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79화 (679/956)

개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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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죠. 이건 당신들한테 소중한 것인가요?”

너무 뻔한 질문이다. 울펜은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보물의 가치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었던가?”

“마법을 막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 아닌가요?”

“······.”

“만약 당신들 말대로 이 땅의 모든 마법사들이 사라진다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낙서가 적힌 동판 아닌가요?”

“감히···감히···우리를 모욕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정말 사악한 놈이로구나!”

단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울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역시 마인이란 족속들은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길 좋아하는 놈들이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구나. 낙서라고? 내가 다른 건 말할 수 없지만 그것만은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지. 그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글자이다. 신성으로 가득한 글이니 당연히 인간들은 물론이요, 너 같은 마인들조차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신? 그럼 교국에서 받드는 그 신을 말하는 건가요?”

울펜은 입을 다물었다. 사울른이 한 걸음 나서는 걸 단유가 손을 들어 말린 뒤, 차분하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그 귀하다는 물건이 깨져서 어떡합니까? 설마 이게 하나뿐인 ‘보물’은 아니죠? 그럼 너무 미안할 거 같은데.”

“악···마 같은 놈!”

부들부들 떠는 울펜을 보며 단유는 일어섰다.

“아, 하나만 더 물어보죠.”

울펜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분명 저들이 지하로 내려올 때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리라 작심했건만, 비록 울분이 치솟아 저주에 가까운 말을 뱉었을 지언정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어쩐지 저들의 술수에 놀아난다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태연히 계속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털어놓지 않았다고 울펜은 생각했다.

“당신들은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울펜은 입을 다물었다.

“교국인가요?”

울펜은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어쩐지 저자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알면서 일부러 자신을 놀리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단유는 울펜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다 돌아섰다.

****

단유는 1층의 식사를 하던 테이블에 앉아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사울른은 단유의 뒤를 이어 울펜을 심문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비명은 모기소리보다 작게 들려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조금 전의 울펜과 나눈 대화에서 단유는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뻔한 질문을 해 봐야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런 대화로 진을 빼기 싫었던 단유는 정말 궁금한 몇 가지만 물어서 대답을 유도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고, 사울른을 통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단유였다. 하지만, 저들이 말하는 마법사의 악행과 혐오감에 대해서는 와 닿지 않는 면이 많았다. 녹스 성에서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간간이 느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단유를 두려워하긴 해도 저들만큼은 아니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저 놀랍다는 수준에 그치기도 했다. 당장 오늘 새벽의 일만 봐도, 피비 아주머니는 단유가 만든 빛의 구슬 마법을 보았음에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상처를 봐주었다.

몇몇 특별한 몇 사람들이 말하는 혐오감, 혹은 공포감은 단유가 체감하는 것과 온도차가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요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법사에게 가지는 선입견과 저들이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혐오감을 근간으로 하여 활동을 하는 조직이 제대로 된 조직일 리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 조직의 편향성으로 보건대 특별한 목적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혐오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거기까지였다. 단유가 그들의 조직에 대해 알고 싶었던 부분은. 그들의 조직이 어디 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적진에 쳐들어가 처절한 복수극을 펼칠 것도 아닌 바에야 그들이 뭘 하든 무슨 상관일까. 설령 저들이 신의 이름을 빌어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들이라 한들, 단유 본인이 충실한 신도도 아닌 마당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한들 무슨 상관일까.

동판에 대해서도 울펜이라는 자는 아는 게 없어 보였다. 신의 글이니 하는 말은 그들의 조직 강령에 따른 교리처럼 들렸고, 그 교리를 진실로 알고 있는 울펜에게서는 더이상 캐낼 게 없었다. 다만, 그 동판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보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울펜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울펜의 반응에서 단유는 그의 숨은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게 동판처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기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 역시 단유의 호기심이 미치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저들 조직이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지만, 그게 결코 호의적인 초대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게르만족의 부흥을 외치며 유대인들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던 나치들과 저들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단유는 주머니에서 동판의 파편을 하나 꺼내어 살폈다. 상형문자도 아닌 것이, 그저 꼬불꼬불한 형태이지만 그래도 문자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규칙성은 보인다.

도대체 어떤 글자이기에, 그리고 이 동판에 쓰인 글이 어떤 글이기에 마법의 구현을 막는 역할을 한 것일까?

그때 바깥에 여러 사람의 발구름 소리가 들리며 시끌시끌해졌다. 단유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옮겨졌다.

****

“괜찮을까?”

“사람이 몇인데 겁을 먹고 그래?”

“새벽의 일을 생각해봐.”

“···괜찮아. 우리는 정당한 일을 하는 것 뿐이야.”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손에 칼과 창이 들린 것은 그저 자기 방어를 위함일까?

닫혀 있는 여관 문을 누가 먼저 두드릴까, 서로 눈치를 보는 틈에 문이 열리고 단유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비록 어깨, 가슴, 다리에 붕대를 둘둘 만 환자였지만, 그것이 수많은 습격자들을 물리치고 얻은 상처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단유의 시선이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을 훑어내리자, 몇몇 사람들은 얼른 손을 뒤로 물리기까지 했다. 그 순진한 반응과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단유는 차마 그들을 비웃을 수 없었다.

단유의 질문 뒤로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결국 처음 마을 사람들을 선동했던 중년인이 나섰다.

“당신들한테 이야기할 게 있어서 왔소.”

“들어오시겠습니까? 아, 물론 저희 집은 아니니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날이 차가우니 안에 들어와서 하시지요.”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마저도 순박한 시골 마을 사람들의 그것처럼 보여 단유는 조금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저런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이런 참혹한 일이 생기다니.

헛기침 몇 번으로 용기를 내어 안에 들어선 사람들. 여관 식당에 몇 안 되는 테이블에 앉으니 자리가 모자라 몇몇 사람들은 벽에 붙어서 둘러싸는 형태로 섰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단유와 그와 마주 앉은 중년인에게 몰렸다.

“길게 말할 건 아니니, 짧게 용건만 말하겠소.”

“말씀하세요.”

“당신들, 정체가 무엇이오? 정체가 무엇인데 어제 그 사단이 난 것이오?”

“그냥, 여행자들입니다.”

“그럼 저들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조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제 새벽에 당신 일행이 한 사람을 데리고 간 것으로 아는데?”

“지금 지하 창고에 갇혀 있습니다.”

“···죽였소?”

“살아 있습니다.”

“그럼 그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소?”

“물어는 봤지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

“정 의심스러우시면 저기 창고로 내려가 보시면 됩니다.”

“그건 나중에, 물을 말이고, 그럼 그들이 당신들을,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죽인 이유가 무엇이오?”

“조직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인데?”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말이 되지 않잖소! 모르는데 무슨 비밀을 감춘단 말이오?”

“저들은 단지 자신들의 드러난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적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되오?”

“그러게 말입니다.”

단유의 막힘없는 대답에 선동자는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도 수근대며 단유의 대답을 해석해보려 하지만,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린 그들이 다시 이 마을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여태 살면서 그런 자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마을에 그런 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는 보나마나 당신들 때문 아니오? 그러니 ···당신들이 이 마을을 떠난다면 그들이 다시 이 마을을 찾아올 이유는 없을 것이오.”

단유는 중년인을 빤히 바라보았고, 중년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단유는 그가 말하는 것과 본래 의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흔들리는 동공과 사람들이 손에 든 무기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바이언이요.”

“네, 바이언. 바이언의 말은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들도 걱정되시겠죠. 단순히 저희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이 순순히 이 사태를 넘어갈까 하는 불안감.”

몇몇 사람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옆에 선 이들이 팔꿈치로 찔러서 정신 차리라고 일러주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바이언 씨.

바이언은 이미 선수가 넘어갔음을 깨달았지만, 이 사태를 어찌 되돌릴 수 있을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처음엔 점잖게 들어가서 상대가 방심하는 사이에 처음의 목적대로 그들을 기습하여 사로잡은 뒤, 그들을 이후에 올 습격자들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들이 벌인 일이다, 라고 항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단유가 그들을 맞이한 후,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통에 차마 손을 쓸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앞에 앉은 젊은이가 대놓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니 뜨끔한 마음이 들어 나설 타이밍을 잃은 것이다.

바이언이 그런 마음을 품거나 말거나, 단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더이상 이 마을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돕는다고? 어떻게 말이오?”

단유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

한참 후, 사울른이 창고에서 나왔을 때, 여관에는 오직 단유 혼자 같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동판을 살피고 있었다. 사울른이 천으로 손을 닦으며 단유에게 다가왔다.

“루치드. 아까 누가 찾아왔던 것 같은데.”

“아, 마을 사람들이 잠깐 왔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혹시 마을에서 나가달라는 이야기였습니까?”

“비슷해요.”

사울른은 의자를 끌어내 그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단지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저항도 못하는 사람들을 죽인 이들이다. 자신들이 떠난 뒤라도 그들은 이 마을에 들어와 남은 사람들을 도륙할 가능성이 있다. 조금 전 홀로 남아 울펜이란 작자를 심문하면서도 느꼈다. 그들은 마법사를 악마라고 하지만, 사울른이 보기엔 그들이 악마였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오전에 말한 대로요.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떠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돕는다는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사실 단유도 그런 이유 때문에 마을을 떠나지 않는 것이리라, 사울른은 짐작했다. 그가 본 마법사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정이 많고 속이 깊은 인물이었다.

단유가 사울른의 손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어땠어요?”

심문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라 생각한 사울른은 고개를 저었다.

“루치드와 이야기할 때는 술술 잘만 이야기하길래, 잘 털어놓겠구나 싶었는데 결코 입을 열지 않더군요. 오히려 평생 들을 욕을 한 번에 다 들었습니다. 그런 저주 섞인 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죠.”

“고생하셨어요.”

“루치드는 그럴 줄 알았던 건가요? 그래서 그렇게 별거 아닌 것들만 물었던 건가요?”

“별거? 아뇨. 꽤 많이 알아냈는데?”

“알아냈다고요? 그게 뭔가요?”

“우선 저들의 조직은 이 동판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조직일 겁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00년 정도?”

“이게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도 있는 겁니까?”

“대충은요.”

“···그건 그렇다치고, 그게 만들어진 것과 그 조직이 만들어진 연원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겁니까?”

“그전에 울펜이라 자가 말했었죠? 자신들이 마법사 소탕전에 참여했었다고. 그리고 이 땅에 마법사들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즉, 그들의 조직은 마법사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이들이 뭉쳐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단순히 적대감만으로 그들이 조직을 만들까요? 조직이 만들어지는 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을 뭉칠 때입니다. 이들의 경우에는 마법사를 죽인다는 것이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마법사를 상대하긴 쉽지 않으니 아마도 특별한 수단이 그들에게 생긴 것이겠죠.”

“그 수단이 이 동판이란 건가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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