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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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아드는 단유를 가볍게 해치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의 발악은 가상했지만, 그래봐야 힘이 떨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숨을 고르던 단유는 전과 달리 별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일전에 겪었던 상황이었고, 침착하게 대응만 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를 보는 이와 열을 보는 이의 차이는 크다.
이를 모르는 일레아드가 쌍곡도를 휘두르며 접근했다. 지금껏 단유가 용케 피하는 모습을 보며, 그럼 피할 곳이 없도록 해주겠다, 고 마음 먹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피하는 게 전부는 아니다. 뻔히 보이는 공격인데 막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유는 뺏은 곡도를 밀어 넣었다. 두 개의 곡도가 한 개의 칼에 막혀 공격이 멈추자 일레아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갔다. 그러나 단유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밀어넣은 칼을 회수하며 몸을 돌렸다. 일레아드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으려 잠시 물러났던 적에게 접근하여 회전력을 담아 칼을 휘둘렀다. 다급히 뒤로 물러나지만 단유가 조금 더 빨랐고, 상대는 허리를 깊게 베이며 넘어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단유는 바닥을 발로 한 번 찧었다. 발치에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튀어 올랐고, 단유는 처음 돌렸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칼을 휘둘러 돌멩이를 오른쪽에 서 있던 적에게 날렸다.
큰 피해는 입지 않을지라도 갑자기 날아온 돌이라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한 흑의인은 거의 동시에 내달려 온 단유의 어깨 차칭은 피하지 못했다. 덩치가 큰 단유의 태클에 밀려 언덕 아래로 굴러 넘어지는 상대를 뒤로하고 단유는 다시 몸을 회전하며 칼을 휘둘렀고, 쌍곡도로 단유의 빈틈을 노리던 일레아드의 공격은 또 한 번 막혔다.
허리를 노리고 아래에서 위로 짓쳐 들어오는 또 다른 곡도는 반보 물러나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내고 그 곡도가 회수되기 전에 단유가 먼저 접근하여 상대의 팔목을 칼로 그어 내렸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던지 상대가 억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의 팔목은 간단히 분리되었고, 분리된 손목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단유는 또 다른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찌르고, 다리를 차는 현란한 동작들이 마치 이전에 수백 번은 연습해 본 것 마냥 이어졌다. 그리고 상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합을 맞쳐온 연기자들인 것처럼 단유의 공격에 당하며 무력화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레아드는 단유를 향해 칼을 내지르지 못하고 그저 단유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은 이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말해주지만, 누구도 그런 일레아드를 신경쓸 틈이 없었다.
20명 넘게 포위하고 있었는데, 단유에게 단 한 명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치 짠 것처럼 한 명씩 땅에 드러눕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쓰러지니 점점 단유의 주위에는 서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단유는 단지 포위망을 약하게 하는 것에만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 숨을 고를 때 주변을 살피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확인했던 바였다. 또 다시 한 명의 허리를 깊게 밴 단유는 그의 허리에 매어 있던 단검을 가볍게 빼앗아 등 뒤로 힘껏 내던졌다.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던 단검은 사울른을 공격하려 준비하던 흑의인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그러나 단유는 그것을 확인하려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휘두르고 던지고 차고 막았다.
“그만, 모두 물러서라!”
뒤늦게 일레아드가 심각성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을 때, 이미 단유 주위에 제대로 선 사람은 다섯도 남지 않았다. 모두가 다급히 물러선 이후에야 단유는 허덕이는 숨을 고르며 멈출 수 있었고, 그의 시선은 일레아드에게 머물렀지만, 동시에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레아드가 물었다.
“설마···마법이 막히지 않은 것이냐?”
단유를 향해 물었지만, 대답은 일레아드의 곁에서 공격을 이어가던 요헨이 대신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결계는 정확히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런···.”
거기에는 요헨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단유가 보여준 마법같은 ‘체술’만 보면, 오직 평생을 체술의 수련에만 바친 무도가처럼 보였으니까. 사람의 시야는 한정적이라 눈에 보이는 않는 이른바 ‘사각지대’가 있고, 그 사각지대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유는 그런 공격마저도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피해내고 반격을 해내는 것이다. 그런 기술은 일레아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울펜 그자가 비록 욕심이 많고 생각이 짧은 자이긴 하나 실력이 떨어지는 자는 아니었지.”
객관적으로 보면 울펜은 일레아드와 비슷한 수준의 검을 쓰는 자였는데, 그런 자가 당했다고 했을 때는 그저 그의 욕심 때문이라고만 치부했던 게 잘못이었나보다.
숨을 허덕이고는 있지만, 딱히 지쳐보이지 않는 단유를 바라보는 일레아드의 눈이 번들거렸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이랄까.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만, 그래도 정말 각오하라. 어둠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너의 사지를 도륙하고 너의 피를 제단에 바치리라.”
일레아드는 곡도를 역수로 틀어쥐고는 자신의 팔뚝을 길게 그어내렸다. 옷을 찢고 피부 위에 새겨져 있던 문신까지 갈라내니 그 위로 검붉은 피가 따라 흘러내렸다. 뒤이어 요헨과 남은 이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팔뚝을 그어 내렸다.
그러나 단유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들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여 허겁지겁 막기에 급급했었으나, 간간이 단유의 도움이 있어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사울른.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단유의 활약에도 눈 돌릴 틈이 없었으나, 흑의인들이 재정비를 하기 위해 잠시 물러난 사이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루치드.’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분명 지금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황일 텐데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아니, 대응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압도한다. 마법사가?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자신은 지난번 싸움 때 얻었던 상처가 덜 아문 탓에 몸을 쓰는 게 편하지 않았고, 그래서 치명적이진 않으나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상처를 새로이 입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적들의 일부가 동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울른은 그것을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 행동을 계산했다.
‘루치드를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자리를 피해 사람을 줄여야 하는가?’
자신이 일부의 사람을 끌고 가면 부담이 훨씬 더 줄 것이고, 자신의 싸움에도 집중할 수 있으니 그것도 도움이 될 터이다.
아니면,
‘이번에도 마법을 막게 하는 기물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서 파괴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기물이 어떤 모양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지만.
‘찾을 수 있을까?’
수색이 주업이었던 사울른이다. 물론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한가롭게 수색할 수만은 없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해내야 하는 상황이리라.
‘하자. 할 수 있어.’
이 자리를 피하면 그를 쫓아올 적들이 적어도 4명 이상이라고 판단된다. 4명을 따돌리며 수색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아마 죽음의 위기를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넘겨야만 가능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사울른은 생각했다.
문득 자신의 이런 각오가 우습게 느껴졌다. 마법사, 루치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살고 싶어서 그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지금은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다. 물론 그때는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이기려들지 않는 군에 실망을 하고 있던 때인지라, 그런 군을 위해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합리화시킬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결정은 어쩐지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를 돕기 위해 희생하려 드는가.
사울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각오가 흔들리면 안 된다.
‘좋게 생각해. 성공하면 둘 다 살 수 있어.’
성공하면, 말이다.
한 눈 팔지 않고 사울른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적들은, 어떤 낌새라도 느껴지면 금방이라도 칼을 내지를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적들을 상대로 빈틈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 그래서 사울른은 약간의 상처는 감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선을 좌우로 훑으며 경계하던 와중, 오른쪽 다리를 굽히며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오른쪽에 섰던 흑의인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몸을 움찔거릴 때, 오른쪽 다릴 박차고 반대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사울른의 페인트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대응하려던 때에, 왼쪽에 선 흑의인 쪽으로 몸을 던졌던 사울른이 단검을 휘둘렀다.
사울른의 선공에 곡도로 마주쳐 가려던 흑의인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울른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고, 칼을 휘둘러 시선을 뺐은 뒤 바닥에 누울 듯 몸을 아래로 내던진 사울른은 사내의 옆을 구르며 지나갔다. 그 사이에 상대의 아킬레스 건을 향해 단검을 휘둘러 깊은 자상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내의 비명을 뒤로 하고 급히 몸을 일으킨 사울른은 언덕 아래로 내달렸고, 뒤에서 단검 하나가 날아와 어깨에 박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레아드를 비롯한 동료들이 결사의 의식을 치르던 와중이라 흑의인들의 경계가 살짝 풀린 것도 있지만, 너무 절묘했던 움직임이라 사울른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쓰러진 이를 제외한 네 사람이 사울른을 쫓아 언덕을 내달려갔다.
그러나 그런 소동에도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단유만 바라보며 번들거리던 눈빛을 내뿜던 일레아드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죽어라, 마인!”
물론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은 단유는 다리를 살짝 굽히고 몸의 근육을 이완시켜며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게 준비했다.
사울른이 어떤 생각으로 피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대처가 단유에겐 편했다. 오로지 지금 ‘보이는’ 이들만 처리하면 된다는 것, 취해야 할 행동의 가짓수가 줄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마법으로 적들에게 상해를 입히나, 조악한 솜씨나마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나 똑같다. ‘생존’을 위해서 상대를 무력화시켜야 하니, 그 행동의 도덕성, 정당성, 당위성은 오로지 생존이란 이유로 결부한다. 죄책감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살아남은 뒤에 해도 충분할 것이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있나?’
솔직히 말해서, 에밀리아를 만나고, 사울른을 만나며 처음의 마음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해를 끼치려는 이들을 용서해 주거나 아량을 베풀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언덕 어딘가에 흩뿌려졌을 울펜이란 사내에게 했던 것처럼.
단유는 손에 쥔 칼을 고쳐잡았다.
상대의 칼이 휘둘러졌다. 피했다. 피한 곳으로 또 다른 칼이 겨눠지고 있다. 종으로 베어오는 칼을 칼로 막아낸다. 그 전의 싸움에서도 느꼈지만, 단순히 막는 것보다 약간 칼을 비틀어 흘려내는 것이 힘을 절약하기에 좋다. 기술이 좀 더 완숙해지면 더 여유롭게 흘러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만족한다.
흘러낸 후, 상대의 열린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반가워하지 않는 적의 턱을 향해 빈주먹을 찔러 넣었다. 권투를 배우진 않았지만, ‘펀치 드렁크’라는 단어는 안다. 그리고 카운터를 연습해보진 않았지만, 적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라는 건 안다. 알고 있는 지식을 조합하여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추리할 수 있고, 그 추리를 바탕으로 실천해본다.
마침 비어있는 턱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니, 단유를 향하고 있던 적의 어린 눈동자가 탁 풀리고 만다.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적을 어깨로 밀어내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으로 한 번 굴러 뒤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한다.
쓰러진 적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어 구르던 힘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눈으로 확인한 전경을 머릿속에서 조합하고 다음 행동을 기획한다.
옆에서 들어오는 칼은 피하기보단 칼로 튕겨낸다. 필요할 땐, 튕겨내고 그럴 여유가 없을 때는 몸을 기울여 피하고, 여의치 않으면 구른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칼과 주먹을 휘둘러 한 사람 한 사람씩 눕혀나간다. 어떤 사람은 허리를 양단하겠다는 각오로 칼을 휘둘러 베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걸어 넘어지게 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뒷머리가 바닥에 솟아나 있는 바위에 강하게 찧도록 내리누른다.
눈앞에서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칼이 흘러가는 순간도 있고, 생각처럼 몸이 반응하지 않아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입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매 초가 다르게 상대의 얼굴에 여유는 사라지고, 처음의 각오도 점점 굳어져만 가는 얼굴처럼 석화되었다. 그리고 표시 내지 않으려 해도 저도 모르게 드러나는 경악이 전염처럼 퍼져갈 때, 단유의 칼이 또 한 사내의 목을 가르며 시체 한 구를 만들어냈다.
흑의인들의 가슴에 새긴 각오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