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85화 (685/956)

선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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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언덕 위에 길게 자란 풀숲 사이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풀들이 드러누우며 흐린 울음을 터뜨릴 때,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던 단유는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쉽게 들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대처할 순 없는 일이었다. 바로 곁에 있던 사울른은 그보다 더 신중하게 기도비닉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루치드.”

“네.”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 말입니다.”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침까지만 해도 혼자 면도하는 법을 고민하던 여유로움은 정오를 지나 서쪽으로 해가 기울 무렵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공방에서 탄소 결정체를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을 하고 있던 차에 사울른이 문을 두드리고 나타나 말했다.

“왔습니다.”

에토신스 군도 정찰대를 운용하는 이상, 훈련을 받지 않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지하에 틀어박혀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사울른은 혼자서 은밀히 정찰 활동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그의 실력이 뛰어났던 것인지 적들에게 들키지 않고 주변 정찰을 이어나갔는데, 오늘 마침내 적들의 부대가 마을에 입성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진이 아니라고요?”

사울른은 자기 나름대로 파악한 바를 설명했다. 아무리 에토신스의 군 편제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군을 구성하는 기준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봤을 때, 지금 확인한 부대는 본진의 일부라는 사울른의 설명이었다.

“정찰대인가요?”

“정찰대를 저런 부대 단위로 운용하지는 않습니다. 많아 봐야 다섯에서 여섯 정도의 조를 짜서 움직이게 하죠. 하지만 지금 마을에 도착한 부대는 적어도 8조 이상, 약 50명 정도에 이릅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제 생각에는 선발대로 보낸 것 같습니다.”

“이상하네요. 여기가 군사적 요충지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넓은 평야 대신 언덕이 많은 곳이다 보니 부대를 넓게 펼치지는 못한다. 그런데 작은 언덕이라도 숨으려고 마음 먹는다면 숨지 못할 일도 없으니 혹시 정찰대가 확인하지 못한 매복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적들도 당연히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단유의 지하도시 계획이 먹힐 가능성도 큰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미리 점령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제가 군을 지휘해 본적이 없으니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경우에 선발대를 보낼 이유는 극히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국경 수비대가 허무하게 무너진 공국군이다. 교국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전선까지 신경 쓸 틈이 없음을 에토신스가 모를 리 없다.

“매복해서 적의 허리를 자르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여기가 나름 좋은 지형입니다만, 만약 적들이 이쪽으로 둘러 간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사울른은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어 설명했다.

현재 단유가 머물고 있는 곳은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언덕들이 작은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었다. 남쪽에는 작은 숲이 있었고, 북쪽에는 나름 넓지만 얕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짓쳐들어오던 에토신스의 목적지는 지금 이 마을의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사울른의 말은 굳이 이 마을을 거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숲으로 가는 것은 대 부대를 운용하는데 적당하지 않으니, 북쪽의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제일 좋다. 게다가 강이 얕아서 갑작스런 수공(水攻)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강의 지류가 근처에 흘러 들어와 강까지 갈 필요도 없고, 남쪽의 숲과 가까우면서 여러 채의 가옥들을 세우기 적당한 곳이 분지라 마을이 생겼을 뿐인 곳이다. 굳이 여기로 들어와 머물고 갈 필요는 없는 곳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에토신스가 마을이 있든 없든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에토신스 군(軍)은 정찰대를 운용하기도 했으니 마을이 텅 빈 것도 확인했을 것이고, 약탈을 할 조금의 건덕지도 남지 않은 마을에 머물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사울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단유는 사울른의 침묵 속에서 답을 읽었다.

“역시 저 때문인가요?”

“도저히 그들이 루치드의 존재를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저들의 부대 운용 방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울른의 말에 따르자면, 저들이 선발대를 먼저 보내 자리를 선점하는 것은 유리한 위치를 먼저 잡고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싸움을 벌일 상대도 없는데,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 그렇다면 아예 가정을 거꾸로 해야 했다.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싸움을 벌일 상대, 혹은 필히 경계를 해야 하는 상대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전제를 두고 생각을 이어가면, 결국 마법사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단유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알 수도 있죠.”

“역시···그들이겠죠?”

단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을 벌였던 복면인들의 조직은, 그 이후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복수라도 하러 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조금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확신할 순 없다. 마법의 구현을 막는 동판도 소유했던 조직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물(奇物)을 소유할 가능성도 있고, 그것을 이용해 들키지 않게 왔다가 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마법사’가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에토신스에게 넘겨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전략도 있지 않던가.

바이언에게 마을 사람들을 단속하게 일러두고, 단유와 사울른만 마을을 나와 에토신스 선발대를 살피기로 했다. 에밀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고, 단유는 아무 일없이 돌아올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인사말을 남겼다.

지하도시를 나와 지상의 마을에서 가깝지 않은, 하지만 마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올라온 두 사람이었다.

****

“지난 번에 부탁드렸던 것 말입니다.”

“네.”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단유가 사울른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때는···그러니까 제가 너무 경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은 애국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단유는 그것도 나름의 애국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직 왕을 위해서, 충성심을 드러내는 것만이 애국심은 아닐 것이다. 같은 땅에서 같은 문화, 같은 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도 애국심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이해해도 지난번 사울른의 부탁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의 뜻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단유였으니까.

단유는 잠시 지난 대화를 떠올렸다.

“이 마을, 남겨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요?”

“지금 루치드가 사용하려는 마법, 그거 혹시 저 집들을 폭탄처럼 터뜨리려는 것 아닙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하네요.”

“집이 클수록 더 큰 폭발이 생기는 것이죠? 그렇다면, 저 마을을 남겨두었다가 적들이 이 마을을 지나갈 때 사용할 수 없을까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사울른은 단유의 마법으로 에토신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 것이다. 어지간한 폭탄보다 더 큰 폭발력을 이용해 적들을 해치울 수 있는 방법. 요컨대 비어 있는 저 집들을 ‘지뢰’처럼 사용하자는 말이리라.

설명하지 않았던 자신의 마법에 대해 정확하진 않아도 그 효과를 예상하고 그 활용법까지 생각해낸 사울른의 통찰력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긴 했지만, 썩 기분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였지만, ‘마법사’라는 신분에 대해 사울른이 가진 편견의 일부분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마법사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본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법사라면 수십, 수백, 혹은 수천의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만은 않았으니, 그가 가졌던 선입견을 수정할 정도의 관계를 만들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울른도 그 이후 나름 생각을 많이 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가 했던 제안을 철회했다.

“어차피 상관없는 문제였네요. 제가 저 마을들을 없앴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이곳에 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루치드에게 과한 요구를 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전 사울른을 이해해요.”

“···고맙습니다.”

단유는 다시 마을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정말 필요한 상황이라면 사울른이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마법을 썼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도움이 되겠죠.”

적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셈이니까.

선발대는 각자 흩어져서 마을 내의 모든 집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이만 가죠. 조만간 여기까지 올지도 모르니 그전에 흔적을 지우고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단유는 사울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

한편, 마을 광장 부근에 있던 집들 중 하나를 임시본부로 지정하고 묵고 있던 제3부대장은 마을 수색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마인의 흔적은 없다는 것인가?”

“네. 몇몇 집들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만 대부분 집들은 꽤 오래 전에 집을 비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말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올 줄 알고 대피를 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재도구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사라진 것으로 보아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흔치 않은 일이군.”

“그렇습니다.”

“공국군이 강제로 소개(疏開)시켰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어느 군대가 긴급 소개를 시키는 과정에서 집에서 사용하던 각종 가재도구들과 가구를 챙겨 나가는 것을 기다려줄까?

“병사들은?”

“일부는 마을 외곽에 야영지를 구축 중이고, 일부는 바깥으로 나가 수색 중입니다.”

“곧 해가 질 것 같으니 서두르도록 하고, 본격적으로 수색하는 건 내일부터 하기로 하지.”

부대장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참모들이 밖으로 나간 뒤, 부대장은 연락병을 통해 본진에게 전달할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쓰려던 찰나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펜을 들던 움직임을 멈추고 대답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참모의 한 사람이 꾀죄죄한 얼굴의 병사를 데리고 들어와 굳은 얼굴로 경례를 올렸다.

“무슨 일이지?”

참모는 병사에게 눈짓을 했고, 조금 쭈뼛거리던 병사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부대장에게 건넸다.

“뭔가?”

“어떤 집을 수색하다 발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

부대장이 호기심을 가지고 병사가 건넨 것을 보았다. 종이를 작게 접은 쪽지처럼 보였는데, 쪽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이것을 어디서 발견했다고?”

“여관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부대장은 다시 쪽지로 시선을 돌렸다.

「마인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부대장이 참모를 바라보며 내용을 보았는지 물었고, 참모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병사에게 고개를 돌리니 병사는 더욱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부대장의 뒤쪽 벽에 두며 시선을 피했다.

“자네는 누구에게도 이 쪽지에 대해서 말하면 안 되네.”

“옛! 알겠습니다!”

“···나가보게.”

병사는 절도있는 태도로 경례를 올린 후 집을 나갔다. 이후 부대장이 참모에게 물었다.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글이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마인에 대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쓴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우리 군의 눈을 피해 쪽지를 둔 것이고?”

“그렇습니다.”

“여관은? 다른 수상한 점은 없던가?”

“조사 중입니다.”

“조사가 끝나면 바로 알려주게.”

“네!”

부대장은 한참 쪽지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접어 허리 주머니에 넣은 뒤, 처음에 쓰려던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관례대로 쓰려던 처음의 생각을 접고 보다 신중한 자세로 써내려갔다. 그러나 머릿속이 복잡해 제대로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이지?’

자칫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채로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어 부대장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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