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도망자(2)
-------------- 660/952 --------------
“혹시나 했어요. 얼굴이 비슷해서.”
게리는 단유의 말에도 쉽게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어떻게, 어떻게’만 거듭 되뇔 뿐이었다.
“누구 아는 사람이에요?”
바로 곁에서 상황을 보던 에밀리아가 물었다.
“혹시 친척?”
“아니요. 예전에 잠깐 같이 일을 했었던 동료에요.”
‘동료’라는 단어에 게리가 왈칵 눈물을 쏟아내며 단유에게 다가갔다.
“정말, 정말 그 루치드가 맞아요? 맞단 말이오?”
단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
게리는 단유의 일행을 데리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낡은 집 안에는 게리와 비슷한 나이로 추정되는 백발의 여성 한 명과 젊은 여자, 그리고 어린 남자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아마도 게리가 집 밖으로 나올 때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다. 램프를 들고 있던 젊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분은 누구신데···.”
그러나 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추하오만 여기 잠시 앉아들 계시오. 돌로렌스. 마실 물이라도 좀 내오겠느냐?”
돌로렌스는 잠시 주저하다 램프를 거실 벽에 걸어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이야. 램프 불은 끄고 창문 좀 열거라.”
“네, 할아버지.”
그러자 할머니가 램프를 향해 다가갔고, 조이는 창문을 열러 총총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곧 바깥의 햇빛이 밀고 들어와 어둠을 걷어냈다.
아직까지 영문을 모르는 에밀리아는 약간의 불안함과 일말의 호기심으로 주변을 살피고, 사울른은 단유와 노인 사이를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단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게리에게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게리.”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루치드 ‘님’이요?”
“뜬금없이 존칭인가요? 그냥 편하게 불러요, 예전처럼.”
“하지만, 어떻게···.”
게리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할 때, 돌로렌스가 물주전자와 컵을 가지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직접 물을 따라 주면서 곁눈질로 일행을 살폈다.
그리고 게리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전혀···변한 게 없네요, 루치드님은.”
자신은 이렇게 늙어서 몸의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빠지는 와중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요.”
굳이 따지자면 당시는 중학생 때였고, 그러니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였다. 물론 게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게리는 늙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그저 뼈만 남은 사람마냥 마르기만 해서 단유가 산짐승을 잡아다가 고기를 해 먹이기도 했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잘 지냈어요?”
지금도 살짝 마른 편이긴 하지만, 그때처럼은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도 이제는 살에 조금 묻혀 있었고, 배도 조금 나온 듯 하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소.”
게리는 숨을 길게 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아직도 가끔 그때 일을 꿈꾸곤 한다오.”
포세 패거리에게 붙잡혀 고문당했던 기억,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고 여기던 그 순간에 단유가 나타나 그의 몸을 완전히 낫게 해주었던 기억.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
“게리, 부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아요.”
게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뜻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 역시 당신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단유는 게리와 함께 수레를 끌며 녹스를 돌아다녔던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남들이 보면 그저 더럽고 험한기만 한 일을 매일 해야 하는 처지에, 게다가 시시때때로 건달패와 맞붙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상황인데도 게리는 늘 쾌활했다. 비록 마지막에는 좋지 못한 일에 엮여 고생을 했던지도 모르지만, 단유의 기억 속에는 마르고 불거진 광대가 높이 솟아오르고 입꼬리를 잔뜩 늘린 게리의 미소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날, 저도 녹스를 떠났습니다. 포세와 토엔이 비록 경비대에게 잡혔지만, 그의 패거리들이 모두 일망타진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솔직히 그때는 그들의 주먹 다툼에 희생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녹스를 빠져나와, 긴 여행을 시작했죠.”
공국을 떠돌다, 결국 정착한 곳이 이 마을이었다고 했다. 게리는 물을 따라서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전 늘 쫓기는 기분이었어요. 매일 밤마다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덩치들이 밀려 들어와 날 붙잡고 고민할 것 같았죠. 그러나 이 마을에서 넨을 만난 뒤부터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들었죠.”
게리의 시선이 백발의 여인에게 살짝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기억도 이제는 많이 흐려졌죠. 똥수레를 끌던 기억도, 토엔의 집 근처에 있던 가게에서 팔던 그 맛있던 빵의 맛도 모두 흐려지고 옅어졌어요. 세월의 힘이겠죠. 그런데 당신, 루치드님에 대한 기억만큼은 여전히 생생해요. 당신은···내 유일한 친구였고, 동료였으며, 구원자였으니까요.”
게리의 이야기를 듣던 모두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옮겨졌다.
“과찬이에요, 게리.”
“루치드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게리가 물었다. 단유는 답을 하지 못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절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때 기억나십니까? 내가 거의 죽기 직전에 당신 앞에 엎드렸을 때, 당신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난 다시 살아났죠. 난 정말 그때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진짜 죽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렇게 살아났고, 그건 당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때의 단유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힘을 구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약이라는 위험한 약물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존재의 힘을 빌려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궁극에 달했을 때나 가능할 일이었다. 만약 지금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이 재현해내는 ‘해체’ 마법의 비밀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고, 바꿔 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의 원리를 파악해내는 것이니, ‘해체’를 넘어 ‘조합’의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물을 만들어내는 힘이니 ‘조합’이지만 실은 ‘창조’의 힘일지도.
묘한 침묵이 집안을 채울 때였다
“당신이셨군요, 게리가 가끔 말하던 사람이.”
그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넨이 입을 열었다. 처음의 불안감은 사라지고 이제는 호기심만 가득한 눈으로 단유를 똑바로 쳐다보는 백발의 여인에게 시선을 던지자, 넨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돌로렌스가 태어나기 전에 당신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넨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린 남자아이, 조이를 앞에 세우고 서 있던 돌로렌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게리는 당신에게 늘 고맙다고 이야기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날 이때까지 살 수 없었을 거라고, 날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과연 루치드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넨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름진 손등을 쓸어 내리며 말을 골랐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게리의 이야기는 무려 40년 전인데 말이죠.”
넨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루치드, 저분의 말이 사실이에요?”
에밀리아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표정으로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음, 어떤 걸 사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와 게리가 함께 똥수레를 끌고 다닌 건 사실이죠. 냄새가 지독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 냄새 때문에 코와 입을 계속 천으로 두르고 다녀야 했는데, 사실 그 천이 더 더러웠죠.”
게리가 단유의 말을 받자, 단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천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는데, 당시 녹스에는 중앙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쓰는 방법밖에 없었고, 그 물도 토엔이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해서 결국 천을 씻을 수 없었죠.”
“그래서 루치드님은 천을 쓰지 않았죠. 난 그것도 신기하네요. 어떻게 그 냄새를 참으며 지낼 수 있었는지 말이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거든요.”
그나마 지구로 돌아가면 몸에 밴 냄새는 사라졌었어 다행이었다.
‘그래도 찝찝한 마음에 매일 샤워를 했었지.’
그때 사울른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흠, 제가 끼어들 자리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요. 루치드. 혹시 그럼 루치드는 나이가 게리보다 많습니까?”
“아뇨, 제가 어릴 걸요?”
겉보기에도 어려 보이긴 하지만,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니니 사울른은 다시 한번 물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루치드는 4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럼, 루치드의 실제 나이는 몇 살이란 말이죠? 혹시···‘그것’으로 어려 보이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까? 아니면 덜 늙게 된다든지?”
“그런 건 없어요, 사울른.”
단유는 이상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지는 것 같아 적당히 대답을 피했다.
“게리, 그럼 여기서 정착하고 사는 건가요?”
“네, 그렇죠. 저기가 제 딸, 돌로렌스, 그리고 저기 저 아이는 제 손자, 조이입니다.”
조이가 조그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바라보다 돌로렌스의 손길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참 좋네요, 게리. 행복해 보여서.”
“그런가요?”
게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제가 이 나이가 되도록 병에 걸린 적이 없어요. 한번은 마을 전체에 심한 열병이 돈 적이 있는데, 넨도 고생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저는 당시에도 나이가 좀 든 편이었지만, 전혀 열병을 앓지 않았죠. 밤새 넨의 간병을 하는 와중에도 전혀 병을 앓지 않아서 사람들이 부러워 했더랬죠.”
“그런가요?”
“그것도 루치드, 당신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설마요. 제가 뭘···.”
문득 생각해보니, 당시 죽어가던 게리를 살리면서 그의 몸을 ‘완전’에 가깝도록 고쳤던 기억이 있다. ‘완전’의 기준은 모호하지만, 그때의 조각난 기억들을 꿰어보면 아마도 게리의 약한 면역력이나 선천적인 질병 따위를 모두 고쳤던 게 아닐까 싶다. 그 후유증(?) 때문에 이후 병에 잘 걸리지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추측일 따름이고, 단유의 의지가 개입된 부분이 아니라서 말을 못하겠다.
옛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게리가 다시 얼굴을 굳히며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말하기 싫어하시는 듯 하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아, 그게.”
단유는 또 한 번 볼을 긁적이다가 이번에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녹스에서 에밀리아와 함께 도망쳤어요.”
‘사랑의 도피’ 따위를 떠올리던 게리에게 단유는 에밀리아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하고 있어서 그것을 도왔고, 그 와중에 공국군에게 걸려 충돌이 있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라고 이야기를 맺었다.
“이야기 중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만, 도저히 궁금한 걸 참을 수 없어서요. 루치드. 녹스 성에는 대공이 지휘하는 군단급 공국군이 있습니다. 그들이 늪을 막고 통제를 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혹시···.”
사울른은 이야기 중에 에밀리아의 얼굴이 검게 변하는 것을 눈치채고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단유가 이왕 이렇게 된 것 밝히자는 심정으로 털어놓았다.
“충돌 과정에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긴 했어요.”
“역시.”
“만약 거기에 사울른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하지만 저도 장담할 순 없겠네요. 제가 무슨 지휘관급도 아닌 마당에 무슨 말이 먹혔겠습니까? 죽을 게 뻔한 자리라도 위에서 시키면 눈 가리고 귀 닫고 달려들어야 하는 게 저희 군의 숙명인 걸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게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계속 달아나는 중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공국을 완전히 벗어나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 필요해서 들렀어요.”
“그렇군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아뇨, 괜찮아요. 전 그냥 게리를 만난 게 반가워서 아는 척 했을 뿐이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당신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더라도 제가 물었을 겁니다.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지만, 그것 빼고는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이니까요. 잠깐 동안은 혹시 루치드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 걸요. 그런데, 루치드 혹시 결혼은 했나요?”
“아뇨, 아직.”
“아.”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있던 에밀리아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탓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