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6)
-------------- 657/952 --------------
그때 에밀리아가 단유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왜요?”
“그냥 보내주는 게 어떨까요?”
에밀리아에게 단유는 두 가지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나는 수많은 병사들 앞에서 움츠러들기는커녕 가공할 능력으로 잔인하게 해치우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 며칠 동안 본, 늘 배려하고 다정다감하던 모습이었다. 당연히 후자의 모습이 에밀리아는 좋았고, 되도록 그런 일상이 이어지면서 단유가 누군가를 해치는 잔인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비록 조금 전에 두 사람이 피를 뿌리긴 했지만, 단유의 말대로 ‘정당방위’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되도록 단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적었으면 했다.
하지만 단유는 생각이 달랐다. 단유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피를 묻히긴 싫지만, 굳이 여지를 남겨 후환을 걱정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할까? 막말로 지구였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계속해서 뭔가를 강요하듯 만들어지는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람을 볼 때마다 피의 살육을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니 단유는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단유의 눈치를 보던 사울른은 단유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정확히 캐치했다.
“저, 저기요! 마법사님?”
단유의 시선이 사울른에게로 향하자 사울른의 귀 뒤로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저, 저희는 절대 마법사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약하디약한 이들입니다. 마법사님의 손짓 한 번에 그냥 나가떨어지고 말 이들이란 말입니다. 저희도 목숨 중한 줄 아는데 겁도 없이 마법사님에게 덤비겠습니까?”
사울른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만약 녹스에서 무려 군단급 인원이 단유 한 명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똑같이 말했을까? 단유는 사소한 호기심은 접어두고 입을 열었다.
“당신 한 명이라면,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속한 그곳도 당신처럼 생각할까요?”
“다, 당연하죠! 마인, 아니 마법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에서 구린내가 나는 교국놈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글쎄요.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개인은 현명하나 집단은 우매하다, 고.”
사울른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문득 그 짧은 문장이 꽤 이치에 닿는다고 생각했다. 군에 있다 보니 더욱 그런 상황과 자주 마주치기도 했다. 도저히 저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군은 늘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래도 군에 속한지라 억지로라도 지침에 따라야 했던 적이 많았다.
당장 최근의 공국군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해도 그렇다. 공국의 수장이라는 대공의 목숨이 보존되어야 공국도 유지될 테니 그의 천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공국 내의 대부분 병력들을 후방으로 돌리고, 연줄 없거나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병사들을 최전방에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에서 이길 생각이 없는 것이지.’
만약 자신에게 지휘권이 있었다면, 어차피 전선도 넓어진 마당에 소규모 병력을 운용해서 적들의 진격을 방해하며 시간을 버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녹스 성에 들어가 항전한다는 것은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항복을 하지.
그러나 그런 문제는 차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사울른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책임지고, 마법사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어떻게요?”
“우선, 여기 있는 저 친구들의 입부터 단단히 재갈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이곳에서 마법사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주의시키겠습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단유의 시선이 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누워있는 시체를 향했다. 사울른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몬스터가 나왔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몬스터요?”
사울른은 임시변통으로 ‘몬스터’를 언급했던 것인데, 뱉고 나니 꽤 적절한 변명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네! 마침 지금이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시기라 통할 겁니다. 전쟁 중이라 따로 병력을 빼서 몬스터 사냥을 나갈 수도 없으니, 아마도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사유에 대한 적절한 핑계였고 마법사에게 접근할지도 모를 일을 막는 좋은 변명거리였다.
“그럼 누구라도 쉽게 이 숲에 접근하지 못할 테니, 저희도 목숨을 살리는 길이며 마법사님께도 번거로운 일을 피할 수 있을 핑계가 될 것입니다.”
사울른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눈치만 보고 있던 동료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마, 말 안 하겠습니다. 안 합니다, 안 하고 말고요!”
보기 딱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쩔쩔매는 그 병사는 내버려 두고, 단유는 사울른에게 시선을 계속 던졌다.
“만약 예전의 저였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냥 당신을 풀어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사울른은 단유의 등 뒤에서 눈만 겨우 내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여자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은 단유의 그 말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되는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살려주세요! 제발이요!”
두 손을 뜨겁게 비비며 사정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졌는지 에밀리아가 다시 단유의 옷자락을 끌며 부탁했다.
“루치드. 그냥 돌려보내 주세요. 네?”
단유는 적들의 얼굴을 살피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차갑고 잔혹한 마법사’의 이미지를 만들기엔 충분했던 것 같고, 이 정도면 설령 저들이 돌아가 이르더라도 금방 되돌아오긴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만 벌면, 이미 그때 단유와 에밀리아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단유가 최대한 고심을 거듭해 결국 그들을 살려 보내겠노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뒤쪽 임시 통나무집 근처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잠시 확인을 하고자 고개를 돌리는데, 그곳에서 칼을 빼 들고 달려들려던 이와 눈이 맞았다.
“이런!”
병사가 입술을 깨물더니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그러자 여태 보이지 않던 방향에서 여섯 정도의 인원이 풀숲을 가르며 뛰쳐나와 단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마도 단유가 눈앞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뒤를 치려 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공격에 다급하게 나선 것은 단유가 아닌 사울른이었다.
“안 돼! 하지 마!”
사울른은 그들이 소대장이 데리고 왔던 병력들의 일부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수색한 방향과 다른 방향을 살피기 위해 떠났던 이들이 여태 어디를 쏘아 다니다 왜 저런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의도가 먹힐 리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울른은 동료의 죽음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멈춰!”
그러나 사울른의 외침에 반응한 것은 오직 단 한 사람, 그와 함께 정기 순찰을 다니던 트란위츠 뿐이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여러 방향에서 다 함께 달려들면 결코 저 혼자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왜 여기서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이 단유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공격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 이에게 단유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곧 허공에서 피가 뿌려지고, 당사자들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
트란위츠는 선임병의 명령이란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듯, 달려가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동시에 좌우로 달려나가던 동료가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치열한 칼날의 부딪힘도 없고, 아슬아슬한 신경전이 펼쳐지지도 않았고, 그저 달리다 죽음을 맞이한 동료들, 그리고 그렇게 될 뻔했던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자 트란위츠는 소름이 돋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트란위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울른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칼 내려! 어서!”
트란위츠는 자신이 들고 있는 칼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숲속을 뒤지다가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던 중,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쫓아 왔더니 다른 방향을 수색하러 떠났던 이들과 마주쳤고, 곧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동료과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구해야 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상대는 한 사람. 트란위츠는 잠시나마 왜 저런 기이한 구도가 형성되어 있는지 궁금했지만, 모두의 관심사는 그저 동료들을 구출하는 일이었기에 그도 거기에 동참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고, 자신의 선임병은 자신에게 무기를 놓고 항복하라고 한다.
“뭡니까, 이게?”
사울른은 그저 답답하다는 듯, 칼 내려놔, 라고 반복해서 외쳤다.
‘보면 모르냐? 마인이잖아, 마인!’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그 칼 놔.”
주춤거리며 결국 칼을 바닥에 내려놓은 트란위츠는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버리한 표정을 지으며 선임병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단유도 손을 내렸다. 그리고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자의는 아니지만, 급하게 손을 뻗어 상대를 처리하느라고 옷깃을 잡고 있던 에밀리아의 손길을 뿌리친 것같이 돼버렸다. 에밀리아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은 무서워서일까, 자신의 기대가 저버려졌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난 때문일까?
단유가 에밀리아를 바라보는 틈에 사울른이 슬금슬금 움직여 트란위츠에게 다가갔다.
“사울른···. 이게 무슨···.”
“멍청한 자식아! 내가 평소에 뭐라고 그랬어? 응? 머리는 장식품이냐고? 생각을 해, 이 자식아!”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어딘가 모자란 놈처럼 구는 후임병을 갈구는 사울른. 트란위츠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진짜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말해.”
한숨을 내쉬던 사울른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 마법사다.”
“네? 그게?”
“쉿! 목소리 높이지 마.”
물론 사울른이 트란위츠에게 다가간 것도, 그에게 말을 거는 것도 단유는 알고 있을 것이고, 사울른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려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봐주지 않을까 기대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없는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 수는 없는 일.
“멍청한 놈들. 저런 놈들은 어차피 전장에 나가서도 죽을 놈이야.”
전장에 단유와 같은 괴물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생각 없이 앞으로 달려드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적의 칼날에 쓰러져 전장의 까마귀 밥이 되고 말 운명이다. 사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저 마법사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겠냐고.”
그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 트란위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사울른이 바라보는 사내를 함께 쳐다봤다. 보기엔 그저 평범하게 생긴 청년인데, 말로만 듣던 마인이라니.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이리되면 몬스터라는 핑계도 먹히기 힘들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열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몬스터에게 습격받아 죽을 처지에 이르렀는데, 두세 사람만 몸을 빼서 달아났다? 아무리 생각 없이 구는 상관이라도 이상하게 볼 것이라 판단했다.
‘아이구, 머리야.’
사울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적당한 핑계를 찾으려 노력했다.
“어?”
그때 트란위츠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고, 사울른이 고개를 들었다. 함께 항복했던 무토가 단유의 시선이 에밀리아에게로 간 틈에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저 멍청이가···.’
아마 사울른이 트란위츠에게 가는 것을 단유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본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이 뒤로 빠져서 달아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괜스레 마법사가 말했던 ‘현명한 개인’이라는 말이 모난 자갈처럼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달아나지 말라고 말해야 옳은데, 그 말을 꺼내면 오히려 동료를 고발하는 것만 같아 소리를 지르진 못하고, 그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멈춰, 그만해’라고 뻥긋거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사울른도 예상 못했던 일이 있었다. 무토가 후방으로 완전히 달아나도록 단유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설마 진짜 모르는···?’
그럴 리가 없다. 저 영악한 마법사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집에서 나는 소리까지 듣고 반응했던 이다. 발목까지 자란 풀을 헤치며 걷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그때 단유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사울른에게 단유가 말했다.
“가세요.”
“···네?”
“그냥 가세요.”
사울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