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64화 (664/956)

행복한 도망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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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집에 들렀더니 에밀리아는 여전히 넨, 돌로렌스와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들뜬 얼굴로 단유를 돌아보는 에밀리아에게 잠시 밖에서 일 좀 보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오래 걸리냐고 되물었다. 단유는 게리를 힐끗 보며 답했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그 일만 보고 곧 출발할게요.”

단유의 말에 넨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떠난다고요? 왜요? 좀 더 있다 가시지.”

“더 폐를 끼칠 수 없죠.”

“폐라뇨? 전혀 아니에요. 게리를 도와주신 분인데 저희가 더 잘 대접해드리지 못해 미안한 걸요.”

단유는 미소로 대답한 뒤, 게리와 함께 집을 나섰다.

“게리는 행복하겠어요.”

“저 말입니까?”

게리가 주름진 눈을 크게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넨처럼 마음씨 좋은 아내를 만나서 이렇게 좋은 가정을 꾸렸잖아요?”

게리는 쑥스럽다는 듯, 한 손으로 마른 얼굴을 훔쳐내더니 그대로 눈을 가린 채로 걸으며 대답했다.

“다 루치드님 덕입니다.”

단유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괜한 공허함을 느꼈다.

그때, 거리의 끝에서는 심상찮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

사울른은 잡화점 주인의 이야기를 두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가고 말고는 사울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가 결정하는 것이니까.

구매한 것들을 자루에 몰아넣고 등에 짊어지자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함에 저도 모르게 끙, 신음소리를 냈다.

“수고하시오.”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시게.”

“···알겠소.”

사울른은 몸을 돌려 가게를 나왔다. 등 뒤로 쏘아지는 주인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듬성듬성 박힌 널돌을 밟아 나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썰렁한 거리와 좌우에서 은밀히 쏘아지는 시선들은 변한 것이 없지만,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이럴수록 더욱 침착해야 하는 법이니, 사울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끼익, 조심스럽게 문 여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멈칫한 사울른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

좁지 않은 골목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은 여느 평범한 집과 같은 곳이었다. 게리가 먼저 디딤돌을 밟고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던지, 삐걱거리며 열린 문 안으로 검은 실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게리가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단유는 굳은 얼굴을 하고 집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게리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진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그런 집이었다.

단유는 게리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긴 하지만, 채광창이 그리 넓지 않아 실내는 어두웠다. 이곳 집들이 다 그런 편이니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갈 살펴보기엔 실내가 어두웠다. 그래서 단유는 머리 위로 광원(光源)을 하나 만들어냈다.

“오오.”

게리가 놀라서 탄성을 내질렀지만, 단유는 개의치 않고 주변을 살폈다.

게리의 말마따나 실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빼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집이었다. 차라리 이 집에 사는 이들이 잠시 바깥일을 보러 나갔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다.

“사라진 지 얼마나 됐나요?”

“보름 정도 됐습니다.”

보름이면 꽤 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빈집이었다면, 확실히 수상히 여길 만도 하겠다고 단유는 이해했다. 실내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조악한 식탁 위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린 단유는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살피며 물었다.

“여기 몇 명이 살았나요?”

“5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중년의 부부와 그들이 모시는 할머니, 그리고 자녀 2명. 게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단유는 닫혀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침대 아래에 깔아뒀을 지푸라기들 중 한 뭉치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자주 입는 옷인지 주름진 셔츠가 나무못에 걸려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예전에 자주 봤었던 항아리가 자기 자리인양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나무로 된 뚜껑이 덮여 있었다. 굳이 열어보고 싶진 않았다.

선반에는 몇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는데, 단순한 장식용은 아닐 것이다. 그중 하나를 집었는데 손때 묻은 가죽 주머니였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조사를 위한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주머니를 열었다.

‘애초에 허락 없이 들어온 집이었잖아.’

주머니 안에는 고작 두 개의 동전과 작고 못생긴 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동전은 그렇다 쳐도 돌은 왜 있는 걸까?

“게리. 혹시 이 돌, 뭔지 알아요?”

“글쎄요.”

단유는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돌을 가까이 두고 살폈다.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돌이지만, 무슨 사연이 있어 보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다시 주머니 속에 돌을 집어넣고 해진 가죽끈을 잡아당겨 원래대로 해놓았다.

“여기 보세요.”

게리가 옷장을 열어 보였다. 잿빛 셔츠와 비슷한 색깔의 바지 여러 벌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가지런히 쌓여 있는 걸 보면 집안 살림을 대충하진 않았나 보다.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여기 둔 걸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옆에 둔 농기구들도 다 그대로예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단유의 무미건조한 대답이 게리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시 거실로 나가 주방으로 향한 게리는 추운 날씨 덕분에 아직까지도 상하지 않은 먹을거리들을 단유에게 보여주며, 이 집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에 단유가 좀 더 주목하길 원했다.

그러나 단유는 여전히 무미건조했고, 게리는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혹시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단유는 처음의 방 옆에 붙은 다른 방까지 확인한 다음 돌아서며 대답했다.

“예.”

“정말입니까?”

게리가 정말 놀랐다는 듯 되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신 겁니까?”

“아니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겠네요.”

“뭡니까, 그게?”

“게리 당신은 이 집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죠?”

게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번져갔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유는 게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집 안 곳곳에 눈길을 주며 대답했다.

“사소한 것 하나가 눈에 걸려서요.”

“네?”

되묻는 게리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벽난로를 살폈다.

“여기 벽난로 보이세요? 불을 피운 흔적이 있죠?”

게리가 고장난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다가와 살폈다.

“이건 여기 살던 사람들이 있을 때 피운 거 아닙니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뭘로 불을 땠을까요?”

“그야, 장작으로 때웠겠죠. 보시다시피.”

벽난로 안 숯이 되어버린 장작 몇 덩이를 가리키며 대답하는 게리에게 단유는 물었다.

“그럼 그 장작들은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게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단유가 입을 열었다.

“집 안에는 장작을 쌓아둔 곳이 없어요, 보시다시피. 게리의 집에도 한쪽 벽에 장작을 쌓아두었죠? 왜죠? 바깥에 두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야···.”

“장작이 젖으니까. 장작이 젖지 않게 하려면 위에 천을 덮어 두던지, 혹은 장작을 쌓아두고 보관할 창고를 만들던지, 그도 아니면 집 안에 두겠죠. 또 장작을 밖에 두기 곤란한 이유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가져 갈까봐? 뭐, 아무튼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 오는 동안 봤던 어떤 집에도 바깥에 장작을 두지는 않았더군요.”

게리는 단유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입술 한번 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어디에도 장작이 안 보이네요. 설마 장작을 다 쓴 걸까요? 두 가지가 걸리네요. 한 가지는 지금이 추운 계절이라는 점. 매일매일 불 땔 일이 그치지 않을 판에 이 집에는 장작이 없어요. 또 하나는 장작을 두면 아무래도 그 자리에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여긴 너무 깨끗하죠? 누가 거기만 매일 청소라도 하는 걸까요?”

게리는 단유의 말에 반론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장작이 떨어져서 새로 구해야만 한다든지. 아시다시피 저희 집도 최근에 나무를 할 사람이 없어서 장작을 새로 채워 넣기가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물론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건 단지 끼워 맞추기였어요. 장작은 그저 제 눈에 띈, 일종의 틀린 그림 찾기 같은 거였거든요.”

“틀린 그림 찾기? 그게 뭡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게리에요.”

“저요?”

단유는 게리에게 몸을 돌렸다.

“게리, 이제 솔직하게 말해봐요. 저한테 이 집을 보여준 의도가 뭔가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루치드님이 이전에 가족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마침 저희 마을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고, 혹시 루치드님이 여기서 비슷한 단서를 찾으신다면···.”

“찾는다면?”

“···가족을 찾으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게리. 어쩌면 제가 무리하게 당신을 의심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제 생각을 말해보자면, 당신은 일부러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리고 내가 이들처럼,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향했을 곳으로 쫓아가길 바라는 것 같아요.”

“······.”

“당신이 말했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축복의 땅? 거기로 가길 원하는 건가요?”

“루치드님, 저는 당신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도요. 저는 그저 호의로서 당신을 이곳으로 안내해드린 것 뿐입니다.”

“게리의 말은 9할의 진실을 담고 있어요. 하지만 1할은 감추고 있죠. 그 1할이 저한테는 사소하지만, 당신을 믿기 힘들게 하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루치드.”

“게리.”

단유는 머리 위에 떠돌던 빛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있던 빛이 사라진 탓인지 처음보다 더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그 속에서 게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에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까 전에 게리가 이야기할 때요, 게리는 분명 그 마을에서 도망을 쳤다고 했어요.”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야기가 잘 믿겨 지지 않네요.”

“왜죠? 전 진실만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그들에게 제안하죠.”

“첩자가 있을까 봐 경계한다고 했어요.”

“네.”

“그런데, 첩자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를 게리에게 했어요.”

“그건 저를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였어요. 저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요. 게다가 그 남자는 제가 첩자가 아니란 걸 확인했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게리. 당신이 그들에게 함께 갈 것을 동의하지도 않은 마당에 그들이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너무 조심성 없는 행동 아닐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당신이 마을에서 도망을 쳤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요?”

“······.”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게리, 당신은 너무도 편안하게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요?”

“······.”

“게리, 제 생각을 말해볼까요? 어쩌면 지금까지도 은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그들 무리 중 한 사람이 게리, 당신이 아닐까 생각돼요.”

게리가 눈을 부릅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단유는 게리를 그대로 두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소란이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거리 가운데서 등짐을 진 사울른에게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을 겨누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사울른.”

사울른이 곁눈질로 단유를 살피더니 소리쳤다.

“루치드님! 위험합···.”

사울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봤어! 저 사람도 이 사람과 한패야!”

곧 몇 사람의 창이 단유에게도 향했다.

“이건 무슨 일입니까?”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냐!”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이라뇨?”

“너희 공국놈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단 말이냐! 빌어먹을 놈들!

체격이 왜소하고 꾀죄죄해 보이는, 더벅머리 남성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창을 흔들었다. 주위의 몇 사람은, 그 남성만큼 흥분한 눈으로 조금이라도 헛짓하면 창으로 찌르겠다는 모양새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공국군이 아닙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저 사람이 공국군 복장을 하고 있던 것을 봤어!”

“난···피치 못할 사정으로 군을 나온 사람이오. 더 이상 공국군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 말로 안심시켜놓고 무슨 짓을 할 속셈인 거야! 여기서 더 뺏어갈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뭔가 오해가 있다 싶었다. 그렇지만 오해가 있다 한들, 이렇게 흥분하며 열을 낼까?

“사울른,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뇨,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잡화점에 들러 물건을 사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사람들이 튀어나오더니 저렇게 위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서 일단 도망이라도 치자는 속셈으로 달아났는데, 곳곳에서 사람들이 저 창을 들고 나오니 위험해질 것 같아서 멈춰섰던 참입니다.”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니죠?”

“전혀요.”

단유는 다시 마을 사람들을 살피다, 고개를 돌려 골목 한편에 서 있던 게리를 보았다.

“게리.”

게리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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