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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62화 (662/956)

행복한 도망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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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센 눈썹을 문지르며 게리는 기억 속에 묻어뒀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저는 많이 겁에 질려 있던 때였습니다. 절 풀어줬던 경비병들이 쫓아올지도 모르고, 혹은 토엔이나 포세의 패거리들이 절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게리의 흐려진 눈동자가 잠시 하늘을 향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계속 북쪽으로, 공국의 끝으로 향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걸었고, 그동안 많이 피폐해져 있었던 때였죠. 그리고 저는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국경 근처의 마을이었죠.”

국경 근처까지 왔다는 자각은 별로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도망치다보니 지친 심신을 달랠 때가 왔고, 마침 보이는 마을로 기어들어간 게리는 마을 어귀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게리는 낯선 집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몰매라도 맞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깼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게리는 기억을 더듬어 그가 어느 누구의 패거리에 속했던 이인지를 알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게리에게 다가와 얼굴을 드러낸 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 집 주인일세.”

“네?”

“사람들이 드나드는 마을 입구에 그렇게 대놓고 쓰러져 있으면 구해달란 소리 아닌가?”

그제야 자신이 쓰러졌단 사실을 자각하고 정신을 차린 게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는데, 집주인이란 사내가 게리의 몸을 눌러 다시 자리에 눕혔다.

“몸이 많이 안 좋네. 그냥 누워있게.”

“죄송합니다.”

“딱히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미안할 거까지야. 그런데 자네는 어디서 왔나?”

주춤대며 대답을 쉽게 못하는 게리를 말없이 바라보는 사내. 게리는 결국 녹스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녹스라고? 남쪽 끝에 있는 곳 아닌가? 말로만 들었던 곳인데.”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게리에게 말했다.

“잠시 누워있게. 내 먹을 거라도 좀 들고 오지.”

괜찮다는 게리의 말에 사내가 혀를 찼다.

“자네 몰골이 어떤지 아는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거의 죽기 직전의 몸일세.”

원래 마른 몸이었던 게리는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도망을 쳤던 탓에 더욱 말라서 이제는 거의 뼈에 살가죽이 간신히 붙어있는 정도로 말라버렸다. 사내는 길에 쓰러져 있는 게리를 보고 시체인 줄로 착각했었다고 말했다.

사내가 먹을 것을 내와 게리에게 주었고, 게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먹었다. 먹으니 조금씩 힘이 생기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좀 낫군. 아무튼 좀 쉬게.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낯선 이를 집에 재워두고도 별로 경계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인지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집을 나갔고, 컴컴한 방 안에서 멍하니 있다 저도 모르게 기절하듯 잠들었다.

게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여전히 어두운 방 안이어서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방문 너머로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고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계속 누워 있기가 힘들어 몸을 일으켰더니 아까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편했다. 그렇지만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무릎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렸다. 잠시 허벅지를 주먹 안쪽으로 두드리며 무릎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다렸지만,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걷는 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게리는 그냥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어 방문을 여는 데까지 성공했다.

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에 있던 두 사람이 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깼는가?”

약간 거친 목소리의 남성이 아까 봤던 집주인이라는 사람일 테다. 램프의 불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니 입술 아래를 거의 뒤덮을 정도의 턱수염과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네.”

생각해보면 구함을 받은 주제에 능청스럽게 주인의 방을 뺏어 잠을 자고 있었던 셈이니 게리는 꽤 부끄럽다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서 깼나 보군.”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여기 와서 앉게. 우린 방금 식사를 마쳤지만, 자네에게 줄 건 남겨두었으니.”

깊이 잠든 거 같아 깨우지 않았다는 집 주인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남아있던 턱이 갸름한 사내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여기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게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더니 사내가 빙긋 웃었다.

“아직 힘이 다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게리는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 대신 민망한 듯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두 초면인지라 마주 앉고서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침묵이 돌던 때에 눈웃음이 입을 열었다.

“녹스에서 왔다고요?”

“···예.”

“거긴 어떤가요?”

“네?”

“듣기로 거긴 꽤 험하고 척박한 곳이라 살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 그냥···살만은 합니다.”

“하긴 사람이 적응을 하면 어디든 못 살까요. 그렇죠?”

“네, 그, 그렇죠.”

“그래, 그럼 지금은 어딜 가는 중인가요?”

“···딱히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래요?”

눈웃음을 짓던 사내의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에 집주인이 쟁반에 먹을 것을 담아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게리를 바라보는데 때문에 게리는 꽤나 불편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상대는 집주인이고 자신은 그저 이방인일 따름이라 뭐라고 항변도 할 수 없어 억지로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기만 했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게리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하겠나?”

게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밥 먹는 내내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가 생각하며 주인의 말을 기다렸다.

“자네 혹시 공국을 떠날 생각은 있는가?”

“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라 게리는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주인은 거친 목소리와 달리 꽤 상냥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공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로 가는 것, 그건 단순히 공국 내에서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새로운 법과 새로운 통치자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바뀌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허용되었던 것들이 어떤 경우에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가장 민감한 세금의 경우도 나라마다 지방마다 다르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옮긴다는 선택을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이방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녹스가 왜 녹스였는가? 갈 곳 없는 이방인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곳이 녹스였고, 그래서 그 난장판을 벌이면서도 견디며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경비병은 있었고,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도 불확실하지만 법이란 게 있었다.

게리는 거기에 맞춰 살았고, 어느 정도는 만족하면서 지냈다. 그래서 굳이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게 두려웠다.

사람이라는 게 참 우습다. 녹스를 떠나 도망칠 때는 누가 쫓아올까봐 무서워서 멀리멀리 달아나겠노라고 그렇게 열심이었건만, 막상 누군가가 더 멀리 가자고 하니 괜히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그거지만, 게리도 아무 생각없이 귀를 닫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듣기로는 공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다른 나라에 가면 절대 편하게 살 수 없다고 그러던데요···.”

게리의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주인이 아닌 눈웃음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국은 일반 서민들이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이죠. 무엇보다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땅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저주를 받아? 게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눈웃음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십니까? 다른 나라에 가면 이 땅에서 나는 것의 배는 풍요롭습니다. 과일이며, 농작물이며 모두 두 배 이상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땅이 저주받은 이유는 바로 몬스터입니다.”

공국 내에 살면서 몬스터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높은 산이나 깊은 숲속에 사는 몬스터를 멀리서라도 한 번은 보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 년에 한 번은 몬스터들이 미쳐서 날뛰는 시기에 그들이 뭉쳐 다니는 것을 보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는 몬스터가 없나요?”

몬스터는 일반 동물보다 강하고 빠르며 영악하기에 전문 사냥꾼들도 쉽게 잡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긴 커녕 오히려 사람을 먹이로 생각해 달려들기 때문에 그놈들에 의한 피해가 적잖이 많은 편이다.

만약 몬스터가 없다면 사람들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며 사람들의 활동 무대는 더욱 넓어졌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몬스터가 있는 곳도 있습니다만, 제가 있던 곳은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몬스터가 접근을 하지 않죠.”

“어떻게요?”

“축복을 받은 곳이거든요.”

램프 불빛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일락말락 눈웃음이 깊어졌다. 게리는 초면인 그의 말을 선뜻 믿기 힘들었다.

“만약 그런 곳이 있었다면 진작 이야기를 들었을 건데, 왜 여태 듣지 못한 거죠?”

“아마도 공국이 최대한 소문이 나지 않게 막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리는 고개를 저었다.

“녹스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요. 만약 그런 나라가 있었다면 일찌감치 소문이 났을 거예요.”

“그들은 보통 죄를 짓거나 해서 도망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제가 있던 곳에는 그런 도망자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죠?”

“축복받은 땅에서 사는 자들은 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죄를 짓는 자가 있어도 그들은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들도 지금 자신들이 머문 땅이 축복의 땅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그곳을 나와 위험이 도사리는 곳으로 목을 들이밀고 싶지 않아 합니다.”

게리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저분의 말씀은 사실이네. 사실 여기 이 마을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출입구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지. 왜냐하면 그곳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거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공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탄압에 몸부림치는지 아는가? 헐벗고 가난한 이들의 아우성을 수도의 위정자들은 전혀 들을 생각을 안 하지. 오히려 자기 배를 채우려고 더 많은 수작들을 부리기만 할 뿐. 그 때문에 고생하는 건 우리 같은 일반 서민들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나누는 동안 소수의 위정자들만이 만족하는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꽤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네. 사람이 줄어들면 당연히 걷히는 세금도 줄어들고, 자기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도 줄어드니까 위정자들은 국경의 수비를 단단히 하고 나라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말일세. 하지만 점점 더 삼엄해지는 탓에 사람들은 쉽게 이 땅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네. 그때 그런 안타까운 사정을 품은 이들을 긍휼히 여긴 분들이 나서게 되었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안전하게 이 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지 위정자들이 이를 막기 위해 첩자를 파견하기 시작했어. 다행히 아직까지는 첩자들에 의한 피해는 없어. 하지만 우리도 더욱 세심하게 살피는 중이지.”

열변을 토하던 집주인의 말을 끈기 있게 들은 게리는 문득 자기 역시 그런 첩자가 아닌지 의심받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저, 저는 첩자가 아닌데요.”

“그런 것 같더군.”

“···너무 쉽게 믿으시는 거 아닌가요?”

“첩자였다면 이분에게 이미 걸렸을 것이네.”

집주인이 여전히 눈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는 사내를 가리켜 말했다.

“이 분은 진실과 거짓을 밝혀내시는 분이니까.”

게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웃음을 바라보았다.

“뭐든 말해보세요.”

눈웃음이 말했다. 막상 말하라고 하니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거리자 눈웃음이 질문했다.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중인가요?”

“어···.”

당황한 게리가 주저하다 소심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무슨 죄를 지었죠?”

“그게···.”

게리는 머리를 긁적이다 녹스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흠,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긴 하네요. 상대 세력에게는 불순한 반동 무리로 낙인 찍혀 있을 테고, 같은 세력에게는 상대에게 조직의 비밀을 털어놓은 배신자로 여겨지겠군요. 게다가 경비병들과의 마찰까지.”

남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들으니 더욱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워졌다. 고작 똥수레나 끌면서 살았는데, 가끔 위에서 시키는 심부름만 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지요?”

눈웃음의 질문에 게리가 고개를 들었다. 소중한 것? 우습게도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똥수레를 끌 때마다 썼던 입가리개였다. 아침에 일을 나갈 때면 입가리개를 꼭 챙겨야 했는데, 다른 동료들이 번갈아 쓰다 보면 냄새가 지독해서 자기 것을 따로 마련해야 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돈을 번 뒤에 가장 먼저 자신의 것을 샀다. 루치드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것도 씻지 않아 냄새가 난다지만, 그래도 게리는 자신만 쓰던 것이라 소중했다. 하지만 딱히 그것을 소중하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감이 있어,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다가 말했다.

“돈이죠, 아무래도.”

눈웃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거짓이군요.”

게리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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