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59화 (659/956)

행복한 도망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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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선택을 했다. 과연 그 선택이 그가 생각한 방향으로 흐를지는 장담할 수 없다. 트란위츠의 선택은 결국 자신의 선택과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마주 서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은 진짜 탈영병이 되었으니 정말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울른은 후회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서 신기한 재주를 보이는 단유를 보면 말이다.

‘세상에···.’

에밀리아는 사울른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울른, 침 흘려요.”

사울른은 다급히 입 주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에밀리아는 신기하지 않아요?”

“신기하죠. 매일 봐도 신기한데. 그래도 사울른처럼은 안 해요. 사울른은 애기 같애.”

글쎄? 불과 얼마 전에 대치상황을 펼치고 신경전을 펼쳤던 상대에게 ‘애기’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다.

‘아, 나만 신경전을 펼친 걸까?’

마법사의 보호를 받는 에밀리아는 별로 두렵지 않았을지도.

그나저나 사람을 향해 마법을 쓸 때와 이렇게 평상시의 마법을 보니 체감되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자신과 동료들을 향해 마법을 쓸 때는 그저 무자비한 공포 그 자체였던 힘이, 지금은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한 능력이다. 마법사를 따르기로 한 결정 때문인지, 자신의 마음이 간사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제작과정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단유는 만들던 것을 마침내 끝냈다. 본래는 더 정밀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대충’ 완료를 시켜버렸다.

단유는 자전거에 수레를 연결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꿀렁거리며 나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본 에밀리아가 놀라움의 탄성을 뱉으며 손뼉을 쳤다. 간신히 입 다물고 보던 사울른은 저도 모르게 다시금 입을 반쯤 벌리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단유는 눈을 크게 뜬 두 사람을 향해 자전거란 물건을 소개했다. 단유의 설명을 들은 에밀리아는 그저 놀랍다는 반응이었지만, 사울른은 자전거를 세밀하게 살피며 작동 원리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길 밟아서 힘을 전달하는 거군요?”

전문 지식 없이 힘의 전달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사울른은 확실히 비범한 남자였다. 단유는 조금 흥미가 붙어서 이것저것 설명했다.

“여기와 여기를 이렇게 만들면 구조학적으로 버티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하중을 잘 견딜 수 있는 거지요.”

사울른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유가 알려주는 그런 ‘사소한’ 지식들을 나중에라도 응용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말이나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사람의 발구름 만으로 수레를 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워서 계속 바라보던 사울른이 단유에게 부탁을 했다.

“저도 이거 한 번 타보면 안 될까요?”

“해 보세요.”

몇 번 넘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고, 사울른은 그 경고를 주의했음에도 처음 타는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아 몇 번 발을 굴리기도 전에 넘어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타길 고집하더니, 결국 익숙하게 원을 그리며 탈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랐다.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에밀리아도 타볼래요?”

에밀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울른이 넘어질 때마다 눈을 찡그리더니, 이미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

단유는 두 사람에게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어쩐지 자기 때문이라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짓는 사울른에게 애초에 옮기려고 했었음을 밝혔다.

“시일이 조금 당겨졌을 뿐이에요.”

사울른은 자신이 자전거를 몰겠다고 자청했다.

“제가 길을 안내해야 하지 않습니까?”

“혼자 힘드실 건데요.”

“괜찮습니다. 원래 하던 일이 걷고 뛰는 일이라 다리 힘에는 자신 있거든요.”

단유는 생각보다 힘들테니 힘들면 말하라고, 그러면 바꿔주겠노라고 이야기했다.

에밀리아를 자전거 뒤에 연결한 작은 수레에 타도록 이끈 뒤, 얼마 안 되던 소지품들을 자루에 담아 건넸다.

“원래는 좀 더 편안하게 탈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는데, 조금 불편해도 참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에밀리아는 단유와 마주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수레가 좋았다. 그러나 막상 마주 앉고 나니 어쩐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게 부끄러워 에밀리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거나 수레의 뒤를 보며 지나온 길들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

“여기 숲을 나간 뒤, 북쪽으로 바로 올라가면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만, 거긴 가기 어렵습니다. 공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거든요.”

지금 같은 때에 그렇지 않은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큰 마을들은 대부분 공국군이 점령하는 반면, 몇 가구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의 경우에는 군이 없는 경우가 있어,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사울른은 설명했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하루 이상을 걸어가면, 작은 시내를 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대략 30가구 정도? 뭐 그 정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필요하신 식량 정도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로 가죠.”

처음에는 그저 신이 났다. 수레를 매달았음에도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찬 바람을 가를 때는 최근에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또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사람의 체력이 무한하지 않고, 비록 수색을 전문으로 하던 군인이었다 해도 적당히 걷고 적당히 쉬는 일을 반복했던 사울른이기에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얼굴과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기 시작했고, 허벅지는 매우 경사진 산을 오르는 것처럼 당겨서 이러다가 근육이 터져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사울른의 몸 위로 증기 기관차 마냥 뿌연 김이 솟아오르자, 단유가 그를 멈추게 했고, 사울른은 차마 사양을 못 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겹게 자전거에서 내렸다. 허벅지를 두드리는 사울른에게 수고했다고 고마움을 표한 뒤 방향만 알려달라고 말했다.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자전거를 몰던 중, 단유는 사울른의 고통을 조금 이해했다. 사실 체력에는 조금 자신 있는 편이기도 했는데, 역시 두 사람을 실은 수레를 끄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단유는 이대로는 오래 가지 못할 거 같아 자전거를 잠시 세웠다.

“왜 그러세요?”

에밀리아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묻기에 단유는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수레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수레를 가볍게 만든들, 두 사람의 몸무게도 만만치 않으니, 수레의 소재는 문제가 아니다. 수레 자체를 가볍게 만들 방법이 있을까?

마침 벌판을 달리던 바람이 단유를 지나며 뜨거운 땀방울을 식혀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세상에.”

고개를 쳐든 사울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기해요.”

에밀리아는 이런 생각을 금방금방 해내고, 또 금방금방 만들어내는 단유가 너무 신기했다.

수레의 양옆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담요로 연결하니, 마치 어선에 달린 사각돛이 수레에 달린 모양새다. 담요보다 더 가볍고 질긴 천이 있다면 좋겠지만, 임시변통으로 쓰기엔 나쁘지 않았다.

물론 돛만 달았다고 해서 수레가 가벼워질 리는 없다. 그러나 단유는 마법사, 특히 바람을 다루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보다 적당할 순 없다.

자전거를 다시 사울른에게 부탁하고, 단유는 수레에 앉아서 바람 마법을 사용했다.

“세상에.”

사울른은―과장이 다분히 섞인 말이지만―수레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며, 흥분 상태로 페달을 밟아 나갔다. 전혀는 아니겠지만, 단유가 적당히 밀어주는 바람 덕에 사울른이 느끼는 무게감도 상당히 줄었다. 만약 돛 역할을 하는 담요가 잘 찢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좀 더 강한 바람을 불게 해서 자전거의 부담을 줄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담요가 약했고 바람을 온전히 담아내지도 못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다들 놀라서 자빠졌을 겁니다!”

사울른은 귀족들이 이 수레를 봤다면 너도나도 사고 싶어 할 거라고 말했다. 단유는 허접한 수레와 완성도 떨어지는 자전거, 보풀이 잔뜩 일어난 담요를 보며 어떤 귀족들이 이런 걸 갖고 싶어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진 않았다. 그보다 자신의 마법을 이용하여 좀 더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어쩌면, 조금 볼품은 없을지언정 풍력을 이용한 자동차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더라도 실용성은 꽝이겠지.’

이 세상에서 오직 단유만이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라니. 실용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테지만 그래도 여유가 된다면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사울른의 말처럼 걸어서 갔다면 하루를 꼬박 걸어야 했겠지만, 첨단의 기술력(?)과 말도 안 되게 사기적인 마법의 도움을 받은 일행은 해가 지기 전에 목표로 했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유는 멀리서 보이는 마을을 보는 순간 빈촌을 떠올렸다. 어쩌면 빈촌보다 더 작은 규모일지도 모르는 그 마을은 녹스 성 내의 벽돌집들과 다르게 목재로 지어진 집들이 듬성 듬성 들어서 있었는데, 그나마 자주 관리를 하는지 딱히 낡았다거나 초라해 보이진 않았다. 그냥 흔한 시골 마을 정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왠지 단유에겐 그 모습이 낯익어서 괜히 불편함이 느껴지는, 그런 마을이었다.

“루치드.”

처음과 달리 여유롭게 페달을 밟던 사울른이 전방을 바라보며 단유를 불렀다.

“네.”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사울른의 말은 자전거와 수레를 그대로 이끌고 들어가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는데, 단유는 딱히 문제가 될 거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긴 조금 신기하게 생겼을 뿐, 마법을 떠올리긴 힘들겠죠.”

이내 수긍한 사울른은 과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다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

“솔직히 말씀드려서, 다 좋은데 엉덩이가 꽤 많이 아프네요.”

자전거에서 내린 사울른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단유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충제로 쓸만한 게 있으면 좀 편할 텐데 아직 적당한 것을 찾지 못해서요.”

“물론 지금도 괜찮습니다. 사실 불만을 가지는 것도 사치죠.”

“불편한 걸 없애려는 노력이 발전을 만드는 겁니다.”

“아, 역시!”

단유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스 성과 많이 다르네요?”

주위를 둘러보던 에밀리아의 감상에 사울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녹스 성이요?”

“아.”

에밀리아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단유의 눈치를 살폈다.

“녹스 성에서 오신 겁니까?”

단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단유의 짤막한 답변에 사울른은 재차 물으려던 걸 참으며 생각했다.

‘녹스 성에는 대공이 이끄는 군단이 있어. 그리고 지금 가는 방향은 녹스 성의 반대. 그렇다면 혹시 쫓기는 중인 걸까?’

단유가 마인, 아니 마법사이니 만큼 일반 사람들이랑 어울려 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라도 정체가 발각되면 감옥행, 혹은 즉결처형식이 벌어지는 게 일반적이니까. 수많은 병사가 자리한 녹스 성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리라.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사울른도 이제는 쫓기는 몸이건만. 오히려 이 무시무시한 마법사 곁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게다가 마법사와 함께 있으니 이런 신기한 물건도 조종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사울른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이네요.”

단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까운 곳의 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초로의 노인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무슨 일로 이 누추한 마을에 오셨습니까?”

그의 시선은 공국군의 복장을 한 사울른에게 머물러 있었다.

“보다시피 이 마을에 젊은 남자는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모두 군으로 끌려가고 남은 것은 늙은 노인네들 뿐이요.”

“아, 모병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워낙 가난한 동네라 징발할 것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중이라.”

“그런 게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는 그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들린 겁니다.”

“여행이요? 이 시국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노인의 시선이 일행을 두루 살폈다. 공국군의 복장을 한 여행자라는 사람과, 커다란 덩치에 망토를 깊이 눌러 쓴 사내, 그리고 요상하게 만들어진 수레에 올라타서는 순진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는 여인.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군에서 온 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르신.”

노인은 깊이 새겨진 이맛살을 문지르며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길을 따라가면 조그만 잡화상이 있소. 조그만 마을을 상대로 하는 가게라 별로 물건이 많진 않지만.”

“고맙습니다, 어르신.”

사울른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사울른이 자전거에 올라타자, 단유는 그냥 걸어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름?”

노인은 단유의 뜬금없는 질문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유가 망토의 후드를 벗자, 노인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눈을 찌푸리고 단유를 바라보던 중, 조금씩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입이 벌어지고 삐뚤삐뚤한 치열이 훤히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노인이 말했다.

“서, 설마? 그, 그럴 리가?”

단유는 재차 물었다.

“혹시 게리 맞아요?”

노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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