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87화 (687/956)

선방(5)

-------------- 687/952 --------------

단유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복면인들과의 싸움에서 ‘보는 법’을 깨달았다. 물론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단유는 알 수 있었다. 가령 누군가가 불투명한 상자 속에 무언가를 숨겨 놓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상자를 열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상자가 단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면, 그 상자의 숨겨진 기능, 요컨대 바닥이 열리도록 설계가 되었다든지 하는 것 정도는 건드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물의 기능, 속성 등을 간파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의 경우, 마치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숨어 있다가 벽을 허물고 나타난 것 마냥 등장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저 멀리 돌아갔던 사울른이 횃불에 포위된 광경을 본 까닭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생각은 뒤로 미루고, 우선 움직일 때다.

다행인 것은 이제 그들도 더 이상 벽 뒤에 숨어 있지 않다는 것.

번쩍, 어둡던 하늘에 태양보다 밝은 빛이 터지듯이 쏟아졌다. 놀란 표정의 병사들이 다급히 손을 올려 눈을 가릴 때, 사울른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긴 했으나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생각과 동시에 숨을 들이키며 바닥에 바짝 엎드린 사울른의 머리 위로 시위를 놓친 활에서 떠난 화살들이 지나갔다.

‘다음에는 신호를 정하든지 해야지.’

적들을 당황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건 좋지만, 아군도 같이 무력해진다면 그게 무슨 작전일까? 물론, 단유는 군사도 아니고 이런 싸움을 거듭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미리 구호 정도는 맞춰놓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을 잠시 가졌다.

그때 사울른의 등 위를 가볍게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손을 휘두르려던 동작을 가까스로 멈춘 사울른은 가볍게 대답한 뒤 몸을 일으켰다.

“시간 없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단유는 대답 대신 바람을 일으켜 활을 겨누던 병사들을 날렸다. 바람에 휘말려 제멋대로 날아가는 화살들을 뒤로하고 사울른의 손목을 잡았다.

“달릴 순 있죠?”

“가시죠.”

두 사람은 빠르게 내달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마법입니다!”

“역시, 나타났군.”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빛이 사그라지는 언덕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준비하라.”

“네!”

뒤에 도열해 있던 흑의 차림의 사내 셋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마게이아의 진언(眞言)’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사내의 뒤에서 반다나 같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사내가 중얼거리자,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마게이아의 진언이 없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그저 아쉬워서 그랬습니다.”

“능력이 되지 않는 자에게 보물을 쥐어 줬으니, 누굴 탓하리.”

조직 내에서 나름 사내와 경쟁적 위치에 있던 울펜에 대한 사내의 짧은 평에 반다나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잠시 후, 노란 불꽃이 하늘을 거슬러 올라갔다.

“준비되었습니다, 일레아드.”

“가자.”

사내, 일레아드는 목에 걸치고 있던 천을 코끝까지 끌어올린 후 뒤에 서서 기다리던 부하들과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같은 시간,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던 3부대장이 굳은 얼굴로 북쪽 언덕에서 벌어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하늘에 갑자기 번개가 친 것도 아니고 돌연 태양보다 밝은 빛이 폭사되는 기현상에 평정심을 유지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 3부대장은 미리 언질을 들은 터라 그 광경을 확인하는 순간 마법사의 짓임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소위 천재지변에 가까운 존재로 인식되는 마법사이기에 3부대장은 쉽게 표정을 풀 수 없었고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정보들로 인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틀 전, 그는 진군 사령관으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명을 들었다.

“선발대를 끌고 먼저 이 앞에 있는 마을 점령토록 하라.”

자신이 알기에 그 마을은 그저 일개 촌락에 불과했다. 치안 경비대 따위도 없이 50여 가호 정도만이 모여 생활하는 곳,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굳이 선발대가 가서 살펴야 하는가.

그러나 사령관의 명령에 토를 달 수는 없는 일이라 대신 다른 걸 물었다.

“3부를 모두 끌고 가야 합니까?”

“2개 전단만 데리고 간다.”

“네?”

자기 휘하에 5개 전단이 있는데, 그중 2개 전단만 데리고 간다? 그 정도 병력 구성이라면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지 않을까?

“자세한 사항은 따로 서신을 통해 알려주겠다.”

사령관은 거기까지 말한 후 돌아섰다. 너무나 불친절한 설명이었으나, 3부대장은 경례를 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런 이유로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사실 꽤 마음이 심란했었다. 덕분에 전단장들이 미리 눈치를 보며 병력들을 운용하여 귀찮음을 덜했지만, 그래도 꽤 불편한 상태였다. 혹시 자신의 부대를 분산시켜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사령관의 음모는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사령관이 말했던 서신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신이 도착한 후, 사령관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꽤나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정밀 수색 후, 예상치 못한 쪽지까지 발견하게 되니 차라리 모를 때가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령관의 기이한 명령, 1개 전단은 마을을 점령하고, 또 다른 전단은 마을에서 반나절 거리에 숙영토록 하라는 지시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 두 전단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부대장인 자신이 함께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는 그냥 죽을 자리에 미리 던져진 사냥개나 다름없는 처지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버릴 패는 아니었던지, 사령관은 이후에 벌어질 작전을 모두 알려주었다. 다만 그 작전이 군의 단독 작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함께 작전을 수행할 상대의 정체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가?”

“저희만으로는 마인을 상대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봐야 하겠죠.”

3부대장은 1전단장의 대답을 들으니 입꼬리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침을 모아 뱉고는 명령을 내렸다.

“물러나라고 이르게.”

“네.”

노란 불꽃을 매달고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던 화살이 힘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던 3부대장이 몸을 돌렸다.

사냥개의 역할은 끝이 났다. 미끼를 문 적을 상대하는 것은 사냥꾼의 역할이었다.

사냥꾼들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챈 것은 언덕 하나를 넘어 다음 언덕을 돌아갈 때였다.

“잠깐.”

사울른이 단유를 붙잡았다.

“왜요?”

“이상합니다.”

단유는 사울른이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시야를 되찾은 후부터는 적들의 추적을 피하며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아 달리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공기가 다릅니다.”

“공기?”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비록 밤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아서 어둠이 그리 짙지도 않았고 그래서 어지간한 사물은 흐릿하게나마 분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불과 몇 분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달리 거슬리는 것이 없던 와중에 마술사의 깜짝 쇼마냥 튀어나온 적들을 보며 놀랐던 것을 떠올린 단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달빛만큼이나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언덕 위에 자란 풀들이 흐느적거리고, 이제 막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 크지 않은 수목 한 그루가 가지를 위로 뻗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릉에 가려 긴 그림자를 만들어낸 땅에도 짧은 풀과 툭 차면 힘없이 굴러갈 것만 같은 작은 돌멩이 정도만이 전부였고, 언덕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도 특별한 기척이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했다.

‘소리까지 숨긴다?’

가능할까? 차라리 이게 더 마법 같다, 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갈 때, 단유는 하늘을 향해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

“······!”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늘. 단유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사냥꾼이 사냥할 때 한 개의 무기만 들고 나서지 않는다. 취미로 하는 사냥이 아닌 이상, 사냥꾼은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선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대처할 수 있게끔 다양한 무기를 갖추고 나서기 마련이다.

더욱이 상대가 몬스터보다 더 무섭다는 ‘마법사’라면, 무기는 더욱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마게이아의 진언’이라고 불렀던 동판이 마법사를 막는 유일한 무기는 아닌 것이다.

“마게이아의 기둥이 설치되었습니다.”

“시작한다.”

일레아드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흑의를 입은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여전히 자신들을 눈치채지 못하는 단유와 사울른을 향해 칼을 겨눈 이들.

“셋, 둘, 하나. 해제.”

흑의인들이 달리는 순간, 그들을 막고 있던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울른과 단유는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게 와 있었건만,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나마 이상함을 느낀 사울른, 그리고 또다시 마법이 구현되지 않는 현상을 확인한 단유였으니까 일격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럿이었고 그들이 겨눈 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단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하는 칼들을 튕겨낸 사울른은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이번에는 지켜야 할 대상이 없고 언덕 위이긴 해도 넓은 공간이라 필할 여력이 있었다. 물론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때보다 훨씬 많았기에 위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단유, 마법사를 보며 일레아드는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마법사란 말인가?”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마법을 시전하는 것까지 확인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몸놀림을 보면, 마법사가 아니라 무술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동시에 찔러 들어오는 칼들을 너무도 수월하게 피해내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저런 자를 본 적 있던가, 요헨?”

“없습니다, 일레아드.”

“나도 저런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있었다면 분명 기록에 남았을 것인데···.”

일레아드는 손에 쥔 짧은 곡도 한 쌍을 고쳐쥐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자를 잡고 반드시 마게이아의 기록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일레아드의 날선 눈매에 빛이 서렸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유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진땀 흘리며 공격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피하지 못할 공격은 없었다. 보이지 않을 때가 문제였지, 보이는 것을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보는 법은 마법이 아니니까. 게다가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단유 아니던가?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필요한 동작을 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대로 피하다 보니 점점 머릿속도 정리가 되어갔다.

‘단순한 퍼즐게임이야.’

위로 날아오는 공격은 아래로 피하고, 아래로 향하는 공격은 위로, 혹은 옆으로 피한다. 난이도가 올라가서 8방위 중 3방향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공격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피하거나 혹은 타이밍에 맞춰 순차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움직여 공격을 빗겨내는 것도 가능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적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연거푸 공격이 빗나가자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의 세밀했던 공격의 동작이 조금씩 커지면서 빈틈이 생기고, 그 빈틈은 단유가 충분히 활용할 만했다.

‘저기다!’

작심하고 찔러 넣은 공격이 무산되는 통에 잠시 멈칫한 적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으로 상대의 손목을 쥐어짜듯이 틀어쥔 뒤, 비틀어 끌어올리니 근육의 힘이 손끝까지 닿지 않아 칼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들거리며 풀리고 말았다. 그것은 매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을 노려 상대의 곡도를 뺏으려던 단유는, 그러나 묘한 궤도로 휘어져 들어오는 칼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손을 뒤로 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몸을 틀어 두 걸음 이상 물러나야 할 정도로 쌍곡도를 휘두르며 매섭게 짓쳐들어오는 공격이었다. 그마저도 수월하게 피해낸 단유를 확인하고는 쌍곡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놀랍군. 이런 마법사는 본 적이 없는데.”

칼날보다 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쌍곡도가 멈추자, 주위의 흑의인들도 공격을 멈췄고 덕분에 단유는 숨을 고를 틈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번엔 우리가 대접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대신 사과하지. 이번에는 아주 정성껏 대접해 주겠다, 마인.”

거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아 단유는 숨을 고르는 데만 집중했다.

“쉬었으면 다시 시작해볼까?”

얼굴을 가린 천 위로 파충류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사내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