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50화 (650/956)

심판의 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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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가리고 있던 눈꺼풀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던 단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귀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그 자세로 있던 에밀리아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색을 닮은 짙은 갈색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끝났어요?”

“대충.”

에밀리아는 단유의 등 뒤로 흩어져 있는 파괴의 흔적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차마 고개를 돌려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는지 그저 단유만 바라볼 뿐이었다.

“에밀리아.”

“...네.”

“나랑 같이 떠나요.”

“루치드.”

“여기서는 에밀리아, 계속 힘들 수 있어요. 원치 않는 대접을 받아야 해요. 난 에밀리아가 그런 대우를 받길 원하지 않아요.”

“루치드....”

단유의 이름만 반복해 부르는 건 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탓이리라. 그렇다고 그녀에게 부당한 대우를 교육시켰던 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는 없는 일. 단유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억지를 써서라도 그녀를 이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권리와 존엄성을 갖는다, 는 걸 몇십 년간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며 살아온 단유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 녹스 성에, 아니 이 대륙에 에밀리아처럼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모든 사람을 구제할 생각도 의지도 없지만, 적어도 에밀리아는, 그에게 먼저 조건 없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에밀리아만큼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단유가 약속했던 ‘신세를 갚는 일’일 것이다.

단유는 에밀리아를 끌어세웠다.

“챙길 게 있으면, 그러니까 꼭 필요한 게 있으면 챙겨요.”

“루치드, 나 무서워요.”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에밀리아.”

“그래도....”

“어쩌면 에밀리아, 지금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냥 무섭기만 할지도 몰라요. 나를 믿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밀리아. 내가 약속할게요. 에밀리아를 절대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돕겠어요.”

“행복하게요?”

“더는 당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을 건드리지 않게 해주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서 살 수 있도록 돕겠어요. 당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울게요.”

단유도 결코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귀를 막고 있던 동안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심한 뒤 뱉은 말이었다. 그럴 수밖에. 단유의 약속은 기한이 정해진 게 아니었고, 어쩌면 단유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내가 다시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늦춰지는 결과일지도.’

그렇다 해도 단유는 자신의 말을 무를 수 없었다. 아니 무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를 이곳에 부른 누군가를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이게 당신이 짜놓은 운명의 굴레라면,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진 않을 거야.’

그 첫걸음을 바로 여기, 에밀리아의 손을 잡은 여기서 시작하겠다.

****

결과적으로 에밀리아는 단유의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완전한, 100% 확신을 가진 자기 결정은 아니지만, 단유가 끝까지 보여준 친절함과 따뜻함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에밀리아는 부엌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담요하나를 챙겨가지고 나왔다.

“그게 뭐예요?”

“담요요. 잘 때 필요해요.”

“그거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다른 건 없는데요?”

단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필요하다면 어디서든 사면 된다. 막말로 여기서도 마음만 먹는다면 ‘졸부 흉내’를 내 볼수도 있을 것이다.

에밀리아가 부엌의 조리대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더니, ‘아버지에게 필요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결국 부엌에 있던 조리기구들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라도 하려는지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걸 단유가 막아섰다.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보는 에밀리아에게 단유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인사를 받으실 수 없어요.”

“왜요?”

“.......”

“주무시나요?”

“조용히 나가죠.”

“...네.”

에밀리아는 닫힌 방문을 한 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 단유가 앞장서서 걸으려는데, 에밀리아가 그를 불렀다.

“루치드.”

“네?”

“저기, 손 잡아도 돼요?”

단유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에밀리아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록 그녀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할지언정, 다른 이들에게도 따뜻한 배려를 베풀 마음이 단유는 없었다.

“거기 서라!”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탓인지, 일단의 병사 무리가 흉흉한 기세를 떨치며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이미 회오리는 주변의 집들을 폭삭 주저앉게 만든 뒤 사라진 뒤였고, 그새 달아났던 몇몇 사람들이 용감하게도 다시 돌아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용감하고 오지랖 넓고 입이 가벼운 누군가가 무너진 집에서 나오는 단유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자가 병사들을 해쳤어요!”

고자질을 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던 걸까? 아니면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정체를 밝혀라!”

단유가 에밀리아를 등 뒤에 세우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한 병사가 소리쳤다.

“저자의 정체를 아는 자가 있느냐?”

“근방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뭐? 너 어디 사는 누구냐? 혹시, 간자인 것이냐?”

단유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칼로 위협하는 병사를 무시하고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들 중 누군가는 무고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정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바르게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무고함의 기준이 무슨 소용이며, 무법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에서 법 없이 산다는 게 다 무슨 의미겠는가?

무기를 들고 위협하는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선임 병사로 추정되는 이가 주위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네!”

병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창을 겨눈 채로 경계심 없이 다가왔다. 단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에밀리아가 그의 손을 강하게 쥐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한 단유는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순간 바람의 칼날이 그들이 들고 있던 창을 반 토막 내며 지나갔다. 그들은 자신의 발밑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창을 바라보고, 반쪽짜리 창을 쥐고 있던 손을 바라보고, 단유를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방금 벌어진 일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유는 친절한 설명 대신 짤막한 한 마디를 건넸다.

“비켜요.”

그리고 이해 못 하고 있을 몇 사람을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에는 당신들의 목이 그렇게 될 겁니다.”

섬뜩한 협박에 병사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

“뭣들 하는 거야! 사술(邪術)이다! 속임수야! 한꺼번에 달려들어!”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이런 말을 떠올릴 것이다.

“당신이 와 봐요.”

단유의 나직한 한 마디에 명령을 내리던 병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단유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병사들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도 단유의 시선이 머무를 때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단유는 땀이 흥건한 에밀리아의 손을 다시 한번 고쳐 잡으며 안심해도 된다는 뜻을 전했다.

대로변까지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가니, 단유 주위로 큰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 원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끊임없이 귀를 간지럽혔다. 개중에 에밀리아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좋지 못한 단어를 던지는 이들은 단유가 고개를 돌려 바라봐 주었다. 그러면 그는 이내 입을 꾹 닫고 무리 뒤쪽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이상한 전진과 후퇴는 새로운 증원 병력이 도착함으로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단유는 새로 길을 막는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이가 지난번 가죽 공방 앞에서 봤던 사람임을 떠올렸다. 거만하고 안하무인이던 기사. 과연 그는 단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뭣들 하는 거야?”

“저자가....”

기존에 대치하던 병들 중 한 명이 간략하게 브리핑을 하자, 기사는 발을 내질러 그의 배를 걷어찼다.

“뭐라고 횡설수설 대는 거야? 대낮부터 술이라도 처한 거야, 뭐야?”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명령을 내렸다.

“잡아.”

기사의 뒤에 도열해 있던 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단유는 빈손을 들어 그들을 향해 내저었다. 그리고 마법같이, 실제로 그랬지만, 회오리가 생겨나 그들에게 맞섰다. 바닥의 흙먼지를 모두 빨아들여 거대한 형태를 만들어낸 회오리는 주춤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고, 곧 비명까지 집어삼키며 그들을 공중으로 밀어 올렸다. 무거운 병사들을 들어 올릴 정도로 강한 회오리는 그 원심력으로 병사들을 멀리까지 던져버렸고, 바닥에 부딪히며 들고 있던 무기까지 놓친 이들은 죽은 생선마냥 팔딱거리다 정신을 잃었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떨어지는 병사를 피해 물러서던 기사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서, 설마!”

굉음을 내며 주위를 초토화시킬 듯 휘돌던 회오리바람이 조금씩 힘을 잃더니, 먼지구름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바람에 구름이 완전히 걷힐 때까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병사들은 곧 단유가 서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묵직한 칼을 들고 경계를 하던 기사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모두 흩어져서 그자를 찾아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무려 바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던 무시무시한 자였지만, 상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조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사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너는 당장 근위대장을 찾아가 ‘마인’을 발견했다고 보고하라.”

“마인, 입니까?”

“그래. 그리고 너희는 각자 성문으로 달려가서 성문을 봉쇄하라 일러라. 이 시간부로 누구도 녹스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빠져나갔을지도....”

한 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는 칼을 휘둘렀다. 병사가 움찔거리기도 전에 병사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목이 잘리진 않았다. 그저 한줄기 혈선만 남겼을 뿐이다. 파랗게 질린 얼굴의 병사가 목을 더듬고 있을 때 기사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놈은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빨리 움직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머리라면 아예 여기에 떼놓고 가든지.”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칼날이 향하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 각 성문으로 달려갔다.

기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한때 대륙의 공적으로 지목받았던 마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 그것도 마지막 전투를 벼르고 있던 이 도시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었다. 그를 이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자신은 없다. 단, 1대 1의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약간(?)의 희생만 감수한다면, 마인이라도 잡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지난 과거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를 잡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녀석은 여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여자는 마인의 약점인 게 분명했다. 약점을 틀어쥔다면, 아무리 경천동지할 능력을 가진 이라도 약해질 수밖에 없고, 약해진 그를 이용한다면, 그의 힘은 곧,

‘내 것이다.’

기사는 자신의 얄팍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대신 희생을 감수할 병사들을 더 모집코자 서둘렀다.

****

상황이 어수선할 때 몸을 피했던 단유는 여전히 에밀리아의 손을 잡은 채로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조금 더 빨리 서둘러야 병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이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에밀리아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손을 쓰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착한 척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참이 아닌가?

단유는 에밀리아를 보며 힘드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무서워요?”

“...조금요.”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요.”

단유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있던 에밀리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디 그 미소가 안심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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