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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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여전히 쌀쌀한 바람에 옷깃을 동여매게 되는 날씨이나 이른 꽃잎들이 피기 시작하며 봄이 왔음을 알리니, 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뜻밖에도 에토신스였다.
지난 겨울 동안 공국과의 국경선에서 긴장감이 흐른다 싶었더니, 결국 이를 위함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주저없이 진격을 결정했다. 이미 기세가 많이 기운 국가지만, 그래도 국경을 지킨다는 사명감에 최선을 다하던 국경 수비대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쓰러졌다.
바닥에 몇 개의 원을 그리고 줄을 그어 그들의 예상 진격로를 그려보이던 사울른이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교국과 어떤 협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그들과 충돌을 일으키려 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최종 목표지를 예상해보자면, 여기에 있는 즈미성과 느하즈성, 이 두 개까지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뒤쪽의 평야는 교국이 이미 차지한 노드로 평야보단 못해도 비옥하다고 소문났으니 에토신스가 욕심을 낼 만하지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사울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믿는 탓이었다.
“이를 토대로 그들의 진격로를 예상하면 대략 4개의 진로가 선택 가능합니다. 그리고 단 한 곳을 제외하곤 모두 이 곳을 지나가죠.”
만약 에토신스의 군이 그 모든 진격로를 선택한다고 해도 일단 단유가 머물고 있는 이 마을을 지난 뒤 군대를 나눌 확률이 높다는 사울른의 설명이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처음 이 지하 도시를 만들기로 했을 때부터 정해진 거 아닌가요? 되도록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죠.”
“전략적 요충지로 삼기에는 이 마을은 너무 노출된 면이 크죠. 방어가 어려운 지형이기도 하고 군이 머물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아마도 그냥 지나갈 확률이 높습니다만, 그래도 텅 비어버린 마을을 보면 보급 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하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마을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지하에서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사울른은 단유가 어떤 일을 벌일 것인지 대충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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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와 사울른, 그리고 바이언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이 지상의 마을로 찾아왔다.
“어쩐지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군.”
바이언이 집만 덩그러니 남아 썰렁하기 그지 없는 마을을 바라보며 속을 털어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주변이 평화를 찾게 되면, 그때 이보다 더 멋진 마을을 만들면 됩니다.”
“하아. 멋진 마을이라 하니 하는 말이네만, 솔직히 지금 저기 지하에 지어놓은 집들과 여길 비교하면, 아무도 이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을거야.”
가히 혁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집들이 지하에 지어져 있었다. 단유의 감수(監守)하에 건설한 주택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집들이었다. 바닥에서 은은히 올라오는 열 때문에 사람들은 따뜻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주방에서는 단순한 조작 한 번으로 물을 얻을 수 있으니 더이상 우물이란 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멍청한 세즈는 훌륭한 스승을 만날 기회를 차버렸어.”
마을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던 세즈는 단유가 찾아오기 바로 전에 마을을 떠났다. 손재주가 뛰어난 이로 마을 사람들의 인정을 받던 그였지만, 역시 전쟁으로 인한 불안감에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대신 몰레딘이 있잖은가.”
예전 세즈의 막내 조수 역할을 했던 몰레딘은 세즈를 따르는 대신 마을에 남는 선택을 했는데, 덕분에 그는 요즘 단유를 따라다니며 그가 알려주는 놀라운 학문에 눈을 뜬 상태다.
단유는 등 뒤에서 이뤄지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주위를 훑다가 사울른에게 말했다.
“역시 마을에 사람들이 몇 명 있군요.”
“네. 피난민들 중 일부가 빈집을 차지하고 있죠.”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람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을 내쫓는 역할을 맡겼는데, 그들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여기가 당신 집이라고?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요?”
“억지 부리지 마시오. 우리가 사정이 있어 잠시 떠난 것이지만 엄연히 내가 살던 집이었단 말이오.”
“억지는 당신이 하는 거지. 눈이 있으면 보라고. 여기 있는 것들 중에 당신 게 하나라도 있소? 그리고 설령 당신 집이었다는 말이 맞다고 해도, 가진 거 다 챙겨서 떠난 마당 아니오?”
“그래, 좋소. 당신 말이 다 맞다고 해도, 어쨌든 이 집에서 나가야 하오. 조만간 이곳으로 에토신스 군이 처들어올 거란 말이오.”
그 말에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졌던 사내가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오?”
“그걸 왜 모르겠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당신도 이해한 듯 한데, 그만 억지 부리고 떠나시오. 여기 있다간 진짜 목숨이 위험할 테니.”
“···혹시 거짓으로 내쫓을 생각에 하는 말은 아니오?”
“보시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성격이 급한 편이라 이렇게 말로 하는 편은 아니오. 만약 다른 때였다면 이렇게 입을 털 시간에 주먹을 썼을 것이오만, 지금은 그래도 당신의 형편을 이해하니 이렇게 말로 설득하는 것이오. 당신,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온 것도 당신,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위험해지는 것을 피하려 한 것 아니오? 그 마음을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오. 그러니 지금은 이렇게 실갱이를 벌일 때가 아니란 내 말을 믿어주시오. 한시라도 빨리 이 마을을 떠나서 가족들을 지킬 방도를 구하시오.”
“그럼 당신이 말해보쇼. 여길 떠나서 어딜 가면 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을지? 어딜 가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말해보시오.”
몇몇은 다시 맞이한 위협에 두려워 순순히 집을 떠난 이도 있지만, 눈앞의 사내처럼 반발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들의 동조자와 힘을 합쳐 자신들을 내쫓기 위해 달려온 이들과 맞서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들 진정해요.”
사울른이 나섰다. 이건 또 누구냐는 얼굴로 사울른을 바라보는 피난민에게 사울른이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사울른의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었고, 피난민들은 자신들이 핍박받는 것이라 여겼다.
“도대체 여기서도 나가라, 저기서도 나가라···. 그러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오? 어딜 가든 죽을 게 뻔한 운명이란 말이오?”
사울른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머뭇거리다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사울른,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음, 잠시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할까요?”
뜸을 들이다 나온 사울른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왔던 사람들과 사울른, 단유는 피난민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이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아무래도 그냥 나갈 것 같진 않군.”
“여기 있으면 에토신스 군에게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 고집들을 피우는 건지.”
혀를 차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사울른은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저 사람들의 말도 이해는 됩니다. 막말로 공국 내에서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이슬을 맞으며 떠돌아다녔을 이들입니다. 그나마도 지붕이 있는 곳이니 쉽게 떠나기 힘들 것이고요.”
“그렇다고 여기 그대로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소? 곧 군이 쳐들어오면 저들이 지키려는 가족들은 군사들에게 유린당할 것이건만.”
“공국 내에 있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공국 밖으로 나가자니 이미 모든 국경이 막힌 상황. 결국 저들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죠. 유랑민이 되어 떠돌다가 몬스터나 들짐승의 먹이가 될 수 있으니까.”
“하아.”
사울른의 말이 틀리지 않아, 사람들은 그저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울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우리는 저들에 비해 꽤 좋은 형편이지 않습니까? 잘만 숨으면 적들에게 들키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으니까요. 같은 말이지만 공국 내에서 우리 마을만큼 안전한 곳을 없을 것입니다.”
“어디 안전뿐이던가? 마법사님의 도움 덕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을에서 살게 되었는데.”
“네. 그래서 말인데···저 사람들 우리 마을에서 살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여기?”
“아니요.”
“그럼? ···설마 저기?”
아래로 향한 손가락짓에 사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건 아니지.”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그래. 혹시 저 중에 첩자라도 있으면 어떡해?”
사람들의 반발은 예상했다는 듯 사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반대였다.
“여러분의 염려는 저 역시도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안전을 도모할 만한 곳은 이곳 뿐입니다. 여기, 루치드의 도움이 컸지만 여러분도 함께 한 일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마을을 아끼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 여기 루치드가 없었다면, 여러분도 저들과 비슷한 처지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저들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지킬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단유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사실 처음 지하 도시를 만들 때는 여러분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컸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 도시는 여러분들의 소중한 이웃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 희생과 아픔을 기억하며,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주춧돌이 된 것이 아닐까요?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 여러분들이 처음의 그 마음을 계속 지켜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돌봐 주고, 서로를 지켜주는 것. 진정한 공동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유는 길게 잇던 말을 잠시 끊었다가 마무리 지었다.
“그런 공동체 의식을 소중히 지켜가는 마을이라면, 저도 최선을 다해 여러분들을 도울 것입니다.”
결정권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감히 누구도 쉽게 ‘반대’를 이야기할 순 없었다. 거기다 단유의 마지막 말이 사람들의 결정을 도왔다. 무려 마법사가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데, 어찌 반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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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은 반신반의하며 마을 사람들을 따라 나섰고, 지하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 입을 다물 줄 몰라 했다.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기도 했지만, 내심 뿌듯한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마을 사람들이 새 입주자들을 데리고 마을 안을 소개할 때, 단유는 텅 빈 마을 앞에 섰다.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단유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단유는 숨을 골랐다.
“잠시만요.”
막 마법을 사용하려는 찰나, 사울른이 단유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음. 이건 정말 개인적인 부탁인데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사울른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한참을 머뭇대다 겨우 말을 꺼냈다.
“······.”
사울른이 말을 마쳤을 때, 단유도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습니다만, 한 번쯤은 고려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단유는 가만히 사울른을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사울른은 대단하시네요.”
“네?”
“당신의 통찰력을 칭찬하는 겁니다. 누구도 제 마법을 당신처럼 이해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건···아마도 저만큼 당신 옆에 붙어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 지도요. 하지만 그래도 사울른 당신의 통찰력과, 그 애국심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애국심···은 아닙니다. 솔직히 공국의 병사였지만, 공국을 위해 희생하겠다거나 하는 마음은 별로 없었거든요. 다만 제 생각대로 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교국에게 점령당할 미래는 피할 수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내키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분명 내키지는 않으시겠죠. 그렇지만 만약 한다고 하셔도 마음의 부담은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엄연히 전쟁을 위해 나선 군대이고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니까요.”
“네. 그렇지만 저랑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죠.”
“···그렇죠.”
“사울른의 뜻은 알겠지만, 분명 무리한 부탁인 건 부정할 수 없겠네요.”
“죄송합니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사울른은 단유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의 뜻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