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49화 (649/956)

심판의 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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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때, 열린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낯선 얼굴의 중년인이 나타나 소리를 질렀다. 바닥이 무너질 정도로 쿵쿵거리며 걸어온 사내는 거실 바닥에서 뒹굴며 신음을 흘리는 사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베루센! 무, 무슨 일이야!”

그는 에밀리아와 단유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황급히 베루센에게로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아빠, 다리...다리가 아파.”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며 울먹이는 그의 말을 용케 들었는지, 사내는 베루센의 다리를 보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피를 이렇게 흘리다니.... 누가, 누가 그랬어?”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제야 단유와 에밀리아를 본 모양이었다.

“넌 누구야?”

단유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사내는 에밀리아를 추궁하듯 큰 소리로 몰아붙였다.

“에밀리아! 너냐? 너가 이런 거냐?”

“아, 아니에요.”

에밀리아는 단유가 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둘러쓴 망토만 세게 움켜쥘 뿐이었다.

“제가 그랬어요.”

“너,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내 아들을 이 꼴로 만든 것이야?”

사내는 에밀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설마 저런 년 때문에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냐?”

분노에 찬 사내의 음성은 더욱 커졌다.

“감히 저런 창녀 때문에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냐고?”

“누가 창녀랍니까?”

“누구긴 누구야? 니가 잡고 있는 그년이지! 너도 껄떡대려고 이 집에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다 단유가 본 적 없는 얼굴임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디서 온 녀석이야? 설마...공국군...인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게, 만약 공국군이었다면 금방이라도 물러갈 모양새다. 아쉽게도 단유는 공국군이 아니었고, 단유가 그의 질문에 부정하는 대답을 하자, 다시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별거도 아닌 놈이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공국군에게 당장 이를테다!”

“그 전에 아드님 다리를 먼저 지혈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차, 하며 사내는 서둘러 거실을 둘러 보더니, 에밀리아에게 묻지도 않고, 벽에 걸려 있던 천을 가져와 아들의 다리를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의 입은 쉬지 않고 에밀리아를 비하하는 말을 토해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너 같은 놈을 한두 놈 본 줄 알아? 그저 먹을 거 좀 주면 얌전히 다리 벌려 주는 년이라는 소문을 듣고 왔겠지? 빌어먹을 년놈들. 아랫도리 놀리려 온 놈이나, 네 년이나 모두 같은 놈들이지. 그런 주제에 감히 내 아들을 피 보게 해? 시국이 어지럽다고 너 같은 막돼먹은 년놈들이 기승을 부리니 착한 이들만 피해를 입지. 거지 같은 놈들.”

“당신 아들도 그 거지같고 동물같은 놈들 중 하나인 거죠.”

“감히 내 아들을 너같이 더러운 종자랑 비교해! 빌어먹을 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단유는 다시 에밀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습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왜요?”

에밀리아는 단유의 등 뒤를 계속 훔쳐보며 말하기를 어려워했다.

“괜찮아요. 할 말 있으면 그냥 말해요.”

저주를 퍼부으며 아들의 다리와 손목을 봐주는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탓일까?

“에밀리아.”

“.......”

“혹시, 저 사람도 에밀리아에게 손을 댔나요?”

좀 더 정제된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당장에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단유의 말에 에밀리아는 물론, 등 뒤에서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에밀리아의 커다란 눈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뭐하자는 거야!”

단유는 에밀리아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눈을 감겼다.

“잠시만. 눈이 부실지도 몰라요.”

단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나오나 싶더니 금새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저주와 욕을 일삼던 사내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리니 눈을 감았던 에밀리아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어깨를 떨었다.

“이제 괜찮아요.”

단유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에밀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단유의 등 뒤에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던 사내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뒹굴던 사내, 베루센도 사라지고 없었다. 거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만이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어?”

“에밀리아. 괜찮아요. 이제.”

단유는 짧은 단어로 에밀리아를 진정시켰다. 에밀리아는 그래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겨우 눈앞의 단유와 시선을 맞췄다.

“...루치드.”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단유를 불렀다.

“네.”

“루치드도...루치드도....”

단유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말처럼, 루치드도 저를....”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에밀리아의 말을 가로챘다.

“아뇨.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

“에밀리아, 에밀리아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당하면 싫다고 말해야 돼요.”

“...안 돼요.”

에밀리아는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공손하게 굴지 않으면 혼난단 말이에요. 나쁜 사람이 된단 말이에요. 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처음 에밀리아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때 단유는 자신이 꽤 불순하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릴 때는 그래도 꽤 ‘순진’했었는데, 라고 자책하기도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왜 순진한 이 여자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며, 왜 자신은 또 손에 피를 묻힌 것일까? 그저 저주받은 운명에 분노를 토해야만 하는 것일까?

단유는 에밀리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아버지가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었더니, 예의 지독한 약초향이 확 밀려들었고, 이어 어두운 방 안 구석에 놓인 침대 위에 누운 거구의 남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단유는 조합식을 이용해 빛을 만들었다. 작은 광원을 하나 만들어 공중에 띄우니 어둠이 물러가고, 침대 위에 누운 사내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온몸이 살로 뒤덮인 것처럼 뚱뚱한 사내는 배와 다리 사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고, 작은 두 팔이 간신히 그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목은 턱살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고, 숨을 들이시고 마시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입술이 펄럭였다. 신기한 건 눈마저 살에 뒤덮여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커다란 눈동자는 뒤룩뒤룩 움직이며 단유를 살피는 중이었다. 에밀리아의 큰 눈동자는 아마도 아버지를 닮은 것인가 보다.

“네 놈.”

억눌린 목소리가 힘겹게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 딸에게 무슨 짓을 시킨 거지?”

“시키긴 뭘 시켰다고? 그년이 원해서 하는 거야.”

“원해서?”

“그래!”

“당신은 당신의 딸이 그러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고?”

“이제껏 내가 벌어다 먹이고 키웠어! 그럼 이제부터는 제 밥그릇, 지가 챙겨 먹도록 해야지.”

“콩고물은 당신이 얻어먹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보다시피 난 움직일 수도 없어. 무릎을 다쳐서 걷지도 못한다고! 가진 건 몸뚱어리밖에 없는 년인데, 그렇게라도 해서 벌어야지, 안 그럼 굶어 죽으란 소리야?”

그의 말이 길어지는 이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이유는 아마도 단유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는 탓일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방에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평범하게 보일 리 없다. 무서울 테지. 겁이 날 테지. 겁이 나고 무서운 이유는,

“당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날 두려워하는 거겠지.”

“자, 잘못이라니! 아니야, 아니라고!”

단유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뜨거운 입김이 단유의 입에서 모두 빠져나오는 순간, 방 안의 빛도 사라졌다. 다시 어둠 속에 갇힌 에밀리아의 아버지는 다급히 소리쳤다.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그냥 가만히 방 안에 있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지난번에 단유가 이 집에 왔을 때도,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마 다른 누가 오더라도 그는 쥐죽은 듯이 조용히 기다렸겠지. 그리고 딸이 들고 들어오는 밥이나 먹으며 시간을 좀먹었겠지. 아니, 그녀를 좀먹고 있었지.

한참 뒤, 단유가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 여전히 의자에 앉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에밀리아에게 다가갔다. 다시 무릎을 꿇고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시선을 마주쳤다.

“에밀리아.”

“루치드.”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네?”

“저랑, 같이 떠날래요?”

“떠나요?”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에밀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단유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단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보호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소중하게 지켜주고 보호해주지 않는 사람은...아버지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에밀리아. 저 꽃들을 봐요. 만약 에밀리아가 돌봐주지 않는다면 저 꽃들은 어떻게 될까요?”

“시들어 죽겠죠.”

“맞아요. 시들어요. 지금 에밀리아가 그런 꽃 같아요.”

“루치드....”

“에밀리아, 들판에 핀 꽃들은 어떤가요? 누가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시들던가요? 걔네들은 혼자서 성장하고 자라서 꽃을 피우죠? 이제 에밀리아도 그런 꽃이 되어야 해요. 이런 집, 저런 화분 속에 갇힌 꽃이 아니라.”

그때 또다시 현관문을 벌컥 차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과 달리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 보기도 전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이 험악한 눈을 하고 등장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네 녀석이냐?”

단유는 시선을 돌려 거실 창문, 커튼 사이로 바깥을 훔쳐보았더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웅성대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월! 저기 핏자국이!”

“흠?”

병사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부엌을 살펴봐, 혹시 다른 놈이 있을지 모르니까.”

다른 병사 한 명이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남은 병사는 칼끝을 단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 누구냐? 어디 사는 녀석이야?”

단유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에밀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에밀리아.”

“대답하라, 어서!”

병사는 위협적으로 들리게끔 한 발을 크게 굴렀다. 쿵, 하는 소리에 에밀리아가 움찔거렸지만, 단유는 그녀의 시선이 옮겨지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날 보고, 대답해봐요, 에밀리아. 자유롭게, 누구도 괴롭히지 않는, 그런 에밀리아로 살고 싶다고.”

굳게 닫힌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에밀리아의 큰 눈동자를 부드럽게 지켜보고 있을 때, 부엌을 살핀 병사가 거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어.”

“그럼 저놈뿐인가 보군.”

“근데, 저놈 뭐하는 거야?”

“몰라, 수상한 놈이야. 어디 사는지 말도 안 하고.”

“보나마나 저년이랑 한 번 떡치려고 들어온 놈이겠지. 현관에 밀포대 못 봤어?”

“그렇겠지. 소문난 년이니까.”

단유는 에밀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귀를 막았다. 양 귀를 막고 그녀를 보며 입으로 ‘눈을 감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워 눈을 감지 못했다. 다시 단유가 눈을 감아요, 라고 채근하자 겨우 눈을 감았는데, 불안에 파르르 떠는 그녀의 속눈썹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단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두 병사를 바라보았다.

“꺼져.”

순간 단유의 주위로 거대한 회오리가 생겨나 두 병사를 밀어붙였다. 비명마저 바람에 파묻힐 만큼 거대한 회오리는 두 병사를 벽에 처박았고, 그도 모자라 벽을 뚫고 나갔다. 바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오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에밀리아의 집을 반쯤 부수며 나간 회오리는 옆집으로 옮겨 갔고,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한 집은 산산조각나며 부서졌다. 온갖 가재도구들과 집안 부속물들이 공중으로 휘말려 올라갔다.

회오리바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 주위를 크게 돌며 집들을 파괴해나갔고, 동시에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개미떼마냥 흩어지게 만들었다.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와중에도 단유와 에밀리아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조용히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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