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도망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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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만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던지 조이가 칭얼대기 시작해서 돌로렌스가 조이를 안고 거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돌던 때에 단유가 사울른에게, 먼저 잡화점에 가서 물건 좀 사주면 안 되겠냐고 청했다.
“사울른,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울른은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단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간도 부족하니까요.”
사울른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제로도 시간은 부족하다. 단유와 만났던 그 숲에서 고작 하루 거리이니, 공국군이 마음먹고 추적한다면 얼마든지 쫓아올 수 있다.
“혹시 따로 필요한 건 있나요?”
“아뇨. 사울른이 알아서 사주세요.”
단유는 사울른에게 동전이 담긴 주머니를 통째로 넘겼다. 사울른은 그것도 단유 나름의 자신감이라고 해석했다. 안에 얼마가 들었는진 중요하지 않다.
“알겠습니다. 음···레이디? 혹시 필요하신 거 있나요?”
“저도 괜찮아요, 사울른.”
에밀리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집을 나섰다. 햇볕 아래에 서자마자 사울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40년이라···. 그런데 어떻게 그러게 동안이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의 마법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다른 능력도 능력이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부러운 능력 중 하나다.
‘거 참. 괜히 마음 싱숭생숭해지네.’
사울른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잡화점이 있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집 안에서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루치드님, 저 사람은 공국군 아닙니까?”
“비슷해요.”
지금은 탈영병이지만, 그렇다고 공국군이 아니라고는 못 하지 않을까?
“정말 처음에 저 멀리서 공국군 복장을 한 병사가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랬던지.”
단유는 처음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공국군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나요?”
“처음에는···그냥 그랬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어쨌든 저희는 공국에 속한 백성이니까요. 전쟁이 나면 징집을 당하거나 전쟁 물자를 위한답시고 집집마다 들이닥쳐서 물자를 징발하는 일은 당연한 거니까요.”
게리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운다.
“저 아이, 조이의 아버지도 몇 달 전에 징집이 되었죠. 뭐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은 징집되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이 마을만의 일은 아니겠죠.”
조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인 돌로렌스를 도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농사일이며 마을 일이며 할 거 없이 모두 중단된 상태입니다. 젊은이들이 도맡아 하던 일들을 다 늙어 힘 빠진 늙은이들이 대신하긴 어렵잖아요.”
게리의 말에 넨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찬가지로 힘들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가끔씩 몇 명의 병사들이 칼과 창을 앞세워 들어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집안에 들어와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습니다. 첩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둥, 교국의 선동에 배신한 이는 없는지 찾는다는 둥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넨의 말을 게리가 받아서 이어나갔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놀고 있는 땅이 부지기수인 상황입니다. 소 몇 마리를 키우던 이도 옛적에 모두 뺏겨버린 마당이라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러다보니 모두들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놈들은 우리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우리 것들을 다 뺏어가는 겁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거듭되는 징발에 마을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죠. 게다가···놈들은 마을의 젊은 아낙들을 희롱하기까지 합니다. 남편이 공국군이라는데도 듣는 시늉조차 안 하는 놈들이에요.”
억울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목소리에 분노는 없었다. 단지 체념 섞인 한숨만이 말끝에 묻어날 뿐이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예요. 그 남자, 다시 바깥으로 나왔으니 더욱 궁금하겠죠. 이 집에서는 뭘 가져갔을까? 혹시 우리 집으로 오는 것은 아닐까?”
사울른이 있는 자리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였던 듯 쏟아지는 하소연에 단유는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이였다. 단유라고 딱히 도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리도 뭔갈 도와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돌로렌스가 주방에서 사각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 뒤를 조이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든 채로 졸졸 따라왔다.
“먹을 게 마땅치가 않아서.”
작은 접시에 나눠 먹을 수 있게 준비된 수프는 두 사람이 겨우 먹을 수나 있을까 한 양이었다. 고기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들어가 있는 모양인데, 차라리 고명이라 해야 옳겠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단유는 사양하지 않았다. 일부러 어려운 형편임에도 대접하겠다는 뜻을 그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대접을 받고 보답을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어떤 보답을 해줘야 될까를 고민하며 앞에 놓인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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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거 너무 시선이 따가운데?’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사울른은 쏟아지는 눈길을 참아내느라 진땀이 났다. 앞서서 게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적개심 강한 시선들이 쏟아질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 시선들과 마주보며 아는 척하면 서로 민망해질 것 같아 사울른은 앞만 보며 걸었다. 마치 벌거벗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거리 끝에 있다는 잡화점까지 가는 길은 결코 멀지 않았지만, 왠지 그 길이 이 마을에 오기까지 걸렸던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래봐야 동네 안이고, 결국 사울른은 유일하게 매대를 펼쳐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잡화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매대 위는 거의 텅텅 비다시피 했고, 몇 점의 가죽 제품과 애들 장난감같이 생긴 작은 주머니칼 몇 개가 겨우 자리하고 있었다.
‘그보다 주인은 어디 있지?’
매대는 펼쳐놓고 있으면서 정작 그 물건을 팔 상인이 보이지 않았다. 사울른은 눈을 좁히며 가게 안을 살피다, 은근하게 찔러 들어오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과 달리 모른 척 할 수 없었기에, 사울른은 헛기침을 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여기 물건 좀 사러 왔습니다.”
저기요,를 몇 번 외쳤더니 가게 뒷문이 신음소리를 내듯 힘겹게 삐걱거리더니 머리가 듬성듬성 난 나이든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물건 좀 사러 왔습니다.”
노인은 사울른의 말이 사실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사울른을 바라보았다. 사울른이 허리에 매달아 뒀던 단유의 주머니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정말 사실···겁니까?”
“네. 그런데 먼저 물건 좀 보고 싶은데, 이게 다는 아니죠?”
노인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신경전을 벌일 수만은 없었던지, 결국 가게 뒤편으로 가서 몇 가지를 꺼내왔다.
“우선, 위에 걸칠 망토부터 사고 싶네요.”
자전거를 타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오래 페달을 밟다 보면 절로 열이 나서 더워지긴 하지만, 땀이 식으면 또 금방 추워진다. 그래서 위에 덧대어 입을 두꺼운 망토 하나는 있었으면, 하고 생각은 하던 중이었는데 이 마을에 오고 나서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그리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도 있으면 좀 보여주시구려.”
공국군의 복장은 기본적으로 가죽 경갑이기에 방호의 역할을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방호보다 남들의 시선을 덜 타는 옷으로 갈아입는 게 더 중요했다.
“아, 그리고 조리용 도구도 있습니까?”
에밀리아가 부탁했던 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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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있게 먹었네요. 고맙습니다.”
에밀리아의 인사에 돌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너무 묽지는 않았는지···.”
“아뇨, 괜찮았어요. 정말이에요.”
넨은 흐뭇한 표정으로 에밀리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예의 바름을 마음에 들어했다.
“아가씨는 어려 보이는데, 진짜 어린 거 맞죠?”
“네? 아, 예. 전 진짜 어려요.”
옆에서 듣는 단유의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대화가 오고 갔다. 젊은 데 고생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넨과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에밀리아는 한두 마디를 주고 받다가 돌로렌스까지 끼어서 여자들끼리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 사이 단유와 게리는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
“루치드님.”
“말 놓으시라니까요.”
“그럴 수야 있나요. 그···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어쨌든 루치드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어느 순간부터 주저하는 모습이 보여 혹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싶어서 사울른을 잠시 내보냈던 것인데, 게리는 아예 단유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이었나보다. 결국 식사까지 모두 끝내고 이렇게 따로 나와서야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걸 보니.
“제 기억이 맞다면, 예전에 루치드님을 처음 만났을 때, 루치드님께서는 녹스에 오신 이유가 가족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게리에게서 나왔다. 단유는 놀란 마음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절 구해주신 후, 떠나실 때도 그러셨죠. 가족을 찾으러 간다고. 혹시 그 가족분들 찾으셨습니까?”
단유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이기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후, 게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뭐라도 들으신 게 있으신가요?”
게리는 닫힌 문을 한 번 바라본 뒤, 단유를 끌고 집 뒤로 돌아갔다. 소담하게 가꾼 작은 텃밭들이 있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특별히 심어놓은 것은 없는 듯했다. 게리는 마른 모래로 덮인 텃밭을 지나 덤불 가득한 곳으로 단유를 안내했다. 딱히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위로 사람들이 접근하는지 보면서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게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핀 뒤, 단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말입니다. 제가 녹스를 나와서 공국을 떠돌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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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답니까?”
“······.”
참 깐깐한 노인네, 라고 생각하며 사울른은 단유가 건넨 주머니를 열었다. 자신이 입으려 산 옷은 품에 숨겨둔 비상금으로 산다고 해도, 나머지 것들은 단유의 주머니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비상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허세를 부릴 틈도 없었다.
“여기요.”
적당히 동전을 꺼내 노인에게 건네자, 노인이 정말이냐는 듯 주름진 눈을 활짝 뜨더니 손에 받아든 동전을 헤아렸다. 그리고 사울른을 바라보며 정말 받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물건을 샀으니 당연히 값을 치루는 거죠.”
노인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두려웠던지 겨울나무 가지같이 메마른 손가락으로 동전들을 꽉 움켜쥐고는 빠르게 등 뒤에 숨겨둔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노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
더 이상 살 것도 없었고, 사려 해도 물건이 없었기에 사울른은 수고하시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보시오.”
발을 떼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노인이 사울른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돈이 안 맞습니까?”
“아니오. 돈은 맞소.”
“그럼?”
“공국군 아니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군을 나왔습니다.”
“그럼 충고하나 하겠소.”
갑자기 무슨 충고?
“얼른 이 마을에서 나가시게.”
짐짓 무서운 얼굴을 하는 노인의 말에 사울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이 마을에는 공국군에게 앙심을 품은 이가 많네. 나도 그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라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적어도 자네는 내 가게에서 제값을 내고 물건을 산 사람이니 이렇게 말해주는 걸세.”
사울른은 자신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생각을 잠시 하는가 싶더니 노인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진짜 공국군이라면 말이오, 만약 이 마을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면 다른 공국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걸 감수하고라도 공국군에게 칼을 들이밀 사람이 있다는 말이오?”
설마 그렇게 생각이 짧은 사람이 있겠냐는 투로 물었는데,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소만, 차마 내 입으로는 말하기 어렵네. 당신이 해를 입는 것을 보기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내 이웃이 피를 보는 일도 보기 싫으니까 말해주는 것이오. 설령 당신이 진짜 공국군이라고 하더라도 부디 빠른 시간 내에 마을을 나가주시길 바라네.”
사울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자신의 추리로 풀기 힘든 문제에 부닥쳤을 때 생기는 버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