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53화 (653/956)

소실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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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보고를 받으며 대공은 격하게 분노했다.

“놓쳤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대공은 앉아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머리가 하얗게 센 대공이기에 의자가 부서질 걱정보다 그의 손목이 먼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지만, 기사는 나설 때가 아님을 알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사이 옆에 서서 함께 보고를 들었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공. 이대로 그자를 보내면 안 됩니다.”

대공은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기에, 대공은 후작이 여전히 그를 사로잡아 전쟁에 이용할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그자가 우리 군에 피해를 입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기사를 힐끔 쳐다보며 후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자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저는 교국의 기사단을 피해 여기로 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음? 후작은 그에게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단정할 수 없지만, 그자가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 것만 봐도 도망자의 그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아무리···우리 군이 그에게 ‘덜’ 위협적이었다고 해도, 정체가 드러나면 결국 마인이 피해를 보기 마련이니 계속 숨어서 지냈어야 마땅합니다.”

“그건 우리 병사들에게 정체가 발각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오?”

오전에 녹스 남부의 한 주택가에 난데없이 회오리가 나타나 주위를 휩쓸었다는 보고를 받은 대공이었다. 그 당시 주위를 순찰, 감시하던 병사 둘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말까지 들었기에 대공의 추측은 일리가 있었다.

“그 점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마인이 너무 쉽게 정체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은 남습니다. 주변의 가옥을 파괴시켜 시선을 집중시킨 것도 도망자의 술수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 후작의 생각은 무엇이오?”

“제 생각에는, 확실하진 않지만, 어쩌면 우리 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침입한 것이 아닐까···.”

“일부러 말이오? 그건 이해가 되질 않소. 그자가 우리 군을 약화시켜서 무슨 이득을 본단 말이오? 오히려 그 때문에 소문이 나면 더더욱 운신이 어려울 텐데?”

후작은 잠시 말을 고르나 싶더니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단 현재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가 벌인 일을 통해서, 은밀하게 사람을 해하는 마법과 광범위한 범위에 타격을 가하는 마법의 두 가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도망자라면, 굳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북문에서 벌어진 일처럼 다수의 병사들이 그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으로 이 성을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갔어야 옳습니다. 저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일부러 광범위 마법을 사용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일부러?”

“네.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주변 가옥들을 파괴시켜가면서 시선을 집중시켰던 것이 밝혀진 그의 첫 번째 행적이며, 두 번째는 북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북문에서 그는 성 내를 지키는 병사들과 외부에서 그들을 지원하러 달려온 군단을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만들었다. 거의 대부분은 한순간에 절명했고, 더러 어떤 이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북문에서 벌어진 일은 첫 번째 소란의 원인을 짐작케 합니다.”

“계속 말해 보시오.”

“마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다수의 병력을 집중시켜 제압토록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북문에서 다수의 군사가 희생된 것은 이미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그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크게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입니다.”

대공은 후작의 말을 듣고 신음을 흘렸다.

“으흠. 그래도 나는 잘 모르겠소. 굳이 그렇게까지···.”

“대공. 마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벌일 때는 반드시 자신에게 유리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일을 합니다. 반드시 자신에게 불리할 걸 알면서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극히 드물 것입니다.”

“우리 군의 전력을 감쇄시키는 것이 그에게 이익이 있다는 결론이오?”

“그렇습니다.”

“그게 어떤 이익이오? 마인들이 탄압받은 것에 대한 복수?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아니라 교국을 상대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

“대공,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군의 힘이 약해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지. 당장 지금 시점에서 말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교국 밖에 더 있겠소?”

“그것입니다. 교국이 이득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상하지 않소? 만약 교국이 이득을 얻는다 한들, 마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대공, 저희가 오전에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마인을 사로잡아서 무적의 병기로 사용하자는 이야기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했던 생각을 교국이 먼저 했다면···.”

대공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후작을 바라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부동자세로 대기 중이던 기사도 후작의 말에 놀라 입을 벌렸다.

“교국은 이미 지난 마인말살정책에 따라 기사단을 운용한 전력이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누구보다 먼저 마인들을 포섭할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인류에 위협이 되는 마인들을 제거하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마인들을 포섭하는 작전이었을 수도 있는 겁니다. 만약 포섭이 되지 않는 마인들이 있었다면, 정말로 죽였을 테고 그런 마인들만 전 세계에 공개했던 것이겠지요.”

후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없다. 교국의 침략은 공국을 쳐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말이니까.

“대공. 지금 그 마인을 놓쳐버린다면, 그는 이후에 침략자들의 군대 앞에 서서 우리를 다시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승리는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후작이 말을 마치자, 여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가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공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기필코 그자를 처단하겠습니다!”

대공은 무거운 목소리로 기사의 각오에 물음을 던졌다.

“이미 수백의 군사들이 그의 손에 죽었고, 그대도 휘하의 수천 병사들이 아무 것도 못하고 놓친 상황이 아닌가? 어찌 그를 처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번에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기사는 후작을 힐끗 쳐다본 뒤, 조심스럽게 생각을 밝혔다.

“그자는 지금 늪지대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으음?”

“가장 빠른 말을 타도 하루 종일을 가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 해도···그곳은 너무 좁아서 군대를 운용하기 힘들지 않은까?”

기사는 대공의 질문에 쉽게 답을 못하고, 다만 후작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경은 설마···.”

후작이 뭔가 눈치챘다는 듯 입을 떼자, 대공이 물었다.

“무엇이오?”

“경의 입으로 말해 보시게.”

후작이 기다리자, 기사가 각오한 듯 짧은 헛기침을 뱉은 뒤 말을 이었다.

“화공(火攻)입니다.”

“뭐?”

“화시(火矢)를 쏘아 다리를 태우는 것입니다.”

“허, 경은 그 이후는 생각지 않은 것이오? 그리되면 우리 군은 어쩌고? 이대로, 이 좁은 성에서 평생을 지낼 생각이오?”

“대공, 진정하십시오.”

후작이 대공을 말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전장에 나간들 우리가 승리할 확률은 대단히 적습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들여 전력을 키운 뒤 전장으로 출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토레브 경의 말처럼 다리를 태우고 시간을 버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모두 태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죠?”

“물론입니다. 늪지의 다리는 수십 개의 다리들이 짧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몇 개의 다리만 골라 태운다면 나머지 다리들은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늪지대의 정보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나, 교국은 알지 못하니 그들이 다리를 복구하려 해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공은 후작과 기사의 말을 듣고 고심에 빠졌다. 자신의 군대가 약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하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니 그들을 비난할 순 없었다.

“알겠소. ···토레브 경.”

“예, 대공 전하.”

“경을 믿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반드시 그자를 늪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

“에밀리아, 많이 마셔도 돼요.”

“하지만 루치드, 루치드는 안 마셔요?”

“괜찮으니까 마셔요.”

볼이 붉게 상기된 에밀리아는, 단유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겨우 입만 축일 정도로 마시고는 주머니에 마개를 끼웠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많지 않은 물을 혼자 낭비할 수 없었다.

“전 됐어요. 루치드도 조금 마셔요.”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에밀리아처럼 목을 간신히 적실 정도만 물을 들이켰다.

“여기 정말 신기한 곳이에요.”

에밀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난간에 기대어 주위를 둘러보는 에밀리아의 말에 단유도 함께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음습하기만 한, 칙칙한 청록색의 늪과 그걸 닮은 우중충한 안개, 그 위로 간신히 가지를 뻗은 헐벗은 나무들과 비틀린 사초(死草)들을 보면 그저 삭막하기만 한데, 에밀리아에게는 새로운 풍광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봄이 되면 여기도 꽃들이 피나요?”

“잘 모르겠네요.”

설령 꽃이 핀다 해도 썩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일전에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몰라도, 여기서 자라나는 것들은 모두 죽음의 색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에밀리아의 물음에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대며 대답을 피했다. 에밀리아야 녹스에서 나고 자랐으니 조금은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그저 잊어버리고픈 곳이란 생각뿐이었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쉬지 않을 수는 없지만, 마냥 쉴 수는 없었다. 언제 뒤에서 추격자들이 붙을지 모르니까. 웬만하면 이대로 보내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지만, 단유는 그들이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늪이 울리는 느낌을 받은 단유가 걸음을 멈추자, 에밀리아가 물었다.

“왜 그래요?”

단유는 뒤를 돌아 안개에 가려진 다리 저편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낀 에밀리아가 단유의 팔을 붙잡았다. 단유의 옷깃을 잡은 그녀의 손 위로 다른 손을 덮으며 단유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걱정 말아요.”

에밀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안개를 헤치고 사람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외침이 들리고, 뒤이어 여러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요.”

단유가 에밀리아의 손을 잡고 끌면서 뒤를 살폈다. 여차하면 마법으로 다리를 끊어낼 생각까지 하면서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도망간다!”

“쫓아라!”

“서둘러!”

악을 지르듯 내지르는 목소리는 에밀리아를 더욱 위축되게 하였다.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지는 에밀리아. 단유는 얼른 에밀리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입술을 떨며 통증을 참는 모습에 단유는 그녀의 다리를 살폈고, 곧 부어오른 발목을 찾을 수 있었다.

“업힐 수 있겠어요?”

“······.”

에밀리아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딱히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라서 단유는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주저하는 에밀리아에게 두어 번 더 권했더니, 결국 단유의 등에 몸을 기댄다. 단유는 그녀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살폈다. 잠시 지체한 사이에 거리를 상당히 좁힌 적들을 보며, 단유는 혀를 찼다.

‘결국 부셔야겠구나.’

단유는 해체 마법을 사용했다. 곧 폭발이 일어나며 점성 높은 늪의 물방울과 무거운 점토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피해라!”

폭발의 영향으로 그 주변이 뿌옇게 보여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악에 받친 외침만 들릴 뿐이었다. 그사이 더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조준!”

단유는 뜀박질을 하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가 제한되어버린 후방의 어느 지점에서 희끗한 무언가가 보이는 듯 싶었다.

“발사!”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전에 날카롭게 쏘아져 올라간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 화살들이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반대편에서 울렸다. 얼른 살피니, 몇 걸음 앞의 나무 다리에 불꽃이 튀고 곧 커다란 불이 생명을 얻어 몸집을 키우고, 이내 다리를 빠르게 태워가기 시작했다.

단유는 바람 마법을 쓰려 했으나, 다시 하늘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단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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