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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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마을에 유입된 피난민들은 다행히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절대 문제를 일으킬 수 없죠. 세상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을 테니까요.”
볼을 긁으며 대답하는 사울른은, 그러다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가려워서.”
“참으세요. 덧나면 큰일이니까.”
겨우내 감고 있던 붕대를 푼 사울른의 얼굴에는 지난 싸움의 결과로 긴 흉터가 생겨나 있었다. 그를 처음 봤던 피난민들은 사울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었다. 그런데 워낙에 깊었던 상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인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울른은 그 상처가 가렵다며 긁기 시작했는데, 덜 아문 상처에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유는 그에게 간단한 처치를 알려주었다.
“손대지 마세요.”
약도 없는 마당에 세균 천지인 손으로 건드리면 덧날 게 뻔하니까. 사울른도 군에 있을 때 그런 상처들을 많이 봤었던지 단유의 조치에 수긍했다. 하지만 의지를 뛰어넘는 가려움증에 절로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마을이 빨리 자리를 잡는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이 마을에 아이들이 저렇게 많은 줄은 몰랐네요.”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함이 보기 좋았다. 피난민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도 원래 마을에 있던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아직 서로를 서먹해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직은 다들 자기 살림 챙기기 바쁘니 그럴 겁니다.”
비록 먹고 잘 수 있는 집은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나는 건 아니었다. 집 안에 들일 가구들은 마을의 유일한 공방에서 모두 해결하기 힘드니 조악하나마 각자가 만들어 써야 했다. 가축을 기를 헛간이나 장작을 쌓아둘 창고를 만드는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런 일련의 작업을 위해 나무를 하거나 돌을 다듬는 일은 한 두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을은 어두워지기 전까지 늘 시끄러웠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소음이니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단유는 종종 그들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단유가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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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네가 머무는 집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좀 더 크고 넓은 집에서 살기를 바랐으나, 단유는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사실 에밀리아나 사울른을 위해서라면 가운데가 좀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도 이 제안에 부담을 느꼈기에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근처 작은 집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
단유는 이 집 뒤에 작은 창고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우스개소리로 마법사의 연구실, 이라고 불렀지만 실은 공방에 가까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단유는 가장 먼저 공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소소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탁상시계였다. 이전에도 만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꽤나 허술한 구조였다. 이후 지구로 돌아왔을 때 학교 도서관과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좀 더 체계적으로 구조를 공부하여 보완하였다. 이후로는 직접 만들어 볼 기회가 없었고 굳이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 제대로 만들어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탁상 시계를 처음 접했을 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곧 시계의 효용성에 감탄했다. 특히나 해를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시계의 가치는 상승했다.
두 번째는 자전거였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는 게 어색해서 넘어지기 일쑤이더니 이제는 곧잘 타고 다닐 수 있게 되면서 지하와 지상을 오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자전거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만들기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작업에 참여해서 그들을 돕기도 했고, 마을 유일의 목공 기술자가 된 몰레딘과 이제 막 수학에 첫걸음을 내디딘 에밀리아를 가르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대부분이 지나갔지만, 단유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는데 할애했다.
이를테면.
“뭔데요, 이건?”
에밀리아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테이블 위에 만들어진 작은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음, 긴급구동장치라고 해야 하나?”
“···네?”
말로 설명하기 보단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단유는 조형물의 옆에 달린 레버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와! 신기해요!”
“별 거 아니에요.”
“이것도 시계 같은 건가요?”
“아뇨. 이건 제대로 구동이 되는지 실험해 보려고 만든 축소품일 뿐이에요.”
“축소품이요? 그럼 원래는 얼마나 큰 건데요?”
단유는 지하공동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를 완전히 막을 만큼?”
단유가 만든 것은 입구 위에 설치할 일종의 차단문이었다. 방화 차단문에서 힌트를 얻은 이것은 간단한 레버 조작만으로 차단문의 개폐가 가능하도록 고안한 장치였다.
“만약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긴급하게 통로를 폐쇄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이 차단기를 이용하는 거죠.”
“···에토신스 군이 처들어오는 걸 막기 위한 것인가요?”
“포함해서요. 위협이 되는 건 에토신스 뿐만은 아니잖아요?”
처음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 사라진 에밀리아를 보며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이건 정말 만일에 대비한 거니까. 여기 입구는 쉽게 찾기 힘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요. 전쟁이란 거, 도대체 왜 그렇게 싸워야 하는지. 그냥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러면 좋겠죠.”
하지만 그건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은 의외로 쉽게 최후의 수단을 이용한다. 최후의 수단이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니까. 특히나 아랫 사람들의 희생에 무감각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와 욕심을 위해 쉽게 칼을 휘두른다. 지구에서도 그랬던 것을, 여기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냥 무사히 지나가기만 바라는 건 너무 안일한 대처겠죠.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최대한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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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정찰을 나갔던 사울른이 돌아왔다. 사울른은 굳은 얼굴을 하고 단유를 찾아왔고, 단유는 바이언을 찾아갔다.
“···벌써 거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두려움이 깃든 얼굴로 묻는 바이언에게 사울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사흘이면 이곳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언이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일단 오늘부터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고, 작업도 당분간 멈추도록 하죠. 지상과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소리가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바이언을 비롯해 함께 동석했던 마을 남자 몇몇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걱정들 마세요. 준비는 많이 했잖아요?”
“그렇지만 혹시···.”
“어허, 가족들이 불안하지 않게 달래야 할 자네가 그러면 되겠는가?”
바이언이 친구를 꾸짖고는 단유와 사울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은 없는가?”
“여러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 활동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걸요.”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야지.”
테이블 위에 켜놓은 램프의 불빛에 사람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오직 단유만이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준비한 것들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만약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단유는 조금 더 진한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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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기 시작한 평야 위를 짓밟으며 내달리는 말들로 인해 땅이 울부짖었지만, 침략자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봄의 도래를 즐기는 감수성 따위는 사치였고, 그저 빠르게 내달려 점령지를 확보하려는 목적만이 전부였다.
말들이 지나간 뒤에는 수천 켤레의 가죽 장화들이 뒤따르며 갓 피어난 새싹들을 짓밟았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묵묵히 진군하던 군사들의 앞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지휘관이 손을 치켜 들었다. 곧 군사들이 속도를 늦추다가 이내 멈춰섰다.
멈춰선 지휘관의 곁으로 머리가 벗겨진 철갑 무장의 사내가 다가왔다.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보고하게.”
“저기 저 숲의 경계선을 따라 계속 언덕들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복은 없는 것으로 보인답니다.”
“거 참. 이렇게 긴장감 없는 전쟁도 있다던가?”
짧게 혀를 차는 사령관의 말에 대머리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별수 있습니까? 이미 대부분은 동쪽 전선에서 피 말리는 수성전을 펼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러다가 우리가 가장 먼저 리아빈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쉽군.”
“어쩔 수 있습니까? 국왕폐하께서 너무 신중하셨던 때문이지요.”
만약 조금만 더 과감히 결단을 내려 전쟁을 결정했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무인지경이라 해도 에토신스가 차지할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령관은 주위의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또 한 번 혀를 찼다.
“이렇게 넓은 땅을 두고도 공국 놈들은 그저 버려두기만 하다니. 정말 배가 불렀던 모양이군.”
공국에 비해 땅이 넓지 않은 에토신스는 이런 넓은 땅을 버려둘 여유가 없었다.
“나태하기로 소문난 놈들 아닙니까. 어미 뱃속에서부터 나태함을 타고나서 태어날 때도 우는 게 귀찮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놈들입니다.”
사령관과 대머리는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대머리가 물었다.
“여기서 야영하시겠습니까? 언덕을 넘어가면 적당한 야영지를 찾기 어려울 것 같으니 말입니다.”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이쯤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사령관은 그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러는 편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부사령관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서서 사령관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떠난 후 사령관은 자신이 묵을 텐트가 지어지길 기다리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철갑 무장의 사내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사령관이 탄 말 앞에서 허릴 숙이던 사내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건넸다.
“본국의 지령이라고 합니다.”
“음?”
이미 지난 겨울에 모든 작전이 세워졌고, 그 작전에 따라 그저 내달리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갑자기 지령이 올 이유가 있을까? 그런 의문을 얼굴로 드러내며 두루마리를 받아든 사령관은 인장을 제거하고 펼쳐 들었다. 약간의 호기심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던 사령관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자, 철갑 무장이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사령관은 끝까지 내용을 읽은 뒤, 미간을 좁히며 멀리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령관의 침묵에 덩달아 심각해진 철갑 무장이 그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는데, 한참 후 사령관이 입을 열었을 때는 철갑 무장 역시 사령관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마인이 등장했다.”
“네? 마인이라니···갑자기 무슨···.”
“저기 저 언덕 너머에 있다고 하는군.”
사령관의 손에 구겨진 두루마리가 철갑 무장에게로 건네졌다. 내용을 함께 확인한 무장이 물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무장이 사령관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부대로 시선을 돌렸다.
“3군을 먼저 보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런 데서 시간을 허비하게 될 줄이야.”
사령관은 혀를 차며 무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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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단유는 턱 아래에 꺼끌꺼끌하게 난 턱수염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거울을 어떻게 만들지?’
거울이 있으면 혼자서 면도를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어려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사울른은 그런 단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조금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그냥 혼자서 해도 충분한데 뭘 굳이 부탁하냐는 게 사울른이 내심 생각하던 바였고, 그러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속내였다. 그저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는 단유의 결벽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단유를 돕고 싶다며 에밀리아가 면도칼을 쥐었을 땐, 단유는 자신의 성격을 반드시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이면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부탁을 하고 마는 단유였다.
거울이 있으면 편한 게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단유의 고민을 더했다. 이를테면, 지하에서 나가지 않고 바깥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던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고 했다. 단유는 에밀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울른의 시선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거울을 만들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