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65화 (665/956)

미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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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든 사람들 앞에 선 단유는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 단유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떠오른 게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표정을 감췄다.

‘어떡하지···.’

지난 세월 단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자신감을 얻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저도 가고 싶습니다.”

그들의 제의에 젊은 게리는 뒤도 안 보고 외쳤다. 꿈같은 이야기, 라고 생각했지만, 꿈이 아니라면 당연히 가야만 한다. 가을만 되면 녹스 성 앞 평야를 달리던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의 위용에 얼마나 겁을 먹었던가? 혹시라도 달리던 길을 틀어 녹스 성을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보며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그 뿐인가. 솔직히 게리라고 처음부터 똥수레를 끌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배운 게 없고, 가르쳐주는 이가 없으니 농사는 꿈도 못 꿨고, 텃밭 하나 일굴 땅 한 자락도 가진 적이 없으니 그저 똥수레만 끌었다. 살기 위해 머리를 조아렸고, 살기 위해 비밀을 토설했다.

그런데 축복받은 땅이라고?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눈웃음을 짓는 사내의 눈동자가 빛이 났다.

“그러나 문제가 있어요. 저희는 당신과 같은 죄인은 받지 않아요.”

단유에게는 당시의 일을 비틀어 말했다. 실상 그들이 축복받은 땅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무조건 게리를 받아주겠다는 건 아니었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그 땅을 제대로 일굴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꿀이 넘쳐 흐르는 땅일지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이에게 그저 베풀진 않으니까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가족 단위로 받는 이유가 있어요. 예전에는 당신처럼 혼자인 사람도 받았었지만, 곧 문제가 생기더군요.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몰라요. 오히려 욕심을 부리고 문제를 만들어요.”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막상 땅이 주어지고 풍족함을 누리면서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 매달리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들의 느슨한 마음은 곧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돌림병의 원인이에요. 우린 병의 원인을 알면서 그냥 둘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내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게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증명하세요. 당신이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걸.”

몇 가지 미션을 해결하여 자신의 쓸모를 주장하는 정도의 과제가 아니었다. 과연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엄격한 심사를 거치나 싶어 물었더니, 그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게리도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했다.

****

그들은 게리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증명하도록 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빨라질 수도 혹은 늦어질 수도 있어요.”

게리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내에게서 몇 가지를 배웠다. 그중 하나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법.

“당신은 늘 진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진실을 말해선 안 됩니다. 상대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그는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적당한 진실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화의 방향을 이끌어 상대를 자신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고, 어려웠지만 매력적인 스킬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무기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배운다는 마음에 게리는 많이 들떴다.

“흥분하지 마세요. 언제나 침착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도 타인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와 나의 감정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상대는 나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너무 들뜨지도, 또는 너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여 상대가 어떤 감정이든 적당히 어울릴 수 있게 맞춰야 한다.

“인간이란 의외로 단순합니다. 감정의 괴리만 줄여도 상대는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올 준비를 할 겁니다.”

다음 사내에게 배운 것은 신호였다.

“이 신호를 잘 기억하세요. 당신이 언제 어느 곳에서 신호를 보내더라도, 우리는 당신의 신호를 받을 것입니다.”

“신호는 언제 보내야 하는 거죠?”

“당신이 제 역할을 해냈을 때죠.”

게리는 지역을 할당받았다.

“이 지역 내에서 당신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마세요. 한 곳에서 정착하는 게 다른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좋습니다.”

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내야 저도 갈 수 있는 겁니까?”

“가족을 만드세요. 가족을 만들고, 당신의 책임감이 우리의 목적에 부합된다고 여길 때 당신에게 통과가 허락될 겁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그런 제안을 받고 가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제의를 했던 가족에게서 게리는 거부당했다.

“에이, 그런 곳이 어딨나?”

“정말입니다. 지금도 은밀히 그곳으로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믿어보세요.”

상대는 믿지 않았다.

“난 여기도 만족해. 지금 경작하는 땅도 우리 가족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워낙 날씨가 좋아서 이번 가을에는 풍년일 거라고.”

게리는 실패했고, 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사내가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어요.”

사내는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게리를 다독였다. 그리고 품에서 천으로 둘러싼 무언가를 건넸다.

“뭡니까, 이게?”

“게리.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한 이야기 기억하나요?”

“그럼요. 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밀이 사방에 널리 퍼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랬다간 수많은 세력들, 나라들, 권력자들에게 견제를 받을 수도 있고, 혹은 심한 경계를 받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단순하게는 이민을 원하는 사람을 구하는 활동이 어려워지는 것이고, 좀 더 나가면 불순한 세력으로 지정되어 쫓기거나 혹은 위해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게리에게 말할 때, 제가 그랬죠? 신중하게 제안해야 한다고.”

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을 알면서 지키지 않는 이를 그냥 둘 순 없습니다.”

게리는 핼쓱해진 얼굴로 받아든 물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천을 벗기자 그곳에는 팔뚝만한 길이의 칼이 있었다. 투박한 가죽 칼집을 벗겨내자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해지는 날카로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사내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제가 처리했습니다만, 다음부터는 당신이 직접 해결해야 합니다.”

게리의 손이 덜덜 떨리며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칭칭 감아 맨 가죽띠의 끈적임이 손에 찰싹 와 닿았다.

“신중하게, 그러나 과감하게. 당신의 증명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한동안 게리는 쉽게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실패했을 때 자기 손에 묻혀야 할 피가 두려웠던 탓이었다. 차라리 가지 말자고, 여기서 적당히 일하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퍼뜨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자신을 해할 이유도 없으니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아내의 집에서 하던 농사일을 이어받아 살다 보니 적당히 살만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정말 이대로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때로 흉작이 되어 허기를 채우기 힘들 때나, 아이의 사소한 투정에 짜증이 날 때, 이웃과의 사소한 시비로 불편한 감정 소비를 할 때, 아내의 평범한 잔소리에 괜히 말다툼을 벌일 때면 ‘축복받은 땅’이 떠올랐다.

‘난 행복하지 않아.’

게리는 진정한 행복을 그곳에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들 역시도 그곳에 가면 행복하리라.

그래도 망설이던 중, 전쟁이 터졌다. 그때까지는 얼마나 길어질지 몰랐지만,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이곳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으니까.

그들은 단 한 번도 미션을 이행하라고 촉구하지도 않았고, 게리가 잘 살고 있는지 감시하러 오지도 않았다. 왔었지만 게리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나, 게리는 전혀 낌새를 느낄 수 없었고 그래서 잠깐은 아예 그 일을 떠올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게리는 잠시 고민하다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 바깥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남자를 만났다. 변함없는 눈웃음으로 게리를 바라보는 사내를 보며 게리는 주춤거렸다.

“신호는 일을 성공시켰을 때만 보내달라고 했을 텐데요.”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직도 그게 통하는지 궁금해서···.”

“유효합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이란 단어에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게리는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게리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사내는 그런 게리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된 것 같군요.”

“네.”

상대를 선별하는데 신중을 기했다. 게리가 사는 마을 뿐 아니라 근처 옆 마을에도 들러서 동태를 살피고 과연 함께할 만한 ‘굳은 의지’의 사람들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한 가족을 사내에게 인도하였을 때, 사내는 게리를 칭찬했다.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자세를 원한 거였습니다.”

사내는 웃으며 돌아섰다.

이후 몇몇을 보내는 데 성공했고, 또 몇몇은 어쩔 수 없이 피를 묻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게리에게 주어진 할당량은 무사히 채워져갔고, 그 사이 게리는 늙어갔다. 그러나 게리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축복받은 땅’을 향한 갈망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지막만 남은 상황. 그때 단유가 찾아왔다.

****

“게리, 내가 그곳에 가길 원하나요?”

“그럼요. 루치드님. 어쩌면 당신은 그곳에서 가족을 찾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가족들이 그곳에 갔다면요. 혹시 궁금하시다면 제가 물어봐줄 수 있어요. 그들이 제 요구를 받아준다는 조건이지만, 아마도 그들은 받아줄 거예요. 특히 당신처럼 대단하신 분이 가신다면 그들도 대환영을 할 거니까요.”

“아뇨, 전 가지 않을 거예요.”

“왜요? 그곳은 이곳과 다른 곳이에요. 그곳에는 전쟁도 없고, 오직 풍요로움만 넘쳐나는 곳이라고요. 이웃과 싸울 필요도 없고, 가족들···아, 루치드님은 아직 가족이 없으시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당신이라면 금방 가족을 만드실 겁니다. 그곳에서 행복하게 새 가정을 꾸려서 살아갈 수 있어요. 제가 살아보니 말입니다. 역시 사람은 가정이 있어야 하고, 가정이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당신 말은 틀리지 않아요.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게리, 저는 그래도 가지 않을 거예요.”

“도대체 왜요? 전···.”

도저히 그를 향해 칼을 빼들 수 없는 게리가 고개를 흔들 때, 단유가 말했다.

“행복은 어딜 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게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더 그렇죠. 사람들은 서로 자기 걸 뺏기기 싫어서 살갑던 이웃과도 날을 세워요. 허기를 제때 채우지 못해 가장은 가족에게 미안하기만 한데, 그런 가장을 이해 못 하는 아내는 그저 탓할 뿐이죠. 부모의 곤궁함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투정만 부리니 어디에도 행복은 없어요.”

단유는 완고한 게리의 눈을 바라보다, 문득 바깥의 소란함에 이야기를 멈췄다.

문을 열었더니, 골목 사이로 바쁘게 달아나던 사울른이 보였고 그 뒤를 무기를 든 이들이 쫓고 있었다. 그리하여 단유는 집을 나섰고, 게리는 단유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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