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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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
좀 더 큰 목소리로 에밀리아를 불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겨우 들릴 정도로 ‘여기요’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단유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뭐해요?”
“오, 오지 마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숲의 끝, 두 팔로 겨우 안을 정도의 굵은 나무들이 선 곳에서 에밀리아는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루치드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을 응시하다 피식 웃어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먹을 것 좀 구했어요. 불에 좀 구워야 할 거 같은데, 전 모닥불에 가 있을게요.”
단유가 걸음을 떼려는 순간, 에밀리아의 수줍은 외침이 단유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왜요?”
“그게···저기 거기서 기다려주시면 안 돼요?”
“네?”
“무, 무서워서요.”
단유는 또 한 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가 단유의 고갯짓을 못 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조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서 있을게요.”
그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았다. 단유도 입을 다물고 모닥불 주위로 일렁이는 빛무리를 관찰하고 있자니, 묘한 정적이 주변에 깔렸다.
잠시 후, 에밀리아가 다시 물었다.
“루치드, 거기 있어요?”
“네.”
“내 목소리 크게 들려요?”
“아니요.”
“멀리 가면 안 돼요.”
“네.”
“가까이도 오면 안 돼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문득 어렸을 적 일이 생각났다. 명수가 TV에서 무서운 장면이 나오는 영화 혹은 드라마를 봤던 모양이었다. 밤중에 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유를 흔들었다.
“나 화장실 갈건데.”
“갔다 와.”
“같이 가자.”
단유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는 겨우 입을 열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단 말이야.”
“뭐가?”
“화장실 귀신이 나타나면 어떡해?”
“화장실에 왜 귀신이 있는데?”
“귀신은 어디나 있다고 했단 말이야. 특히 밤에 혼자 화장실 가면 귀신이 나타난다고 했단 말이야. 귀신이 내 머리 붙잡고 흔들면서 내 머리 내놔 한단 말이야.”
그 후로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때쯤, 명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내가? 내가 그랬다고?”
“기억 안나냐?”
“안 나는데?”
나한테 그런 흑역사가 있을 리 없잖아, 라며 시크하게 웃어 보인 뒤 자리를 피하던 명수를 보며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니 보육원 시절에도 되새길만한 추억이란 것이 있긴 했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또래들과의 교우보다 방에 틀어박혀 책만 팠던 시절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명수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깨닫는 일이 종종 있었다.
‘명수야.’
단유는 속으로 나직이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며 지금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날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친구,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시간이 없는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는데, 바로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모닥불 불빛 때문인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에밀리아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서 있었다.
“가요.”
“···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고 느껴져 단유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
새벽이 지나고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 단유는 눈을 떴다. 덮고 있던 망토 위로 살짝 이슬이 맺혀 있었다. 돌아보니 모닥불이 불티만 남기고 사그라든 상태였다. 밤새 꺼지지 않게 관리한다고 했지만 단유도 꽤 피곤했던지라 새벽에 결국 꺼졌던 모양이다.
단유는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에밀리아를 살폈다. 몸을 웅크린 자세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에밀리아는 단유가 가지고 온 담요와 옷가지들을 모두 덮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운건 어쩔 수 없었다.
단유는 마법으로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입자를 재조합시켜 열에너지만 내도록 하는 방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더 많은 실험을 반복하고 데이터를 연구하여 규칙성만 발견한다면 방법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혹시 빛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깨달음(디아포)을 얻는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쉽게 생길 일이 아니지.’
단유는 되지 않을 가능성에 집착하기 보다는 당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덮고 있던 담요를 에밀리아에게 덮어주니 조금 꿈틀거리다 만다. 계속 자는 걸 확인 후, 모닥불을 살려 불을 크게 지펴 주위의 온도를 끌어올렸다.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최선이리라.
이후 단유는 찌뿌둥한 기분도 떨칠 겸, 가볍게 운동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야 헬스클럽을 다니며 운동을 했지만, 그 전에는 맨손 운동만으로 관리를 했던 단유다. 팔굽혀펴기나 스쿼트, 굵은 나뭇가지를 잡고 풀업과 니 레이즈(knee raise)등만 해도 충분히 몸에 열이 올랐다.
에밀리아를 힐끗 본 뒤, 단유는 모닥불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달리기를 하면 에밀리아의 잠을 깨울 것 같아서였다.
‘주변도 살필 겸.’
단유는 가볍게 조깅을 시작했다.
****
에밀리아가 눈을 떴을 때,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에밀리아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숲을 관통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휘파람같은 소리도 몽환적으로 들려, 에밀리아는 자신이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고민했다.
‘그게 다 꿈?’
주먹을 뻗으면 바람이 씽, 하고 날아가 달려오던 험악한 병사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흉, 하고 밀려난다. 얍, 하고 힘을 주면 거대한 성문이 뿅, 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미화시킨다고 해서 에밀리아가 훔쳐본 장면들이 아름답진 않았다.
“눈 감아요.”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에밀리아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호기심에 눈을 뜨면 잔혹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중이었다.
팔이 뜯겨져 비명을 지르는 사람,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바닥을 뒹구는 사람,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두 손으로 막으려 허우적대다 힘이 빠져 정신을 잃는 사람.
그뿐일까.
“죽어라!”
평소에도 거리를 지나가는 것만 보면 가슴이 떨려서 절로 눈을 피하게 되는 병사들이 자신을 노려보며 창칼을 휘두르는데, 악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낄 만큼 악에 찬 그들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에밀리아는 옴짝달싹 못하고 머리가 하얗게 질려 기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에밀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전혀 상황에 맞지 않게 침착하기만 한 굵은 음성이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잠시만 버텨요.”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결국 늪에까지 왔고, 생전 처음 보는 늪의 안개와 그 속에 무엇을 감춘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진녹색의 늪, 회색빛의 마른 사초들과 기괴하게 비틀어진 나무들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의 끝에서 에밀리아는 하나의 목소리를 반복적으로 떠올렸고, 마침내 그 목소리가 지금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겹, 세겹으로 덮여 있던 담요와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스르르 흘러내렸고, 훅 밀려드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에밀리아는 급한 마음에 비명처럼 외쳤다
“루치드!”
“네.”
너무도 자연스럽게, 에밀리아의 절박한 외침이 부끄럽게 여겨질 만큼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에밀리가가 급히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단유였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동물이 축 늘어진 채로 들려있었다.
“일어났어요?”
단유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미 손질을 끝낸 그것을 모닥불 위에 올려 굽기 시작하자, 금방 기름이 배어나와 아래로 떨어지며 여러 송이의 불꽃들을 피워냈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그런 장면에 눈이 가지 않았다.
“없어진 줄 알았어요.”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요?”
도망, 이라는 단어가 눈앞의 남자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에밀리아는 생각했다. 그만큼 엄청난 힘을 가진 남자였고, 오히려 병사들이 도망을 갔더라면 그토록 잔인한 피해를 입진 않았을 것인데.
“앉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지만, 에밀리아의 배는 고기에서 올라오는 향기에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했다. 마치 타이밍이라도 맞춘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에밀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단유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허리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를 들어 컵에 부었다. 도망치는 와중에 여러 가지를 잃어버렸지만, 용케도 이 나무 컵은 자루 한쪽에 박혀 있었던 탓에 잃어버리지 않았다.
“목 좀 축여요. 조금 차가울 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마셔요.”
과연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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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남은 뼈와 살점들은 땅에 묻었다. 생고기를 오래 보관할 방법도 없고, 들고 다닐만한 수단도 없기에 그때그때 먹고 버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상한 고기를 먹으면 안 되잖아요.”
에밀리아는 아깝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요?”
단유는 땅을 발로 밟아 다지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여긴 처음이라서.”
“네?”
“일단 넓은 마을을 찾아보려고요. 그리고 거기서 정보를 좀 얻어야 할 거 같아요. 살만한 곳이 어디 있는지.”
단유는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래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많이 힘들죠?”
“괜찮아요.”
단유는 어렵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에밀리아를 슬쩍 보고 다시 땅을 세게 밟았다. 단단히 다져진 것을 확인 후,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다가 유난히 두꺼운 나무들이 줄지어 선 것을 보며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음, 해볼까?”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에밀리아.”
“네.”
“제가 뭐 좀 만들건데, 기다려줄래요?”
“뭘 만들 건데요?”
“탈 것이요.”
에밀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연장도 없는 여기서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것인지, 그리고 탈 것이라면 또 어떤 것을 말하는지 에밀리아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계획을 세워보았다. 일전에 만들어 본 경험도 있고, 당장에 필요한 도구라면 일단 주머니칼 하나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그걸 만들어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인데, 그때까지 에밀리아가 추위를 피해 있을 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것 역시 눈앞에 있는 것들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만들어 볼걸.’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유난히 피곤했던 탓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겠지만, 단유는 그것이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라도 침착하고 여유롭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야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단유는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을 자처해야 했고, 어제도 심한 탈력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유는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짧게 가진 후, 에밀리아를 위해 우선 임시로 거처할 장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단유는 에밀리아를 불렀다. 에밀리아의 손을 붙잡고 검은 숲 속으로 이끈 단유는 곧 창고같이 생긴 집 앞에 에밀리아를 세웠다.
“여기 안에 들어가요.”
반나절도 되기 전에 이런 구조물을 뚝딱 만들어낸 단유가 신기했던 에밀리아가 빤히 쳐다만 보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다시 한번 안으로 들어가길 청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두 사람이 발 뻗고 누울만한 정도의 네모난 공간이 있고 가운데는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는 화덕이 있었다.
“우와, 집이에요?”
에밀리아의 감탄에 단유는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움집이란 건데, 여기서 추위를 피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바닥에는 어제 오늘 잡았던 동물의 가죽을 깔아놓았는데, 딱히 무두질을 하진 않았지만 바닥의 한기를 막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제가 만들려는 게 조금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그때까지만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괜찮죠?”
“제가 도와드릴 건 없어요?”
“괜찮아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있으면···안 돼요.”
“돼요, 에밀리아. 나중에 에밀리아가 할 일이 많이 생기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요. 지금은요, 그냥 쉬어요. 쉬는 것도 에밀리아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에밀리아가 어떤 마음으로 말을 멈칫거렸는지를 눈치챈 단유는 그녀가 부디 아픈 과거를 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빨리 탈 것을 만들어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야 했다. 멀어질수록 잊는 속도도 빨라지지 않을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