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66화 (666/956)

미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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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른을 둘러싼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든 이들이었고,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절박함도 엿보이는 가운데, 눈 밑이 검은 한 남자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썩 나가라! 나락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가져가서 당장 죽어도 줄 게 없다! 너희 놈들에게 줄 건 단 하나도 없단 말이다!”

“그래, 이놈들아!”

사울른은 자신이 한 짓도 아닌 일에 비난을 받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 뿐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항변한다 해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마법사가 나타났는데, 안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법사가 잔인한 술수를 쓸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단유는 그가 생각하는 위험한 행동을 할 마음이 없었다.

“저기요.”

단유는 씩씩대는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공국군이 여기에 와서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화가 나신 거죠?”

“몰라서 물어? 네놈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저는 공국군이 아니었고, 이 마을에는 처음 온 것이니 모르죠.”

“먹을 걸 빼앗고,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을 희롱하고 구타하는 게 너희 놈들 아니냐!”

“그러니 사람들이 다들 도망을 가는 것이지.”

“벌써 이 마을에서만 10명 이상이 도망을 갔어.”

“산트레티 그 영감은 나이가 많아서 오래 걷기가 힘들다던 양반인데 말이다. 늘그막에 그 노인이 왜 그런 고생을 겪게 만들어! 자기 집 놔두고 도망가게 만들어!”

두서없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억울한 사연 속에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단유에겐 뒤에서 지켜보는 게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단유가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사람들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저희는 여행자입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잠시 들렀을 뿐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누구도 입은 열지 않았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물건을 샀으니, 이제 곧 마을을 나갈 겁니다.”

“그럼 썩 꺼져!”

머리카락은 비록 하얗게 물들었지만, 힘은 넘쳐나는 노인의 목소리가

군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환영받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단유는 사울른을 잡아 등 뒤에 세우고 나서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여러분의 재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이대로 가게 해주세요.”

또 막상 그냥 가겠다고 하니, 찜찜한 기분이라도 느낀 걸까? 선뜻 가라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왜 저렇게 순순히 가겠다고 하는 걸까 의심하는 마음이 사람들 속에서 자라났다. 그 의심의 시선들을 받으며 단유는 마을 사람들 속에 자리 잡은 불신과 경계, 증오와 분노가 단순하지 않다고 여겼다.

단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들에게 심어진 감정. 그 감정이 사울른에게 표출된 것은 단지 공국군으로 의심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방인이며 동시에 약자로 보이는 까닭이 아닐까? 단지 단유가 한 명 더 끼어들었을 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아까 보았던 기세등등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사울른, 가요.”

사울른은 여전히 경계 어린 시선으로,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은 위협적으로 창을 꼬나 들었지만, 앞에서 당당하게 선 단유의 자신감 앞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어했다. 그런 이들을 천천히 훑다가, 뒤에서 훔쳐보는 게리를 향해 말했다.

“게리.”

게리가 깜짝 놀라며 몸을 숨기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단유의 부름에 사람들의 시선이 게리에게 붙은 상황. 단유는 말을 이었다.

“정당한 의심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당한 거짓으로 인해 더 많은 불신과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과장하지 마세요. 불안에 떨게 하지 마세요.”

“거, 거짓말이라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게리, 당신도 나름 피해자겠죠. 그리고 혼자서 많은 고민을 안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부당한 의심의 한 마디가 주위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할 수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게리 대신 단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깡마른 더벅머리의 남성이 버럭 소릴 질렀다. 단유는 고개만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그런 상황 속에서 부당한 이득을 볼 생각을 하지 말란 이야깁니다.”

단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단유의 말이 전하는 속뜻을 이해하려 애를 쓸 때, 단유는 그들을 뒤로하고 사울른과 함께 에밀리아가 기다리는 게리의 집으로 향했다.

수군거리는 노인들 속에서 더벅머리 남성이 게리를 바라보았고, 게리는 미미한 고갯짓을 해 보였다.

한 노인이 말했다.

“저 젊은 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곁에 있던 이가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속고 있다는 말 아닌가?”

더벅머리가 앞에 나서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저자의 말에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저자는 괜한 말로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럼요.”

“그래도 다행이야.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피해 없이 넘어가게 된 것 같으이.”

“그게 다 우리가 나선 탓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저들은 지금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기를 들었기에 미처 본심을 드러낼 기회마저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 파이럴, 자네의 말이 옳아.”

노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마을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을 서로 나누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법사님.”

“그냥 루치드라고 불러요.”

“루치드님. 저들이 선동당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말 그대로예요. 자극적인 단어로 사람들의 생각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거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선동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라고 단유는 배웠다. 비록 어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군중을 통솔하려는 경우에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특별한 워딩을 통해 군중을 통제하려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들의 선동에 부정한 목적이 숨어 있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프로파간다는 범죄나 다름없다.

“일단은 단합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한 단합이겠네요.”

상대를 배척 혹은 적대시하여 ‘우리’를 뭉치게 하는 효과는 선동의 베이스다. 단유가 아는 선동의 사례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로 대표적인 것은 역시 유태인을 공격한 독일의 선동이겠다.

이번에는 ‘공국군’이라는 특정 세력을 지정하고, 사울른을 적시하여 창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거죠.”

사람들은 불안하면 어딘가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힘없고 약한 노인들이 상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창을 드는 요식 행위만으로 그들이 불안을 떨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이번에는 상대가 혼자였으니 여럿이 뭉쳐서 쫓아낼 수 있었지만, 과연 다음에도 이럴 수 있을까? 만약 ‘공국군’이 부대 단위로 오게 된다면 그때도 창을 들고 그들을 쫓을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 성찰로 불안을 잠재우고 평온을 되찾으려는 수도승이 여기 있으리가 없다. 노인들은 무의식적으로든, 혹은 의식적으로든 누군가에게 의지하리라. 그리고 그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고, 만약 그가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면 평상시보다 더 크게 마음이 기울게 될 것이다.

“왜 그런 짓을···.”

사울른이 채 말을 잇기 전에 두 사람은 게리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에밀리아는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린 게리의 손자가 두 사람을 반겼다. 넨과 돌로렌스도 보이지 않아 사울른이 나서서 물었다. 손자는 손가락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때마침 문이 열리며 넨이 나타났다.

“다녀오셨군요. 아, 그쪽 분은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그쪽 분이 드실 양은 남겨뒀는데 챙겨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에밀리아 양은?”

그때 에밀리아가 돌로렌스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사울른. 다 사신 거예요?”

해맑게 웃는 에밀리아에게 사울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쯤에서 단유가 말을 꺼냈다.

“에밀리아, 이제 우리 가야 해요.”

“지금요? 바로?”

“네.”

에밀리아가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이다 옆에 선 돌로렌스에게 눈짓을 하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넨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여행을 다닌다기에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돌로렌스의 옷 중 하나를 입어보도록 했어요. 그런데 게리는요?”

단유와 사울른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마음이 급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저희가 먼저 일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솔직히 넨의 경우는 게리와 오래 생활했으니, 게리의 비밀을 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다. 이미 태도를 정한 마당이니 단유는 선을 그었다.

에밀리아가 다시 자기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게리가 몇 년은 더 늙어버린 듯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단유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지금 가실 겁니까?”

“네.”

“혹시 다시 생각해보실 마음은 없으십니까?”

“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넨은 어쩐지 서먹해진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의아한 마음에 왜 그러냐 물었지만, 두 사람 다 사정을 밝히지 않았다. 게리는 아무 일 없었다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떠난다기에 섭섭해서 그렇다는 말로 속내를 감췄고, 단유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에밀리아가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세 사람이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 게리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마중을 위해 나왔고, 그 자리에서는 단유도 그들에게 대접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인사를 전했다.

“조금 더 넉넉한 사정이었다면 더 잘 해 드릴 텐데 많이 아쉽네요.”

“괜찮습니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단유가 일행의 대표로 인사를 하고, 사울른은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신기한 물건이네요.”

일행이 마을로 올 때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넨과 돌로렌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별거 아니라는 말로 그들의 호기심을 차단한 단유는 에밀리아를 수레에 태운 뒤, 게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 게리를 보다, 단유는 다가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게리.”

“···루치드님.”

“설령 당신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을 벌하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

“게다가 저와 저희 일행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셨죠. 그러니 전 그 식사 한 끼만큼의 보답으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게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눈동자만이 아니라, 그의 주름진 손등과 검은 손톱이 부들부들 떠는 게 보일 정도로 몸을 떨었다. 단유는 그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그렇지만 게리, 이 마을을 나선 이후에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게리가 눈을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자신에 대한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단유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숱 없는 머리카락들을 보다 단유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현관 옆 기둥에 매어져 있는 하얀 천을 힐끔 바라보고 뒤로 돌아섰다.

사울른이 곧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세 사람은 왔던 기로 돌아갔다. 그들을 바라보는 게리의 초점 없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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