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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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건 사울른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상대하던 두 사람이 억지로 틈을 벌려 여관 안으로 진입하려 들지 않았기에 사울른은 수비적인 자세로 그저 위치만 고수하면 됐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울른은 단유가 얼마나 힘겹게 분투를 벌이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날아드는 칼들을 막아내느라 온 신경을 다 기울였다.
사울른을 반으로 가를 듯이 날아드는 만곡도를, 오른손에 쥔 단검으로 궤도만 틀어 피해내고 뒤이어 찔러 들어오는 검을 향해 역수로 고쳐잡은 단검으로 찍어 눌렀다.
상대도 그저 당하지만 않겠다는 듯, 비틀리는 힘을 이용해 작은 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사울른의 목을 베어내겠다는 듯이 가로로 그어지는 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다급히 고개를 숙여 피한 사울른. 그리고 찍어 눌렸던 검은 만곡도의 장점을 이용해 사울른의 단검을 안으로 휜 부분에 걸더니 잡아당겨서 뺏으려 시도했다.
고개를 숙여 앞서의 공격을 피한 사울른은 들고 있던 칼을 놓지 않는 대신, 잡아당기는 힘을 따라 들어가면서 손목을 꺾어 단검을 빼낸 뒤 그대로 상대를 찔렀다. 가슴 바로 앞에서 상대의 곡도가 휘둘러지며 단검을 쳐냈고, 사울른은 무리하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검을 회수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가슴께로 단검을 들어 올리고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불리한 싸움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 한 사람씩 번갈아가며 공격을 찔러넣었는데, 덕분에 사울른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상대는 체력을 보존하며 빈틈을 노리는 전략을 취할 수 있었다.
확연히 지친 표정을 드러낸 사울른을 확인한 울펜이 웃으며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악하느라 수고 많으신데 저희도 시간이 많지 않아 죄송하네요. 대충 정리도 끝난 것 같으니.”
그 말이 끝날 때, 울펜의 뒤에서 두 복면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만곡도에는 무고한 주민들을 해치며 묻은 선혈이 방울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끝내.”
여유로운 걸음으로 단유 주위를 걸어 단유를 포위하더니 곧 칼끝을 단유에게 겨눈 복면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칼을 찔러 넣었다. 단유의 전후좌우 위아래에서 찔러 들어오는 칼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단유는 그 짧은 사이에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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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일이었다. 단순히 단유가 체감한 시간만으로도 오래된 일이지만,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흐려진 기억의 조각이었다.
“귀를 기울여라”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낮고 음울했던 안트의 목소리가 마치 현실에서 들리는 듯했다.
“디아트리는 단순한 놈이야. 오직 하나의 목적만 바라고, 그 목적을 향해 미련할 정도로 단순하게 직진만 하는 성격이지.”
“안트는요?”
“고개를 들고 바라보아라. 이 넓은 숲을 봐라. 이 숲에 어디 길이 하나 뿐이겠느냐? 설령 길이 없다고 해도, 자신이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느냐?”
“다른 길을 선택하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 있잖아요.”
“늦게 도착하는 대신, 다른 길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 끝없는 호기심을 채워나가는 게 지톤의 사명이다. 이 세상이 숨겨놓은 진실이라는 것은 오직 한 길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극히 필요한 말만 하던 안트가 단유를 데리고 뭔가를 가르쳐 줄 때는 꽤나 많은 말을 했었다. 그래서 한때는 안트가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일부러 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내가 가르쳐 줄 건 별거 없어.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보아라.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는 것만이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이다.”
안트를 따라다니며 이곳저곳을 보다가 물었다.
“제대로 듣고 보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안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단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고개를 들고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봐라.”
단유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울창한 가지를 드리우고 서 있었다. 이를 설명하니 안트가 설명했다.
“네가 보는 것은 그저 사물의 겉면일 뿐이다.”
“저 나무의 속도 볼 수 있나요?”
“속을 보는 정도가 아니다. 저 나무의 앞과 옆, 뒤도 볼 수 있다.”
단유는 나무 주위를 돌며 관찰하다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보던 안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움직여서 보란 말인가요?”
안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현재의 보는 방식에 익숙한 탓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들 네가 본 나무의 고유 성질을 알 수 있느냐?”
“그럼 안트에게 이 나무는 어떻게 보이나요?”
안트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고목의 거친 면을 손으로 짚더니 말했다.
“이 나무가 태어나 자라서 지금에 이르게 된 시간들이 보인다.”
“네?”
“그리고 수천년, 수만년이 지나도록 한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
단유는 그때의 안트가 정말 무슨 철학자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것이 보일리는 없다고 여겼다.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눈이란 신체기관을 통해 입력된 시각 정보를 뇌에서 해석해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니까. 눈에서 ‘수백년 전’의 나무가 보일 리 없고, ‘수만 년’ 뒤의 나무가 해석될 리 없다.
그러나 안트는 단유의 물음에 실소를 흘리며―그때 안트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말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네 세계가 허락한 것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면, 사물의 진체가 드러나고, 그 진체를 보아야만 진정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볼 수 있다는 말이죠?”
안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다 한참 후에야 다시 단유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의심해라. 눈에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들리는 것을 의심해라. 지금 네가 느끼는 모든 감각을 의심해라.”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깨달았을 때, 그리고 숲에서 나가게 되었던 그 순간에도 사실 안트의 말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발전이 없진 않았다. 숲의 숨겨진 소리를 듣게 되었고, 숨겨진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안트가 말했던 제대로 보는 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해한 채로 에르케넨의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물리반에서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으로 수업으로 하던 중에 엉뚱한 친구의 질문으로 잠시 쉬어갈 겸해서 선생님이 ‘차원’에 대해 설명하셨다.
1차원, 2차원, 그리고 3차원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바탕으로 4차원, 5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럼 2차원에서는 1차원의 물체들이 제대로 보이겠지? 이게 점인가, 선인가 하는 게 잘 보인단 말이야. 그런데 2차원에서는 높이를 지닌 물체, 예를 들면 삼각뿔 같은 건 제대로 볼 수 없어. 오직 선으로만 보인단 말이야. 3차원에 이르러야 z축을 지니기 때문에 삼각뿔임을 알 수 있어. 그럼 정리해보자. 1차원에서는 오직 점만 볼 수 있어. 2차원에서는 점과 선이 보이지. 그럼 3차원에서는?”
“면도 보여요.”
“그렇지. 점과 선과 면이 보여. 여기까지는 다들 잘 알잖아. 그런데 여기까지 알게 되면 당연히 다음 단계도 궁금해하는 게 바로 사람이야. 3차원이 있으면 4차원에서는? 이란 질문을 할까, 안 할까?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를 한 거야. 과연 4차원에서는 뭐가 보일까? 뭐가 보이겠어?”
“높이요?”
“맞아, 그런데 좀 더 격을 갖춰서 표현하면, 4차원에서는 ‘체(體)’가 보여. ‘실체’ 할 때 체,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 일반 사람들은 3차원에서도 보이잖아요? 라고 할 거야. 그런데 정말 그럴까? 당장 거기 너희들이 선생님을 볼 때 뭐가 보이니? 선생님의 앞면만 보이지? 선생님의 옆이나 뒤를 보려면 너희들이 직접 움직여야 하잖아? 단순히 한 자리에서 관찰한다는 전제 아래 보자면 결국 3차원에 존재하는 이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면을 보게 된다는 거지.”
선생님은 칠판에 3축을 그려 보인 뒤, 두 개의 축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면을 손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
3축의 중심에서 비스듬하게 그어 올린 축을 하나 더 만들고 그 위에 ‘u’라고 썼다.
“u축이 있어. 아직 u축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어. 어떤 사람들은 u축이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공간’을 의미하는 축이라고도 한다. 나? 나야 모르지. 알았으면 여기서 니들이랑 이렇게 아웅다웅하고 있겠어? 아무튼, u축의 성질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공통된 점은 u축의 적용을 받는 차원, 즉 4차원에서는 3차원에 존재하는 물체의 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지만 말이야.”
수학적으로 그리고 물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깊고 진중하게 파고들 수 있는 문제지만, 당시의 학생들에겐 그저 미스테리하기만 한, 그래서 흥미를 돋우는 그런 이슈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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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5차원은? 6차원은?’
차원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다. 가능성을 살펴보자면, 차원은 무한히 뻗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상위 차원에서 하위 차원의 물체를 볼 때마다 하나의 속성이 추가로 덧붙여 관찰 가능하다는 점이다. 바꿔말하면, 우리가 평범하게 바라보는 물체는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속성의 관찰은 결코 단순히 ‘보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한 사물의 진체(眞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안트의 ‘제대로 보는 법’은 바로 그 속성을 이해하고 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안트가 말한 수백 년 전의 나무와 수만 년 후의 나무라는 것도 어쩌면 u축의 지점에서 바라본 나무의 진체일 수 있다. 오랜 시간이 덧입혀져 만들어진 사물의 진체를 안트는 보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안트는 끝까지 제대로 보는 방법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왜?
그런데 지금 단유는 어쩐지 그 말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와 비슷한 경우를 한 번 겪어봤기 때문이다.
수많은 숫자들로 뒤덮인 세상.
어떻게 그 숫자들을 이해하냐고 묻는다면, 단유도 할 말이 없다. 그냥 이해했으니까. 그냥 보였고, 이해가 되었다. 앞에 선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가 보였고,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보였다. 그냥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느 지점의 상위 차원에서 사물을 보는 방식이라면,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차원으로 자신이 가는 방법이 바로 사물을 제대로 보는 법일 테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 과연 그 차원으로는 어떻게 갈 것인가?
‘아.’
그 순간 마지막으로 안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검버섯마저 피어난 늙고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젊을 때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로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었다.
“1은 유일함이다. 2는 함께한다는 의미며, 3은 균형이며 우주다.”
4는?
“4는 둘에 둘을 더함이니, 대립과 갈등이다. 그리고 4가지 길을 의미하니 방위를 뜻하기도 한다.”
거기에 이르렀을 때, 단유의 머릿속에 마치 빛의 폭탄을 터뜨린 것 마냥 번쩍하더니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휘리릭 흘러가던 기억의 이미지들도 사라지고, 안트의 목소리도 잔상처럼 흐려지다 사라졌다.
하얀 백지 위에 선이 그어졌다. 가로로 길게 이어지던 선은 끝없이 확장했다. 어디까지 선이 그어질까? 그런데 어느새 또 다른 선이 생겨 처음의 선을 양분했다. 무의식적으로 그 두 선을 단유는 축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선은 아마도 z축?
역시 그의 예상대로 다른 축이 만들어졌고, 그저 하얗기만 하던 세상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그 다음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의 축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하얀 세상이 또 한 번 번쩍였다.
처음의 축과 다음의 축이 함께였듯, 그 다음 축은 이어지는 축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 네 개의 축이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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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붉은 혈검은 금방이라도 단유의 머리를 반으로 가를 듯했다. 단유의 가슴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단유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라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단유가 움직이려고 어깨를 움찔거리는 순간에도 다들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았다.
단유가 움직였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칼을 향해 들고 있던 칼을 휘둘러 막아내고, 몸을 틀어 뒤에서 달려들던 칼잡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목을 잡아당겨 맞은 편의 사내가 찔러오던 검과 맞붙게 했다. 가볍게 한 발을 들어 아래로 그어지던 칼을 피하며, 상대의 칼 위를 밟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틀어 양쪽에서 찔러오던 두 개의 검을 한 번의 휘두름으로 쳐냈다.
단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휘두르는 동작에서 몸에 가해진 회전력을 이용해 방향을 틀어 주춤거리고 있던 복면인에게 달려들었고, 복면인의 동공이 단유를 인지하고 흔들리는 순간에 비어있던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다. 상대의 저항이 시작되려던 찰나, 단유는 들고 있던 칼을 보지도 않고 뒤로 내던졌고, 느닷없이 날아든 칼에 놀라서 배후를 공격하려던 복면인이 엉겹결에 팔을 휘둘러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그 사이, 빈 손이 된 단유는 주먹을 쥐고 멱살을 잡고 있던 복면인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드려 쳤다. 관자놀이가 신체의 드러난 약점 중 하나란 사실과 힘이라면 단유도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 결합되어 상대를 반쯤 정신을 잃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