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7)
-------------- 658/952 --------------
사울른이 단유의 동태를 살피던 때, 단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에밀리아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에밀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없는 것 같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단유의 말에 에밀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루치드가 걱정인걸요.”
“저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왜 자기를 걱정하냐고 단유가 묻자,
“루치드가 손을 쓸 때마다 눈이 무서워져요.”
무섭다? 무서움과 걱정의 상관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어려워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밀리아가 덧붙여 설명했다.
“지난 며칠 동안 루치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맑은 사람이라는 생각. 루치드가 뭔가를 만들고 있을 때, 얼마나 눈이 반짝였는지 알아요?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루치드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랬어요.”
에밀리아는 뭔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새벽이슬 같은 눈이었어요. 촉촉한 이슬이 아침 해를 머금고 반짝이는 것 같은 눈, 푸른 하늘부터 넓은 대지까지 모두 조그만 이슬에 담긴 것 같은 눈이요.”
그러나 그런 감상을 이야기하는 에밀리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런데 조금 전의 루치드의 눈은 너무 무서웠어요. 칼을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과 똑같은 눈이 되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그래서···그러니까···루치드도 그런 사람들처럼 변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어요.”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눈빛이 달라진다고 하니, 비록 에밀리아가 그런 격언을 모를지라도 손을 쓸 때마다 독해지는 단유의 눈빛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무리 상대가 적이라고 해도, 그들은 사람이고 사람을 죽이려는 의지를 품고 마법을 쓰는 것이니 단유의 눈이 독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단유는 스스로 독해지겠노라 다짐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에밀리아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에밀리아는 꺼내기 힘든 말인지 한참을 머뭇대다 겨우 입을 열었다.
“옆집에 살던 사람들도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조금씩 변하셨어요.”
단유는 에밀리아의 말을 이해했다. 아마도 단유의 행동이 그녀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성선설, 성악설을 공부하긴 했지만,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태어났을 때부터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을까. 맹자나 순자처럼 깊이 고민하지 않은 문제라 답을 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들만큼의 혜안을 갖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두 사람 다 사람은 변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착하게 태어나든, 나쁘게 태어나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이후의 성정이 결정될 수 있다.
마냥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의 길은 아닐 것이다. 설령 남들에게 칭찬을 듣는다 해도 본인의 삶이 힘겹다면 착함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나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꼭 최악의 길은 아닐 것이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좀 받는들 본인의 삶이 행복하다면 과연 나쁘게 사는 것이 문제일까?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행동일지라도,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과연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에게 칭찬을 듣는 행동이더라도,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고통과 불행에 신음을 흘려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변하지 않아요.”
“루치드···.”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에밀리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전 언제나 저 자신만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저의 마음이 동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한 것도 저의 마음이 움직여서 그런 것이고, 저의 적들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 것도 저의 마음이 선택한 것이죠. 전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에밀리아.”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밀리아. 당신은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장 순수한 사람이기도 해요. 그러나 에밀리아, 난 오히려 에밀리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착하고 순수함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라면 그것을 지켜야 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당신의 삶을 힘들게 만들고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치드···.”
에밀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에밀리아. 당신의 말대로 저 사람들은 그냥 보낼게요. 더 이상의 죽음은 저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 대신 우리는 좀 더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할 거예요. 그리고 좀 더 피곤한 여행을 해야 할 겁니다. 당신은 그 여행 때문에 힘들고 지칠 거예요.”
단유는 에밀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에밀리아. 전 당신의 지금 모습을 좋아해요. 그래서 변덕스럽지만 당신이 좀 더 오랫동안 지금의 모습을 지켜가길 바라며 당신을 돕는 거죠.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덜 지치게 도울 거예요.”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을 보다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울른과 눈이 마주쳤다.
“가세요.”
“···네?”
****
사울른은 단유의 말에 난감해졌다.
‘어쩌면 좋지?’
트란위츠가 눈치 없이 사울른에게 속삭였다.
“사울른, 우리도 빨리 달아나요. 마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요.”
“어디로?”
“네? 당연히 부대로 복귀해야죠?”
사울른은 트란위츠를 흘겨본 뒤,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어.”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대로 복귀할 수 없다고.”
“왜요?”
“부대로 복귀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봐.”
“네?”
트란위츠는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대로 복귀하면, 분명히 부대에선 저 마법사를 죽여야 한다고 명령을 내릴 거다.”
“저 마법사를 어떻게 죽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걸 알지만, 윗사람들은 그걸 몰라.”
“설명하면 되죠.”
“설명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냐? 오히려 우리가 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출진할 부대의 선봉에 서야 할 거다.”
“···근데 왜 저 마법사를 죽여야 한다는 겁니까?”
“지금 우린 전쟁 중이다. 그런데 후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를, 게다가 우리 부대원을 여섯이나 도륙한 마법사를 두고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겠냐? 불안해서라도 마법사를 죽이거나 생포하는 작전을 먼저 펼치려 들 거다.”
“서, 설마요.”
“그 설마가 네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거다.”
사울른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개인은 현명하지만, 집단은 우매하다.”
마법사가 했던 말을 입에 올리며 사울른은 눈앞의 마법사란 존재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마법이라는 가공할 만한 힘도 힘이지만, 보이지 않는 통찰력과 지혜도 무시무시한 이다.
“그래도 사울른, 일단은 여기 자리를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단은 여기 이 숲을 벗어난 뒤에 생각해 보죠?”
생각은 여기서 해도 된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거니까. 그리고 그 생각이란 것도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트란위츠.”
“네, 사울른.”
“난 여기 남을 거다.”
“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네 말대로 이 숲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동시에 부대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 말하자면 탈영이다. 그럼 일단 당장은 죽지 않겠지만 평생 쫓기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만약 공국이 교국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멸망한 나라의 탈영병 따위에게 관심 가질 이는 없으니까.
“또 하나는 저기 마법사와 함께 있는 것.”
“그게 왜 방법입니까? 저 마법사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다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순 없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나오는 미친 마법사들과는 다르다고 사울른은 짐작했다. 사실 그보다는 마법사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사울른은 단유를 불렀다.
“마법사님!”
“왜 그러시죠?”
왜 빨리 가지 않고 어물쩍거리냐는 말처럼 들려 사울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여기 남으면 안 될까요?”
“남아요?”
“그러니까, 마법사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절 따른다고요?”
단유는 이건 또 무슨 경운가 싶어 사울른을 바라보았다.
사울른은 솔직하게 털어놓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까 단유와 이야기할 때도 느꼈지만, 그는 입바른 소리나 거짓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러니 괜히 번드르르하게 치장하여 말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사울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단유는 바로 대답했다.
“안 될 거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단유의 대답 역시 짐작했다는 듯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른도 예전 교국이 벌였던 소위 ‘마인 청소’를 알고 있었고, 그때 이후로 마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을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숨어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고. 도망자라면 일행이 많아지는 것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마법사님, 제가 마법사님과 함께 하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부대 이동을 자주 했었습니다.”
사울른은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상관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면 상관들은 권위를 위협받는다 여겨 그를 좌천시키길 여러 번, 결국 전방에서 후방으로까지 밀려 내려온 사울른이다. 후방에서도 가장 힘든 수색 작전조에 속해서 매일 걷고 뛰어야 하는 부대에 속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근방은 물론 주변 여러 지역의 지리를 아주 잘 알지요. 게다가 어느 지역에 정찰 부대가 있는지도 압니다. 다시 말하면, 마법사님이 껄끄러워···하실지도 모를 일들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겁니다. 마법사님도 사실 이런 충돌은 피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오해에서 비롯된 넘겨짚음이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사울른은 단유에게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단유는 정보가 필요하고, 사울른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자 ‘내비게이션’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데다 굳이 일행을 불릴 이유도 없고, 에밀리아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을까요? 루치드?”
에밀리아의 대답에 단유가 정말 괜찮냐고 묻자, 에밀리아는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있으면 루치드가 싸울 일도 피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에밀리아는 그저 루치드가 피를 부르는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단유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기에 그녀를 단순하다고 흉볼 수는 없었다.
“당신은 에밀리아와 달라요. 적어도 당신이 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마법사님의 지시를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도망자가 되는 것보다 마법사를 따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말하는 사울른은, 단유가 보기에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검은 속셈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당장은 그가 말한 장점이 단유가 필요로 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당분간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있는 트란위츠에게 시선을 주니, 트란위츠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사울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난 강요하지 않을 거야. 네 선택이야. 어쩌면 내가 틀렸을 지도 모르니 이대로 군에 복귀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지만 추천하진 않아. 그리고, 네 고향은 여기잖아? 고향 집에 숨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만, 아마도 곧 교국이 쳐들어오면 절대 평온하진 않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여기에 남아서 마법사와 함께 하는 것이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트란위츠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세요.”
사울른의 고향이 이미 교국군에 의해 짓밟혀서 부모의 생사를 모른다는 것과 달리 트란위츠는 멀지 않은 곳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트란위츠는 ‘탈영’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부대에서 고작 탈영병 하나 잡자고 너희 부모님을 들쑤실 거 같아?”
“그래도, 그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래, 그것도 네 선택이니까.”
트란위츠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트란위츠는 주저하다 결국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뒤돌아 달려갔다. 그가 곧 시야에서 사라진 뒤, 사울른은 단유에게 다가갔다.
“사울른이라고 합니다.”
“루치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에밀리아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레이디.”
어떤 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선택을 했고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일찌감치 항복하여 목숨을 구했다.
어떤 이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료를 죽인 자와 함께 할 것을 선택했고, 어떤 이는 불행이 예비된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 돌아갔다.
순수한 여인은 변화를 두려워했고, 이기적인 남자는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의 선택들이 당장은 그저 아무 관련 없는 평행선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에 그 선택들이 만나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 될지, 불행한 일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