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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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해가 밝기도 전에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이 깨어났다. 단유의 마법이 만들어낸 폭음에 잠에서 깬 사람들은 마을이 피로 물든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웃집 현관 앞에 싸늘한 시체로 엎어져 있는 절친한 친구의 시신, 잠들기 전까지도 함께 술잔을 나눴던 이웃이 혀를 빼물고 차가운 거리에서 식어가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광경이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들이 점차 한 방향을 향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의 원흉이 있는 곳으로 횃불들이 움직였고, 마침내 넓지 않은 여관 앞 대로에 살아남은 이들이 모였다.
울펜을 질질 끌어 옮긴 후에야 바닥에 주저앉은 사울른과 기력이 다한 듯 힘없이 벽에 기대고 있는 단유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상황이니 이들이 이 참상을 벌인 이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상한 빛의 구체도 그렇고.
단유가 마법을 해제하여 빛을 사라지게 하자, 그들은 어둠 속에 묻혔다. 한 사내가 용기있게 횃불을 들이밀며 그들에게 접근하자, 사울른이 힘겹게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보며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러나 피로 물든 그의 얼굴은 순진한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감만 더할 뿐이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누구라, 단유나 사울른이나 딱히 명쾌한 답을 주기 힘든 질문이었다. 마법사와 탈영병이라고 설명한들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
다행히 복면인들이 살인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있었다. 창가에 숨죽이고 앉아 바깥의 참상을 목격한 이들의 진술로 단유네에 대한 의심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위로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동정심이 없진 않았는지, 어느 아주머니가 다가와 상처를 봐주었다.
“고맙습니다.”
사울른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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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밝아올 무렵, 여관 근처 공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은 복면인들을 한 번에 불태우는 화장식이 벌어졌다. 아니, 화형이라고 해야 할까?
죽은 마을 사람들은 따로 마련된 곳에 옮겨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있지만,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살아남은 이들은 감당키 어려운 슬픔에 뒤늦게 혼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광경을 여관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던 단유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와줄 게 없을까요?”
붕대로 상처 부위를 칭칭 감은 사울른은 거의 미라에 가까웠다. 조금씩 새어 나온 상처 부위의 피 때문에 붉게 물든 붕대여서 더 고통스럽게 보였다.
미라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저희가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죽은 자들이나 죽지 않은 자들이나 모두 슬픔에 허덕이고 있으니까요. 저들에겐 우리도 마치 더러운 질병처럼 느껴질 겁니다. 저희가 이 마을에 온 탓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거니까요.”
솔직히 사울른은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 마을로 가자고 말한 당사자이기도 하니 더 이 사태에 대해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이렇게 치료까지 받게 되었으니 더 미안했다.
단유는 사울른이 그가 당한 부상 이상으로 아파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더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르게 밝아오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머물렀다 갈까요?”
원래는 바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이대로 그냥 가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고 느꼈다. 물론 가족을 잃은 이들, 이웃을 잃은 이들의 상실감을 보상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고, 딱히 떠오르는 방법도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줘야 한다고 느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장은 없지만 생각해보면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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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마을 정리에 나선 사람들이 겨우 일을 끝낸 뒤 지친 몸을 끌고 향한 곳은, 주점이었다. 아침에는 주점을 열지 않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주점 주인도 실핏줄이 잔뜩 선 눈으로 묵묵히 테이블마다 케그 한 통씩을 놓아주었다.
다들 알아서 케그를 기울여 잔을 채우고 목을 축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우리 마을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교국에서 보낸 첩자였을까?”
중얼거림과 술 넘기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을 때, 한 사내가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 그래?”
사내는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생각들을 해봐. 그냥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 놈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복면을 쓴 놈들 말이야, 만약 그놈들의 또 다른 무리가 다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
“···남은 녀석들이 있다고?”
“딱 봐도 조직으로 운영되는 놈들이야.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녀석들. 그놈들이 복수랍시고 우리 마을에 찾아오면 어떻게 되겠어?”
사람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전쟁이고 자시고,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거였어. 빨리 이 마을을 떠나야 돼.”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결국 또 이전에 했던 이야기의 재탕이 된다. 평생을 일군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러나 떠나더라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족들을 위해 억지로 떠난다 한들, 갈곳이 막혀 있는 상황.
침묵이 감돌던 때에 누군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여관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그 사람들은 뭐하는 이들인지 들었나?”
“그냥 여행자라고만 하던데.”
“이런 시기에 여행이라니. 수상하지 않은가?”
“내 말이!”
다른 한 사람이 목소리를 키웠다.
“어제도 내 말하지 않았나? 수상하다고. 다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혹시 말이야, 그 사람들 무슨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중인 거 아닐까?”
“여자도 있던데?”
“여자는 죄를 안 짓나?”
“그럴 얼굴은 아니던데.”
어제 술집에 에밀리아가 출현했을 때, 보기 드문 그 외모에 시선이 절로 모였던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에끼, 이 사람아. 어디 사람이 얼굴로 죄를 짓던가?”
“그래도 그건 좀···.”
“혹시 여자를 납치한 건가?”
“납치한 여자를 데리고 술집에 와서 같이 술을 마신다고?”
온갖 추측이 이어지던 중에 처음 그들을 수상하다고 말했던 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이번 일은 분명 그들과 관계있어. 다시 말해서 그 복면 쓴 놈들, 그놈들이 바라는 건 여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이어지는 사내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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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는 정오가 되기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자신을 간호하려는 목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단유를 보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왜 그래요, 에밀리아.”
“···루치드, 괜찮아요?”
사울른 못지 않게 붕대를 감싼 단유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단유가 처절하게 싸우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졸였던 에밀리아는 그가 칼에 베이고 찔릴 때마다 가슴을 움켜쥐고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었다. 도저히 지켜 보기 힘든 광경을 눈에 담은 죄로 반나절을 혼절해 있다 깨어난 에밀리아는 다행히(?) 살아서 전과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봐주는 단유를 보자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단유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배고프지 않냐고 물었다. 에밀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허기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단유의 말에 여관 주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차마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에밀리아. 우리 며칠 정도는 여기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에밀리아는 단유의 말에 잠시 단유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에 단유나 사울른 모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황이니, 설령 그들이 먼저 떠나자고 했어도 말렸을 것이다.
“그럼 잠깐 여기 있어요. 그리고···사울른 깨어나면 에밀리아가 좀 도와주고요.”
그제야 단유의 등 뒤에 다른 침대가 하나 더 놓여 있고, 거기에 붕대로 상체는 물론 얼굴까지 동여 맨 사울른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밀리아가 놀란 얼굴이 되어 벌떡 일어나려는데, 단유가 말렸다.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사울른은 괜찮은가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좀 많이 흘려서 지친 거예요. 그래도 사울른은 건강한 사람이니까 금방 일어날 겁니다. 그래도 에밀리아가 좀 도와주는 게 좋을 거예요.”
에밀리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자신을 위해 희생을 감행했던 사울른이었다. 끝까지 적들이 여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던 분투를 지켜봐야 했었다. 단유에게도 고마움이 있지만, 사울른도 그 못지 않게 고맙고 미안했다.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자, 에밀리아가 급히 물었다.
“어디 가세요?”
단유는 잠깐 볼일만 보고 돌아오겠다고 대답했다. 단유의 대답에 에밀리아는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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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나서니 어제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을 향한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단유는 불편함보다 미안함을 더 강하게 느꼈다.
“이봐요, 더 누워있지 왜 벌써 일어났어요?”
한 푸짐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단유에게 말을 걸었다. 단유가 지쳐 벽에 기대 주저 앉아 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봐 주고 친히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봐주던 아주머니였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요.”
아주머니는 혀를 찼다.
“내가 몰랐으면 몰라도 젊은이 상처를 직접 봐준 사람이예요. 이렇게 움직이면 상처가 덧나서 곪을 수 있다고요.”
단유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안 그래도 조금 있다 죽이라도 해서 가져다 줄려고 했는데.”
단유는 아주머니의 친절을 사양하지 않았다. 여관에 쉬고 있는 일행에게 그 식사를 부탁하고는 인사했다. 그러다 그 아주머니가 나온 집을 바라보았다.
“아, 저기 혹시 뭐 필요한 거나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받기만 하는 건 미안해서요.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서···.”
“됐어요. 그 몸으로 뭘 하겠다고. 일단 쉬면서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요.”
아주머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나으면 빨리 마을을 떠나요.”
단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난, 개인적으로는, 그쪽을 탓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그건 젊은이가 이해해줘야 해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래요, 그래도 다친 사람을 매정하게 내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쪽을 돌보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말이에요···, 나도 사실 마음이 썩 편한 건 아니라오. 일주일에 반 이상을 함께 지내며 같이 밥도 먹던 절친한 친구 내외를 잃었어요. 내가 아플 때 내 딸 아이를 대신 봐주기도 했던 이웃이 주검이 돼서 돌아왔어요.”
말로 꺼내면 한두 마디로 끝날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지낸 사이도 아니고, 몇 십년을 함께 지낸 이웃들을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불안해해요.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라고. 그러니까 괜히 이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상처가 나을 때까지 여관에 있어요. 그때까지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단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그런 인사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그러지 말아요.”
단유는 다시 허리를 펴고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말했다.
“제 동료가 나으면 마을을 떠나겠습니다. 그래도 그 전에 제가 이 마을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주고 가고 싶어요.”
“그쪽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혹시···돈이 많으신가?”
“돈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도울 일이 있지 않을까요?”
“···하긴 요즘 같은 때에 돈이 다 무슨 소용일까. 조만간 교국이 이곳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판인데.”
아주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란 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단유는 다시 시선을 위로 들어 아주머니가 나온 집을 바라보며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