 곧 저 비명이 자신들의 입에서도 나올 차례임을 직감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억지로 버티며 항전할 사울른과 투닥거리며 시간낭비를 할 여유가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서로 눈으로 의사를 확인 후, 곧바로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하는 흑의인들. 사울른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진 사울른이 땅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그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까?”

“···다행히도요.”

“덕분입니다.”

“다행이네요.”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단유는 여전히 사울른의 등에 박혀 있는 단검에 눈이 닿았다. 단검을 뽑고, 사울른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려 신음을 흘리고, 단유는 쓰러진 흑의인의 옷을 벗겨 죽 찢어낸 뒤 이를 사울른의 몸에 감아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다 끝난 겁니까?”

“일단 여기는요.”

아직 다 끝났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

단유와 사울른이 나간 직후, 바이언은 굳은 얼굴로 마을로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 있었나?”

“이야기는 무슨.”

“그런데 왜 따라오라고 했던 거야?”

“그냥 배웅해달라는 거였지.”

말도 안 되는 핑계에 사람들은 바이언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이런 일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바이언은 억지를 부리며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홀로 집에 앉아, 입으로 손톱을 뜯었다.

얼마 후, 천장이 어두워질 때쯤, 바이언은 사람들을 불렀다.

“처음 이야기한 대로, 입구를 봉쇄해야겠어.”

“그럴 거면 아까 할 것이지.”

몇몇의 투덜거림은 무시하고 바이언이 앞장섰다.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며칠 전 단유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 시킨 개폐형 조작기 앞에 섰다.

바이언과 사람들이 바닥에서 삐죽 나와 있는 레버를 붙잡았다. 작지 않은 레버였고, 작동하는 데도 힘이 많이 드는 터라 여러 사람이 함께 밀어야 했다.

원래는 손쉽게 레버를 작동시킬 수 있게 만들려 했으나, 그러면 누군가가 손쉽게 입구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작동 장치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레버를 밀자 바닥과 벽에서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입구가 흔들리나 싶더니 곧 커다란 바위가 입구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어떤 사슬에 매달려 있었던지 차르르 사슬이 풀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지반을 뒤흔드는 진동과 소리에 묻혀버렸다.

“이거 다시 열 수는 있나?”

입구를 막은 바위를 보면서 누군가가 물었다.

“이걸 거꾸로 밀면 들어 올려지지 않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레버로 향했다. 글쎄. 저 커다란 바위를 떨어뜨린 것은 들인 힘에 비교하면 쉬운 편이었다고 쳐도, 과연 들어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일까?

“그러고 보니 왜 이걸 만들어 놓고 운용해보지 않았던 거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닌가?”

“혹시 말이야, 우리 이대로 영원히 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점점 웅성거림이 커질 때, 그때까지도 말없이 바위를 바라보던 바이언이 돌아섰다.

“실은 할 말이 있네.”

“뭔가?”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의 사람들이 바이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문, 앞으로 열지 못할 걸세.”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만약 이 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저 바위를, 깨뜨려야 한다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자네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이걸 작동시켰단 말인가!”

“이게 무슨···그럼 우리는 산채로 여기에 묻힌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바이언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외부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은가?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바위를 부셔 나가기 시작하면 곧 나갈 수 있을 걸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도 이 안에 왠만한 건 다 갖춰져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 아닌가?”

물도 있고, 식량도 구비 되어 있었다. 작지만 경작할 수 있는 땅도 있고, 나무도 심어 놓았다. 추위에 시달릴 이유도 없고, 더위에 지쳐 쓰러질 이유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네는 그걸 미리 알았단 말인가? 그럼 말을 해줬어야 하지 않나?”

“말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무엇인가? 어차피 입구는 막아야 우리가 살 수 있었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걸 어느 세월에 부수고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전에 우리는 먹을 게 다 떨어져서 굶어 죽을 걸세.”

“가진 걸 조금씩 나눠서 먹으면 괜찮을 거야.”

그러나 분노가 어린 붉은 얼굴은 쉽사리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젠장! 우리가 마법사 놈에게 속았어! 마법사 놈은 여기에 우리 무덤을 만든 거야!”

“무덤이라니. 이렇게 살기 좋은 무덤이 있던가?”

“살기 좋다고? 흥. 그렇게 살기 좋으면 자네나 평생 이곳에서 살게나. 우린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고!”

바이언은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도 같은 생각들인가?”

“······.”

“바이언,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말했듯이, 이 바위를 부수는 일에 전념해야지. 각자가 힘을 합치면 오래 걸리지 않아 통로를 개방할 수 있을 거야.”

바이언의 말에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들이 다시 입구로 시선을 돌리니,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바위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할 수 있으면 해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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