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86화 (686/956)

선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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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는 문제가 없는가?”

“뜻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뜻은 언제나 한결같건만···.”

“죄송합니다.”

“울펜 그 아이는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주의할 것입니다.”

“너의 신중함을 눈여겨볼 것이다.”

“어르신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심장이 조이는 긴장감을 담은 숨을 몰래 토한 사내는 어르신의 목소리가 이어지지 않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한참 후, 감히 사람이 오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절벽을 뒤로하고 나온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는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앞에 섰다.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실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한쪽 눈썹이 일그러진 남자가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가 떼었다.

“자비 없는 어둠이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

마을로 돌아온 단유와 사울른은 바이언과 몇몇 마을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사실 회의랄 것도 없었다.

“입구를 막고 적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들킨 겁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저들은 예상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중입니다. 처음 우리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하니, 미리 지하 입구를 막아서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사울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달리 반박하거나 다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 너희는 어쩔 것인가?”

바이언의 물음에 단유가 대답했다.

“저희는 밖에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며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그 처녀는 이곳에 두고?”

“네.”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또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막아볼 생각이기도 하고요.”

마법사의 놀라운 지식과 혜안에는 감탄했었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바이언과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이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운 그를 존중하기로 했다.

에밀리아는 무사히 돌아온 단유와 사울른을 반겼지만, 그들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다시금 불안한 얼굴을 했다.

“전 오히려 다행이네요.”

“왜요?”

“에밀리아가 보기 힘들어할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요.”

단유의 말에서 어떤 각오를 읽은 에밀리아의 얼굴에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가 지나갔다.

“그래도 부디 다치지 말아요.”

“그럴게요.”

“다른 사람이···그렇게 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루치드가 다치는 건 더 싫으니까요.”

“알았어요.”

“그리고···돌아오면 저 공부 더 가르쳐 주세요.”

단유는 미소를 지어보인 뒤 돌아섰다.

단유와 사울른은 다시 마을을 나가기 전, 바이언을 따로 불렀다. 바이언은 그들을 배웅한다는 핑계로 함께 통로까지 따라나섰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사울른이 그에게 조용히 일렀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 호기심을 드러냈던 바이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리고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울른과 단유를 번갈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되는가?”

“임시방편이지만, 네. 하지만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아.”

바이언의 깊은 한숨이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길게 토해졌다. 고개를 뒤로 돌려 환한 빛을 받아 빛나는 지하도시의 마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 탓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

“이해합니다.”

“이것도 운명이란 걸까?”

“아니요. 생존은 운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바이언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는 뜻인가?”

“죽을 고비를 여럿 넘기긴 했었죠.”

“자네 같은···마법사는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보단 낫지 않겠나? 우리는 감히 맞서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겁먹은 토끼마냥 굴에 처박혀 있는 게 다인데.”

“겁먹는 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냐가 토끼와 인간의 차이일 겁니다.”

“···모르겠군.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 같으니. ···알겠네. 내 주의하도록 하지.”

“네.”

“자네들도 부디 몸조심하게.”

바이언이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고, 단유는 그의 두껍고 거친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

언덕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비치기 시작할 무렵, 어둠 속에서 은밀한 움직임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울른은 용케도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만을 찾아 소리 없이 이동했다. 그의 몸놀림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단유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의 소리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라 속으로만 감탄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울른도 단유 못지않게 그에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지난 번 복면인들과의 싸움에서 단유가 보여줬던 놀라운 체술을 기억하던 사울른은, 그래도 암행(暗行)에서의 움직임은 싸움과 달라서 단유에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과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움직임으로 뒤를 따르고 있으니 도대체 언제 그런 움직임을 배운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만약 물었더라도 단유는 딱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사울른이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뿐이니까.

어느 순간, 사울른이 상체를 땅에 붙이다시피 엎드리며 숨을 죽였다. 동시에 단유도 사울른과 비슷한 자세로 그림자 속에 숨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사울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이전의 단유였다면 전혀 몰랐을 상황을 지금은 볼 수 있었다.

약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10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겨우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가시나무가 서 있었다. 가지를 활짝 펼치고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품어 으스스한 소리를 자아내는 가시나무였다. 그 주위로는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작은 수목들이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수채화의 한 풍경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사울른은 그 나무의 뒤쪽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단유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이가 선발대로 왔던 에토신스 군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사울른이 고개만 살짝 기울여 단유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붙다시피있던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단유는 그의 손가락을 보고 사울른이 뒤로 물러섰다가 빙 둘러서 적의 후미를 잡아보겠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단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단유가 아니었다면 그저 놀라서 감탄성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자 위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사울른이 그림자에 녹아드는 것처럼 어두워지더니 어느새 사람은 사라지고 그림자만 남았다.

사울른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그들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바닥을 훑어 손에 잡히는 돌멩이 중 하나를 집어든 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바위를 향해 던졌다.

―딱.

들릴 듯 말듯한 소리였지만,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의 주의가 바위에 옮겨진 그 사이를 절묘하게 포착한 사울른은 한달음에 그들의 등 뒤로 뛰어들었다. 한 사람의 입을 틀어막으며 제압하고 남은 손으로 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 자신을 돌아보는 적의 입으로 쑤셔 넣었다. 피거품이 끓는 소리를 내다 쓰러진 적을 뒤로하고 입을 막았던 병사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신음을 흘리기도 전에 사울른이 신고 있던 가죽 장화의 앞코가 입에 틀어박혔다.

체술만큼은 사울른이 최고, 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단유는 다른 방위를 둘러보며 또 다른 적이 없는지를 살폈고, 한 병사를 사로잡았던 사울른은 그의 목에 날선 단검의 칼날을 들이대며 물었다.

“소리 지르지 마라.”

“이···.”

목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사로잡힌 병사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부릅뜬 병사를 바라보는 사울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일말의 동정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두 번은 없다.”

“······.”

“소속.”

“···으윽.”

“소속.”

“···제3부(部) 3보병 2전단(戰團) 트리아리.”

잠시 생각을 정리한 사울른이 뒤이어 질문했다.

“마을에 들어온 이들은 모두 2전단 소속인가?”

“그렇다.”

“지금 찾고 있는 것은?”

“······.”

“설마 마을 사람들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건 아닐 것 아니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뭐?”

“모른다고.”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움직인다고?”

“아니, 우린 그냥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통상적인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었을 뿐이다.”

“통상적인? 너희는 통상적으로 모든 병력을 수색에 포함 시키나?”

“모든 병력?”

오히려 병사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질문을 되돌렸다. 사울른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이런 걸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

“내가 알기로 전단은 대략 50명 수준이고, 마을에 온 너희 대부분이 현재 주변 언덕을 수색하고 있다. 틀린가?”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른은 그의 눈에 스쳐간 이질적인 빛을 포착했다.

“대답하라.”

“······.”

“대답해. 죽기 싫으면.”

병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울른은 다시 그를 재촉하려 하다가 문득 자신이 뭔갈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관찰한 바와 물었던 내용들을 교차 검증하며 자신이 무엇을 착각한 것인지 알아내려 머리를 굴리다가 아차,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마을에 들어온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냐?”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울른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울른이 착각한 것은 바로 군편제에 관한 것이었다. 공국은 물론이고 전쟁을 벌이는 교국도 명칭은 다르지만 편제 방식은 비슷하다. 우선 10명을 묶어 한 조(組)로 삼고, 다섯 조를 한 전단(戰團)으로 운영한다. 다섯 전단을 1부대로 삼고, 10부대를 1군단(軍團)으로 정한다. 병사는 그 중 2전단이라고 했고, 자신의 직위가 트리아리, 즉 10년 이상 근속한 경험 많은 이라고 밝혔다.

사울른이 관찰한바, 마을에 들어온 이는 대략 50명이고 그렇다면 한 전단이 선발대로 왔다고 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2전단이라 불리는 이들이 온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뒤이어 질문을 이어나갔던 것인데, 여기서 착각을 한 것이다.

때로는 비슷한 명칭이지만 편제를 다르게 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교국의 경우 전단(傳單)이란 명칭을 쓰지만 다섯 조, 50명이 아니라 7조, 70명을 전단으로 부른다. 종교적인 이유때문이라는데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가 어딨냐며 동료들과 웃었던 기억이 났다.

“너희는 전단이 모두 몇이냐?”

“······.”

병사도 사울른이 무엇을 착각한 것인지 눈치챘다. 그 역시도 경험 많은 병사였고, 때문에 사울른이 추리한 내용을 똑같이 되짚어 사울른이 한 착각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착각을 한 것이라면, 병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희망보다 배신감이 더 들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다시 병사를 다그치려는 찰나, 사울른은 등 뒤에서 쏘아지는 살기를 느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감상을 피력할 여유도 없었다. 사울른은 얼른 몸을 내던졌다. 병사를 어떻게 처리할 시간도 없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한 병사 역시 다급하게 몸을 굴렸다. 그리고 그 자리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으윽.”

눈먼 화살 하나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다 마침 몸을 구르던 사울른의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겨우 나아가고 있었는데 다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에 사울른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주위로 수십 개의 횃불들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은밀함은 사울른 못지않았다.

“꼼짝 마라!”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진짜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다. 사울른은 빠르게 물러날 위치를 살폈으나, 둘러싼 적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들이 겨누고 있는 활 때문에 적당한 활로를 찾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적들이 자신의 이목을 가리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사울른은 단유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졌다. 그가 있으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리는 없다고 믿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적들이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이목을 숨길 수 있었다면, 단유도 적잖게 당황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단유는 당황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보이지 않았어.’

그림자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단유는 혼란스러운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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