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69화 (669/956)

미행(5)

-------------- 669/952 --------------

조용한 겨울바람과 사투를 벌이는 모닥불을 지키며 밤을 샌 단유는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많이 피곤하시죠? 잠시 들어가서 쉬세요. 빨리 아침 준비할게요.”

첫날 이후로 에밀리아는 늘 일찍 깨어나려 노력했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따뜻한 수프를 끓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사를 표하며 단유는 이제 막 눈을 뜬 사울른의 곁으로 갔다.

“별일 없었습니까?”

“네. 어제처럼요.”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네요.”

툴툴거리며 단유에게 자신의 담요를 건넨 사울른은 크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죠.”

“그래야죠. 아무튼 오늘 마을에 도착하면 거기서 하루를 보낼 건가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계속 찬 바람 맞으며 노숙하는 게 별로 좋진 않네요. 에밀리아도 많이 힘들 거 같고요.”

“남자도 힘든데 여자라면 더 힘들겠죠. 그래도 대단합니다. 내색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밀리아가 내려간 언덕 쪽을 바라보니, 마침 냄비에 물을 받아들고 올라오는 에밀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물기가 묻은 걸 보니 잠을 쫓기 위해 세수라도 한 모양이었다.

“마을에 가면 우선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녹이고 싶네요.”

“그거 정말 간절합니다. 사실 군대에 있을 때도 마음대로 씻지 못했거든요.”

물을 끓이던 에밀리아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하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며칠을 야영했으니 말은 안 했지만 꽤나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불편함을 속으로 삭이며 강행했던 여행은 오후 즈음에 일단락을 맺었다.

황야를 벗어나 구릉이 반복되는 지형으로 접어들면서 자전거를 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나마도 단유가 잠을 뒤로하고 계속 바람을 불게 하여 힘을 줄이도록 도와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 구릉 넘고 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윽고 풀들이 듬성듬성 자란 구릉이 끝나는 지점에 오른 일행은 언덕의 꼭대기에 멈춰 서서 아래로 펼쳐진 광경을 구경했다. 그리 높지 않은 완만한 구릉들 사이에 펼쳐진 평야 위에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엽서 속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아기자기함이 느껴졌다.

새로운 마을은 이전에 들렀던 곳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일행의 진행방향이 교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더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지만,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중년 남성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을 담은 마을 분위기도 그렇고, 단유네 일행을 바라보는 경계 어린 시선도 그랬다.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천을 둘둘 말아놓은 기둥을 세운 자전거 수레의 기괴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리라. 만약 평소와 같이 천을 펼쳐 놓았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겠지만,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천을 기둥에 감아놓은 상태였다.

“저기가 여관인가 봅니다.”

사울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꽤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2층 건물이고 지붕은 다른 집들과 비슷한 기와식이었다. 이미 녹스에서 견식한 바 있던 유형의 건물이었다. 그래서 딱히 여관으로 인식할 만한 징표가 있나 찾아보니, 다른 곳과 달리 입구에 작은 등이 달려 있었다. 수작업으로 불을 켜고 끌 수 있는, 오래된 가로등 같은 느낌의 등이었다.

“요즘 같은 때에 여행이라니?”

“그럴 일이 있어요. 혹시 방이 없습니까?”

“그럴 리가. 방이야 늘 있죠.”

“그럼 장사를 안 합니까?”

“그럴 리가요. 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그럼 방 주세요.”

“몇 개나?”

사울른과 대화하는 여관 주인은 핑크색 단발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이었다. 눈 아래에 광대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에밀리아는 괜히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두건을 더 눌러쓰고 단유의 등 뒤에서 몸을 가리고 섰다.

사울른은 뒤에서 기다리는 일행을 힐끔 본 뒤 말했다.

“방이 많이 남으면 1인실로 3개 주시구려.”

“1인실은 하루 60쿠퍼요.”

“음? 1인실이 말이오?”

“말했잖소. 요즘 같은 시기. 이 정도면 싼 편 아니오?”

사울른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단유를 바라보았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시오.”

나중에 사울른이 말하길, 원래 숙박비용보다 2배는 비싼 것이라고 말했다. 침대 둘이 들어 있는 방에 식사까지 포함한 비용이 보통 60 내지 70쿠퍼 정도 한다는 사울른의 이야기에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오랜만에 씻은 단유는 개운한 기분으로 1층의 식당칸으로 향했다. 카운터의 왼쪽에 만들어진 식당은 여관 주인의 아내가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에밀리아의 두 배 정도의 큰 몸에 헤진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넉넉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역시 이번에도 사울른이 나섰다. 아직 내려오지 않은 에밀리아의 몫까지 능숙하게 주문을 넣었고, 영업용 미소를 짓던 그녀는 큰 입만큼이나 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려오시기 전에 먼저 와서 주인이랑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사울른은 단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여기는 전선에 먼 편이라 그래도 영향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공국의 현 상황이 워낙 나쁜 편이라 이곳도 많이 뒤숭숭한가 봅니다. 지난 가을에는 정기 상단행 마저 끊어져서 영업하는 가게들도 많이 어려운 사정이고, 일반 가정에서도 가을에 추수한 양곡을 판매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마을에 오기 전에도 중간중간 마을들이 있었지만, 단유와 사울른은 그 마을을 들리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전쟁으로 공국 전체가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게리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재현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축성(築城)된 마을이 있는 경우에는 경비병들이 깐깐하게 조사를 하니 들를 수 없었고, 너무 작은 마을은 들르나마나한 일이기에 적당한 규모에 전선의 영향을 덜 받는 곳을 찾다보니 결국 지난 며칠 간의 고생을 사서 한 셈이다.

마법의 힘이 더해지긴 했으나, 단유와 사울른은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를 이동했고 때문에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 오고 만 것. 차라리 마을을 그냥 통과해서 공국을 벗어나는 방법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작정 이동만 하기에는 사울른도 가진 정보가 제한적이라 마을에 들러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이 마을을 들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오래 머물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가 이 정도 분위기라면 국경 근처의 마을을 가더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더니 여관 주인이 그러더군요. 최근 에토신스 국과의 마찰로 국경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에토신스?”

에토신스는 공국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국가지만 살기 좋은 나라라는 평을 듣는 곳이라고 사울른은 덧붙였다. 전통 있는 왕조가 있지는 않지만, 몇 대에 걸쳐 현명한 왕들이 다스리면서 평화를 유지해 온 나라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교국과의 전쟁 초기 중립을 선언해서 윗분들을 당황케 한 장본인이죠. 원래 공국과의 관계가 꽤 좋은 편이었고 왕래가 잦은 나라였기에 윗분들은 에토신스가 아국을 도울 거라 기대했었죠.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교국이 무슨 짓을 했는지, 교국의 침입과 동시에 중립을 선언해서 꽤 문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몇몇 귀족들은 에토신스를 먼저 벌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하지만···뭐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교국을 돕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랬는데, 최근에 사사로운 시비가 발생했던지 국경 쪽이 꽤 흉흉한 모양입니다.”

이곳의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적당히 걸러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였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그럼 공국을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군요.”

“갑자기 국경수비대의 인원을 늘리지는 않았겠지만, 국경의 수비가 엄격해지면 아무래도 무사히 나가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에밀리아, 그리고 이제는 사울른까지 포함해서, 그들이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고민할 때, 공국 내는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무래도 전쟁 중이기도 하고, 패전이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보니 공국 내에 자리 잡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승리가 확실해보이는 교국으로 가는 선택지를 고른들, 정직하게 교국이 있는 방향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은 전쟁의 영향이 덜한 곳으로 나가서 살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들은 사울른의 안내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어째 여기서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단유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공국만 나서면 괜찮을까요?”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실 이 대륙 내에서 공국이 가장 살기 힘든 곳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곳 외에는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견입니다. 솔직히 저도 공국 외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만, 여기보단 낫겠죠.”

그때쯤 에밀리아가 내려왔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뒤로 동여맨 에밀리아는 한결 산뜻해진 얼굴로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괜찮습니다, 레이디.”

사울른은 에밀리아의 맑은 미소에 히죽 웃는 것으로 반응했다. 에밀리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단유와 사울른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먹고 이야기를 계속 하죠.”

셋은 모처럼 제대로 조리된 음식을 먹게 되어 기쁘다는 듯, 조용히 식사에 몰두했다.

식사를 마치고 에밀리아까지 함께 한 자리에서 한동안 사울른의 역사를 곁들인 지리 강의가 시작되었다. 역사라고 해서 교과서에 나오듯 세세하지는 않았고, 대충 어떤 왕이 이랬다더라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단유에겐 이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에토신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중에 단유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요즘도 가끔 어린 아이들 사이에 거론되는 이야기 중 하나인데, ‘볼레로’라고.”

“아, 저 알아요.”

에밀리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라 생각하며 단유는 사울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가요? 하긴 볼레로에 관한 이야기는 어릴 때 한 번쯤 듣게 되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게 뭐죠?”

단유의 물음에 사울른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아십니까?”

“···조금요.”

“흠, 뭐 아무튼 말입니다. 그 볼레로의 사람들이 바로 에토신스에 있지요. 에토신스의 명문 귀족 중 하나인데, 예전에는 상단을 운영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만, 최근에는 정쟁에 휘말려서 힘을 많이 잃은 고위 귀족이죠. 비록 정계에서의 힘은 많이 약해졌지만, 그들의 핏줄에 흐르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서 전 세계에 희자되고 있는 가문입니다.”

에밀리아가 물었다.

“에토신스에 가면 그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나요?”

“그럴리가요. 그들은 고위 귀족이니 서민들은 그분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힘들죠. 들은 바로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들다고도 하고요. 왕의 앞에 설 때도 얼굴을 천으로 가린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죠.”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지 되게 궁금해요.”

사울른이 에밀리아의 말에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전 그들에 대해 별로 호기심이 가지 않습니다. 신의 축복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그저 이야기일 뿐이고, 딱히 그들이 위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들은 이야기로는 말만 고위 귀족이지 거의 정계에서 밀려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신세라는데, 그게 무슨 축복인가요.”

“그래도 모르죠. 진짜 신의 축복을 받았을지도.”

“제가 보기엔 그저 어떤 귀족의 미화된 가족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리도 단유를 바라보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넌지시 묻는 사울른이었다. 단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볼레로가 사실은 저주이며, 그 저주를 견뎌낸 이만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와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사울른의 말대로, 그건 애들이나 좋아할 ‘야화(野話)’에 불과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