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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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까지 시간이 남은 김에 단유와 사울른, 그리고 에밀리아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여관 주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돌아보면서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고, 마을 주점에서 판매하는 술이 꽤 맛있기로 소문난 것이라는 여관 주인의 제보도 확인할 겸해서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마을의 골목길을 내달리는 꼬마들을 웃으며 뛰어다니는 애들을 보면 이질적인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무표정 속에 서린 불안감은 아마도 공국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쉽게 터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농본체제이니 땅이 중요하고, 땅은 옮길 수 없으니 그저 피해가 덜 하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닌 이들, 이를테면 구두 수선공이나 목수와 같은 기술 장인들은 자신들의 도구만 있으면 옮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조촐한 등짐을 지고 마을을 떠나는 게 뭐 어려울까?
“그런데 국경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그 사람들도 결국 남아야 하는 거 처지인 거죠.”
그런 불안감을 담은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결국 주점이었다. 집에 돌아가 봐야 자기보다 더 불안해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 하고, 지켜야 할 가족들 앞에서 하소연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곳은 역시 주점 테이블 뿐이다.
주점은 누가 봐도 술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관에 걸어놓은 램프 아래로 달달한 발효주 향이 주변에 퍼지는데 생각 없던 이들도 향에 이끌려 절로 발길을 돌릴 정도였다.
“여기 들어가도 괜찮나요?”
에밀리아가 주저하는 얼굴로 묻자 얼굴을 씰룩이던 사울른이 대답했다.
“그럼요. 여자를 들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오랜만에 술을 마시게 된 사울른은 주점이 보이기 전부터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소문 청취라는 목적은 아무래도 좋은가 보다.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의 찬 공기가 주도를 나누던 이들의 흥을 깼는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들어오는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이내 눈이 커지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어떤 수군거림인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을 줄 여유도 없다는 듯, 사울른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카운터에서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턱을 움찔거렸다.
“자리 있습니까?”
사내는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고, 사울른의 시선이 그를 따라가니 실내를 가득 메운 주점 구석에 빈 테이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운이 좋군요.”
사내는 사울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잘 나가는 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내의 고갯짓이 이어지고 사울른은 웃으면서 3잔을 부탁했다. 사내는 뒷주머니에 찔러놨던 수건을 꺼내 손을 쓱쓱 닦고는 돌아섰다. 술을 가지러 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사울른이 일행을 끌고 빈 테이블로 향했다.
에밀리아를 안쪽에 앉히고 그 옆에 단유가, 그 맞은편에는 사울른이 앉았다. 단유와 에밀리아는 등을 돌리고 앉고 사울른은 가게 전체를 둘러 볼 수 있는 형태로 앉은 이유는 에밀리아의 수줍음 때문이었다.
“여기 여자는 저뿐인 거 같은데.”
“괜찮아요. 다른 데서는 여자들끼리도 주점에 오던걸요.”
듣고 있던 단유가 입을 열었다.
“불편하면 여관에 먼저 가 있을래요?”
그러자 에밀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딱히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혼자 있으면 무섭기도 하고.”
“그런데 레이디, 혹시 술은 드셔보셨나요?”
에밀리아의 얼굴에 홍조가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조금 난감한 듯 실소를 흘리다 이내 표정을 굳힌 사울른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참에 배우시는 것도 나쁘진 않죠. 사실 술이란 게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면 문제가 있지만,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까지 마시는 건 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요.”
만약 술이 없었다면 군 생활을 못 했을 거라며 너스레를 떠는 사울른의 말에 에밀리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나저나 루치드, 확실히 분위기가 좋지는 않나 봅니다.”
사울른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며 언뜻 듣기에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국경에서 벌어진 일이더군요.”
“아까 정육점에 잠깐 들렀을 때 슬쩍 물어봤는데, 국경을 통해 나가려던 일가족이 몰살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더군요. 에토신스에서 그런 것인지, 공국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냥 소문 아닐까요?”
“소문이더라도 국경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합니다. 경계를 넘기 어렵다는 건 둘째치고, 에토신스가 공국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에토신스가 적대적으로 나서는 경우일 겁니다.”
지금이야 그저 국경을 지키는 수준이지만, 만약 침공전으로 태도를 바꾼다면 이곳도 전화에 휩싸이는 건 시간 문제다.
“에토신스에게는 지금이 국경을 넓힐 기회니까요. 기회를 놓치면 교국에게 모든 것이 넘어갈 테고 그러면 앞으로도 조금 부담스러울 겁니다. 늦지 않게 참전해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는 게 보통 사람들의 판단인데, 에토신스의 윗분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 사내가 술잔 세 개의 손잡이를 굵은 손가락에 꿰어들고 등장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사울른을 묵묵히 바라보자, 사울른이 히죽 웃으며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주인이 사라진 후 다시 대화가 재개되었다. 국경을 뚫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제한이 있으니 좀 더 국경에 접근한 마을에 들러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으윽.”
술을 맛보더니 인상을 쓰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단유와 사울른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에밀리아는 괜찮아요?”
“네? 아, 네.”
사울른은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처음에는 술이 조금 쓸 거예요. 그런데 술이 익숙해지면 술의 참맛을 알게 되죠.”
“그게 뭔데요?”
도대체 이 쓴맛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투로 에밀리아가 묻자 사울른이 대답을 하곤 잔을 들이켰다.
“인생의 맛이죠.”
시간이 흐르고, 인생의 맛을 알기엔 첫술의 독함을 이기지 못한 에밀리아가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할 때, 사울른이 불콰해진 얼굴로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홀짝거리는 단유를 향해 물었다.
“루치드.”
“네.”
“지난번에 말씀하실 때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 그런데, 루치드가 정확히 가려는 곳이 어딘가요?”
단유는 사울른과 처음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특별한 목적지 없이 무사히 국경을 건널 방법에 대해서만 물었고, 사울른은 단유가 두려웠기에 그저 그가 묻는 것에만 정직하게 대답하는 걸 우선했다. 그러나 이제는 짧은 시간이나마 단유와 함께 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희석된 면도 있고, 술기운에 조금 용기 내서 물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울른의 질문에 단유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앞에 놓인 안주에 시선을 두었다.
“불편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아뇨, 불편하진 않아요. 그냥 최근의 일들이 떠올라서요.”
“네?”
처음 이곳에 오게 된 후,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자는 목표로 녹스에 들렀다. 이 땅에서 마법사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단유는 그들을 찾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단유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 의견을 줄 사람은 마법사뿐이니, 단유는 어떻게든 그들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에밀리아, 사울른과 함께 들른 첫 마을에서 오랜 기억 속의 동료였던 게리를 만났고, 몇 시간 전에는 더 오래전에 맺었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단유는 과거 이곳에서 그렇게 활발히 활동한 적이 없었기에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사실 추억이 아니라 잊고 싶을 정도 끔찍하고 괴로운 기억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단유는 이곳에서 자신의 과거를 만난다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할까? 만약 에토신스로 넘어가 라보네의 핏줄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더욱 심란한 마음이 들 테다. 물론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녹스에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이전의 것과 확연히 다르지만, 뜻하지 않게 만나는 과거의 흔적에 단유는 마치 자신이 과거를 쫓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리를 만난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가족사를 연상케하는 게리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렇고.
그래서 사울른의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과연 또 어떤 만남 혹은 이야기가 자신을 기다릴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 혹은 사건들을 떠올리며 생각해보았지만, 별로 생각나는 건 없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어요. 사울른도 알겠지만 전 이곳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유가 물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사울른이 어떤 사람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방법을 쓸 건가요?”
“사람을요?”
“예전에 잃어버린 사람이라든가.”
“흠. 그런 경우라면 ‘추격꾼’을 써야겠죠.”
“추격꾼이요?”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켰다.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을 이었다.
“원래 추격꾼은 달아난 농노를 잡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말이죠. 그러나 요즘은 농노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있어도 큰 성의 성주나 거대 귀족들 정도만이 소유하고 있으니 농노를 잡을 일도 별로 없죠.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 직무를 확장했죠. 노예 뿐만 아니라, 달아난 아내를 찾는 일도 하고, 때로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일도 하죠.”
요컨대 ‘흥신소’ 같은 것이리라. 단유는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런데 사울른은 원래 그렇게 똑똑해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사울른이 벙찐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는 사울른만큼 아는 게 많은 사람이 없던 걸요.”
혹시 학교라도 다녔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학교라는 게 없었으니 그 많은 정보들을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해진 단유였다.
“마···흠흠. 아무튼 루치드 정도나 되는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민망하군요. 저 같은 건 루치드가 알고 있는 것의 반의 반도 되지 않을 건데.”
“서로 분야가 다른 거겠죠. 하지만 먼 나라의 일부터 해서 공국 내의 일까지 모르는 게 없잖아요?”
“그냥 오다가다 듣는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마 이 술집에도 저 정도의 사람들은 한 테이블당 두 명씩은 앉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을 거란 것에 단유는 가진 돈을 모두 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아직 사울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역시 수도에 있는 학자들이 아닐까요?”
“학자요?”
예전에도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된 기억과 역사를 담은 책들을 관리하는 그들이야말로 루치드가 ‘똑똑하다’고 표현하기 적당한 사람들 아닐까 싶네요.”
‘책’이란 단어에 단유의 호기심이 자극됐다.
“그런 책이 있어요?”
“일반 사람들이 읽는 시답잖은 책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들, 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께도 어마어마해서 성인이 두 손으로 들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라는 말도 있고요.”
“수도에 가면 볼 수 있나요?”
“그럴 리가요. 그런 책은 학자들이 연구실 안쪽에 꼭꼭 숨겨두고 꺼내질 않죠. 사실 연구실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장소에 보관을 하고 연구할 때만 들러서 본다는 말이 있더군요. 결국 다 말일 뿐입니다.”
사울른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이런 이야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통 주점에 가면 ‘바드’들이 떠들죠.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면서. 그럼 이미 술이 오른 취객들은 그저 재밌는 이야기라고 귀를 기울이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흉흉해서 바드들도 이런 주점을 찾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빈잔을 들었다 놨다하는 사울른이었다. 단유를 은근히 바라보는 그에게 동전을 쥐어준 뒤,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에밀리아를 데리고 주점을 나왔다.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둠이 찾아온 마을의 거리에는 뒤늦게 집을 찾는 이들의 성근한 발걸음과 망토 자락을 움켜쥐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먼 언덕 위에 떠오른 흐린 달빛만이 전부였다. 요 며칠은 별빛이 너무 밝아서, 조금 과장되게 말해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모처럼 지붕 있는 집에서 잠들게 된 오늘은 달빛마저 흐린 구름에 가려 짙은 어둠의 장막을 하늘에 드리울 모양이다. 어쩌면 내일 새벽에는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우천에 대비한 장비라도 만들어야 할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단유는 정말 자동차 비슷한 거라도 만들게 되는 건 아닐까 상상하며 여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