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63화 (663/956)

행복한 도망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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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는 그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입꼬리에 묻은 하얀 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질 줄 알았다면 물이라도 한 컵 들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단유는 말없이 게리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 남자의 말에 저는 꽤 놀랐었죠.”

진실을 판가름해낸다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단유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게리가 기억해내지 못한, 혹은 생략해버린 이야기 속에 그 남자가 게리의 진실을 판가름할만한 단서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단유 본인도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상대의 표정과 말투, 미묘한 눈동자의 움직임과 미세한 근육을 관찰하여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게리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제가 첩자가 아니라고 확신을 했고, 그래서 그들은 저에게 함께 갈 것을 제안했죠. 하지만 전 그 마을에 도착한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비록 그들이 날 도왔다지만 전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죠. 녹스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많았죠. 듣기 좋은 말로 뒷통수를 치던 놈들 말이죠. 그런 놈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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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놓고 당신들을 믿을 수 없어요, 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만큼 혹한 제의도 없었다. 시기적절하게도 도망자 신세였던 게리에게 그들의 제안은 당장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간다면 저 혼자 가는 겁니까?”

“혼자라서 무서운가요?”

“무섭다기보다는···사실 조금 꺼려지는 게 사실이니까요.”

게리는 눈웃음을 바라보며 대답했고, 눈웃음은 게리의 말이 거짓되지 않았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히도 이번에 만약 가시길 원하신다면, 대략 5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대충 4, 5명 정도의 사람들이 감시망을 피해 험난한 길을 따라 야행하는 장면을 상상했던 게리였기에 그의 말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실 당신처럼 혼자 건너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움직이거든요. 간혹 범죄자들이 처벌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희는 그런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당신이야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꽤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동행하게 될 겁니다.”

“원래 그렇게 많이들 가나요?”

“이런 건 잘 알려주는 편이 아니지만,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축복받은 땅으로 건너가려 하는 편입니다. 오래전부터요.”

“오래전부터?”

****

게리는 단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 갑작스럽게 생겨났던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그런 일이 있었고, 그 사내의 일도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일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의 어머니 때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일이라고 대답하더군요.”

단유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게리가 전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합리적 의심을 하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게 믿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게리의 이야기를 마저 듣기로 했다.

“그래서요?”

괜히 인신매매가 떠오르기도 하고,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겠냐는 반문이 이어지니 게리는 더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빠진들 지금보다 더할까 싶은 마음이 컸다고 게리는 고백했다. 사실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할 마음은 있었고,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고 편하게 살 수만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무슨 상관일까, 하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

다음 날 날이 밝은 뒤, 집주인을 따라 마을을 구경했는데, 그들의 말처럼 가족 단위로 이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게리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어린아이들도 더러 있어 게리는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게리는 떠나지 않았고, 떠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한 변덕이었다.

집주인과 함께 길을 걷던 중이었다. 집주인이 어느 일행의 인사에 발이 묶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대화에 참여하기 힘들었던 게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집주인을 기다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보수의 흔적이 잔뜩 남은 어느 낡은 집이 눈에 띄었고, 그 앞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아이의 엄마를 보게 되었다.

“나 가기 싫어.”

“왜 또 그러니?”

“거긴 친구 없잖아. 난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거기 가면 새 친구들 많아. 새 친구들이랑 놀면 되잖니?”

“싫어, 나 새 친구는 싫어.”

흔한 아이의 투정이었고, 엄마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를 집 안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주 울음을 터뜨릴 작정인지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었다. 똥수레를 끌고 녹스 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던 장면이기도 했었다.

‘저 나이의 아이들은 정말 억지스럽단 말이지.’

아무리 말로 타일러도 들을 생각을 안 하니, 결국엔 부모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해 손을 치켜들 것, 이라고 게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엄마의 인내심이 바닥까지 치닫진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 가면 매일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매일 매일 놀 수 있을 건데, 가기 싫어?”

그러자 아이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짜 맛있는 거 매일 먹을 수 있어?”

“그럼, 매일 매일 배부르도록 먹을 수 있지.”

게리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첫 번째 이유는 고작 먹을 거에 유인당해 마음이 흔들리는 아이의 단순함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정작 아이 엄마도 가려는 곳이 정확히 어떤지 모르면서 그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모습이 우스웠던 탓이다.

그런데 순간, 게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저 아이랑 내가 다를 게 뭐지?’

물론 저 엄마와 달리 눈웃음짓던 사내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 엄마가 늘어놓는 미사여구와는 궤를 달리한다 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뿐이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도 단 한 번 듣지 못했던 이야기다. 특히 토엔의 경우, 외부와의 거래를 활발히 하던 사람이다. 외부의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토엔이 과연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까? 그리고 철저히 자기 행복을 추구하던 토엔이 그 이야기를 듣고도 가지 않으려 할까?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다. 게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나 저기 저 아이를 설득하는 어머니나 결국엔 저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고작 몇 마디 말에 홀랑 넘어가는 꼴이라니. 제 딴에는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사기를 당해 울분을 터뜨리던 모습을 얼마나 봤던가?

어젯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지만, 그럼에도 교묘한 언변에 마음이 동했던 게 정말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어?

몬스터는 지능이 없다. 그런 놈이 땅을 골라가며 자리 잡는다고? 뭐 그렇다고 치자. 정말 운이 안 좋게도 공국이 몬스터가 살기 좋은 땅이라고 하자. 축복받은 땅?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솔깃하다니. 게다가 자신은 농사를 지은 적도 없고, 짓는 방법도 모른다. 가서 배운다고? 배우면 누가 땅을 공짜로 주기나 할까? 거기서도 소작농이나 한다면 여기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다시 생각하면, 그곳에 간들 좋은 건 하나도 없다. 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어두운 밤 램프 하나에 의지한 채 생각할 때와 밝은 대낮의 태양을 받으며 생각할 때가 다르다. 어제까지는 어디든 녹스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무조건 도망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운을 차리고 태양 아래 서니 생각이 바뀌었다.

‘누가 날 쫓아와?’

눈웃음도 그러지 않았던가? 죄를 지은 게 없다고. 딱히 지은 죄도 없고, 고작해야 심부름한 사실을 토설한 게 다인데, 고작 그 이유로 토엔의 패거리들이 쫓아온다?

‘게다가 걔네들은 모두 경비병에 잡혔잖아?’

잡히지 않은 이들도 자기 살기 바쁠 텐데 무슨 의리로 자신을 잡으러 쫓아온단 말인가? 동전 한 푼 가지지 않은 자신을.

여기까지 생각하니 게리는 더 이상 이 마을에 있기가 싫어졌다. 눈웃음을 짓던 사내는 악마의 하수인같이 느껴졌고, 거리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장님들처럼 보였다.

****

“그 후에 적당한 기회를 틈타 달아났습니다. 또다시 도망자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면서 생각했죠.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자고. 이제는 정말 내 의지대로 살아가 보자고. 그래서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녹스로는 갈 수가 없었고, 북쪽을 떠돌면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같아서 적당히 머물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뜻밖의 여행이 되어버렸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요. 그 여행에서 얻은 게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결국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가정도 꾸리게 된 것이죠.”

긴 이야기의 끝은 그렇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단유는 게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 했는데, 게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말입니다. 축복받은 땅으로 인도하겠노라 꼬시던 사람들이요. 아직도 그들은 활동하고 있더군요.”

게리의 말을 들은 단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여행을 하다 보니 아주 가끔, 한 가족이 갑자기 사라졌다며 수근대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마을의 반 이상이 사라져 집이 텅 비는 경우도 있더군요. 저는 그 일들이 저에게 접근했던 그 눈웃음의 사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을 겪은 마당이니 그런 의심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심은 과거의 것. ‘아직도’라는 표현이 쓰일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며칠 전, 이 마을에도 한 가족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게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듣는 이가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전쟁 중이니까, 그래서 피난을 위해 달아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제게는 그리 가볍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있나요?”

“사실, 예전 예의 그 마을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축복받은 땅으로 갈 때는 가진 것들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그러니까, 당장에 입고 있는 옷이나 몸에 착용해야 하는 몇 가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 두고, 오직 몸만 간다는 뜻입니다. 옷이든, 그릇이든, 돈이든, 뭐든 다 그대로 두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곳의 것들은 모두 저주받은 것들이라 그곳으로 들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단유는 턱 아래를 감싸 쥐며 그러한 조치를 취하도록 한 까닭을 궁리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조치 때문에 더 그 사내를 믿었던 것 같아요. 결코 자신들이 가진 돈이나 재산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고요. 축복받은 땅에 가면 그들이 가졌던 것들을 모두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 나온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집에도 그들의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이야긴가요?”

“그렇습니다. 보통 피난을 한다면 이것저것 싸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집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딱히 정리한 흔적도 없고, 어질러진 흔적도 없이, 정말 몸만 그대로 나간 것 같더군요.”

단유의 머릿속에 빈촌의 어귀에 있던 자신의 집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이곳 시간으로 따지면 너무나 오래된 일이기에 게리가 말한 것과의 연관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그래도 수상한 일이니 한 번은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집이 어디죠?”

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둘은 덤불 뒤에서 나와 다시 집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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