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78화 (678/956)

개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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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주머니의 만류에 결국 단유는 마을을 모두 돌아볼 생각을 접고 돌아서야 했다. 당장은 아주머니를 ‘소소하게’나마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단유는 마을을 나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지만, 그래도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터라 걸어서 올라가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은 단유의 부상으로 인한 통증을 확실히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결국엔 언덕에 오른 단유. 가쁜 숨을 고르며 풀밭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을 전경이 훤히 보였다. 마을에 처음 왔을 때도 봤었지만, 멀리서 보면 참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누가 저 마을에서 그런 학살극이 펼쳐졌을 거라고 생각할까?

동이 튼 후에는 파란 하늘이 보여 맑은 날일까 생각했었는데, 정오에 가까워질수록 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단유는 기다리고 있을 에밀리아와 사울른 때문이라도 빨리 둘러보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에 베인 허벅지가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참을만 하다고 느꼈다. 차라리 좀 더 심하게 몸을 혹사시키면 통증을 덜 느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덕 위를 천천히 걸으며 살피니 북쪽 언덕 너머로 우듬지가 보였다. 저기라면 좋은 나무들을 많이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의 수레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어딜 가셨다 오시는 겁니까?”

잠에서 깬 사울른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단유의 안부를 물었다.

“마을 주변을 잠깐 돌고 왔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피비 아주머니가 죽을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일행을 치료해줬던 아주머니의 이름이 ‘피비’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고마우신 분이네요.”

“네. 그렇죠.”

세 사람은 여관의 1층 룸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이상해요.”

에밀리아가 스푼을 들지 못하고 앞에 놓인 죽을 보다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밥 먹는 게···. 죄를 짓는 기분이에요.”

여관 카운터 앞에서 쓰러져 있던 핑크색 단발머리를 한 여관주인은 이미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다른 희생자들의 곁으로 옮겨지고 없었다.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주인의 아내도 함께 희생되었다고 했다.

에밀리아는 그가 희생당한 곳에서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밥을 먹는 게 어색하고 죄스러웠다. 그러나 이곳 외에는 이 마을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곳이 없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흐느껴 울 것처럼 굵은 눈물방울이 눈꼬리에 맺힐 때, 사울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억지로 드세요, 레이디.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먹고 힘내야 어디로든 갈 힘이 생기죠.”

에밀리아는 사울른과 단유를 한번 씩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단유는 사울른을 불렀다.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니 사울른은 자신도 돕겠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릴 생각이에요. 하지만 내일까지는 그래도 좀 쉬도록 하죠.”

“루치드도 이제 그만 쉬세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네요.”

“무슨 일이, 더 남았습니까?”

단유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사울른의 눈빛이 변했다.

“···같이 가 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 해도 충분해요.”

“순순히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그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고요.”

“그럼 같이 가시죠.”

여관 카운터 뒤에 있는 좁은 통로는 작은 문으로 이어지고 그 문을 따라 내려가면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둔 지하 창고가 나왔다. 입구부터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짙은 어둠이 두 사람을 반겼다.

단유가 머리 위로 빛의 구체를 만들어 띄우고는 계단을 내려가고, 그 뒤를 사울른이 따라갔다. 먼지 가득한 창고의 흙바닥에 두 손발이 묶인 채 끙끙거리고 있던 울펜이 몸을 뒤틀며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고에 처박아둘 때는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그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사울른이 나서서 그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당장이라도 악을 쓸 줄 알았던 울펜은 아무런 말도 않고 그저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지하 창고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울펜이었다.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가는 게 어떤가? 아, 하긴 어딜 가더라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죽음 뿐이리라.”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저주를 퍼붓는 울펜을 보다 단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단유의 웃음에 울펜이 얼굴이 굳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알 것 없다. 그저 목이나 씻고 기다려라. 복수의 칼이 너희들의 턱 아래를 짓이겨 줄 것이다.”

“그런 시답잖은 저주나 듣자고 온 게 아닙니다.”

“뭐라?”

“당신들은 어디서 왔죠?”

“우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너희는 우리의 흔적을 찾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너희를 지켜볼 것이고, 너희의 빈틈을 노릴 것이다.”

“충성심이 대단하시군요.”

“···너 같은 녀석에게 비아냥을 들으니 오히려 고맙다. 이왕이면 날선 칼로 내 심장을 도려내 주겠나?”

말하는 걸 보면 무슨 광신도와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 무슨 순교라도 되는 듯이 말한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요?”

“몰라서 묻느냐? 악마같은 녀석! 인간을 하찮게 보는 너희 마인 놈들의 습성을 모를 것 같느냐? 오랜 시간, 허락되지 않은 힘을 훔쳐 쓰면서 마치 뭐라도 된 듯이 인간들을 농락하고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더냐?”

“제가 그러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너희는 그런 족속인 것을. 알량한 힘만 믿고 있었겠지만,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건 그저 우리가 부족했을 따름이니, 다음번에는 반드시 죗값을 받으리라.”

“만약 다음에도 제가 이긴다면요?”

흠칫, 놀라는 기운이 있었지만 금방 내색을 지우고 이를 가는 울펜.

“끝은 없다. 영원히, 악마를 이 땅에서 없애버릴 때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악마’라면 당신들이 얼마나 많든 모두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익!”

울펜의 눈동자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러나 단유는 개의치 않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건 뭔가요?”

단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들어 뒤집었다. 바닥에 땡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건 바로 깨진 동판의 파편들. 그것을 보자 울펜은 말은 안 했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매우 귀중한 보물이 저리 형편없이 깨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속상함, 그리고 믿었던 보물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이 꼴이 된 것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묻고 싶었다.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없었을 텐데 그런 힘을 낸 것이냐고.

****

“이봐, 이렇게 떠날 거야?”

단출하게 싼 짐을 수레에 올리던 사내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냈던 친구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 가족들도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난 내 가족을 지킬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래, 그러니까 자네도 같이 가자고.”

“가면 어디로 갈 텐가? 갈 곳이 없지 않은가?”

사내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지난 번에 직접 곡물을 팔기 위해 라이워치 성에 갔을 때, 에토신스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고, 거기 사는 먼 친척이 이야기해줬어.”

“에토신스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사내는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아직 경비대가 그 루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는 사람들끼리 쉬쉬하며 그 루트를 이용한다고 이야기해주더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 안 되니까. 그 친척도 조만간 그 길로 넘어갈 생각이라고,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더군. 에토신스는 워낙 땅이 비옥하니까,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함께 하자고 했었어. ···솔직히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어제 일도 있고 그러니까, 그냥 이때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네.”

사내의 친구는 가족을 위해 떠나겠다는 친구를 말릴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안전한 길이 있다면 자신도 함께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잠시만 기다리겠나? 사실 나도 진작에 짐은 다 꾸렸어. 가족들도 가자고 하면 바로 떠날 준비가 될 거야.”

“그럼 서두르시게. 더 늦으면 내일이 지나도 성에 도착하는 게 힘들테니.”

언제 막힐지 모르는 루트는 시간 싸움이다. 빨리 서둘러 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식으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도저도 아니어서 결국 마을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그나마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이봐, 그 칼은 뭐야?”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그럼 나도 가지고 갈까?”

“보진 못했지만, 그놈들을 모두 도륙했던 놈들이야. 점잖게 말한다고 듣지 않을 수도 있으니.”

오전에 희생자들을 처리한 후, 주점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주장은 따를 만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칼까지 드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에 그저 팔만 걷어붙이고 나선 이도 없잖아 있었지만, 아무튼 그들은 무리를 지어 여관으로 향했다.

****

단유는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본래의 모습대로 이어붙였다.

“이 글자, 이 문양은 무슨 뜻이 있는 건가요?”

울펜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단유를 노려보기만 했다.

“모르는 건가요? 알면서 대답하지 않는 건가요?”

답은 둘 다였다. 울펜도 정확히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 전 마인 토벌전 때 놀라운 성과를 보였음을 들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숨어 있던 마인들을 붙잡을 때 제 역할을 해냈음을 체험했기에 동판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동판에 빽빽이 새겨진 문양과 문자의 기원은 모른다. 하지만 일부의 문양과 문자를 몸에 새기면 동판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은 조직원들의 몸에 그것을 새겼다.

그 뒤로 그들은 어떤 마인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그 문양이 통하지 않는 마인도 있었는데 그 원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동판이 있으면 그 마인도 힘을 못 쓰기 때문에 결국 이기는 건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동판이 무려 마인에 의해 깨지고 그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울펜은 살아날 길이 없어진 마당이었다. 설령 단유가 그를 살려준다고 해도 울펜은 자신의 조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

모든 파편들이 맞춰지고 본래의 모습대로 되었지만, 여전히 단유의 머리맡에 띄어진 빛의 구슬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판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임을 확인한 단유는 고개를 기울이며 동판에 새겨진 것들을 찬찬히 살폈다.

“이 문자는, 여기서 쓰는 문자는 아니죠?”

단유는 사울른에게 물었다. 사울른이 다가와 단유 옆에 몸을 굽히고 살폈다.

“네, 저도 처음 보는 겁니다. 문양도 본 적이 없는 거고요. 하지만 제 식견이 너무 짧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사울른이 본 적 없는 거라면, 아마도 이 건 여기서 쓰는 게 아닐 겁니다.”

단유는 그렇게 말하고 여전히 날선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하지만 바닥에서 처박혀 있는 상태라 전혀 두렵지 않은 울펜을 보며 물었다.

“당신도 이게 정확히 뭔지 모른다는 거죠?”

“······.”

“이 동판은 오래된 유물은 아닌 것 같아요. 동판 자체가 만들어진 것은 수십 년 전이고요. 그리고 동판을 만든 이후에 글자랑 이 문양들을 새긴 것 같군요.”

동판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 조직은 마법사에 대한 강한 적의를 사명감으로 포장하여 살인에 대한 변명으로 삼고 있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방식이 도의적이지 않다는 건 둘째치고, 그 허접한 사명감은 당신네 조직이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겠네요.”

“감히!”

“아주 오래전, 어떤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이 고의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속세를 떠나 외로운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었죠.”

“웃기는군. 설령 그런 놈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너희 족속 자체가 이 사회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이란 걸 증명하는 것이니, 너도 이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어떤가?”

“마법사에 대한 당신들의 혐오는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태초부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었다!”

단유는 사울른을 돌아보았다.

“마법사···물론 저에게도 두려운 존재들입니다만, 저렇게까지 혐오하진 않습니다.”

“너는 변절자다! 감히 마인의 곁에 붙어서 제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너 역시 저 마인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간사한 벌레 같은 놈이다!”

지하 창고가 울릴 정도로 악에 찬 울펜의 외침에도 단유는 태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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