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48화 (648/956)

심판의 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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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가죽 매입도 하나요?”

그루버는 낯선 얼굴의 단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죽 공방에 와서 가죽 매입을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당연하죠.”

우물가에 가서 여기 물 있냐고 묻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루버의 대답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파실 가죽이라도 있나요?”

만약 가죽을 팔겠다고 하면, 그루버는 그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다른 사형을 부르려고 했다. 그는 아직 가죽을 보는 눈이 모자라기 때문에, 거래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팔 가죽이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이상한 남자를 쳐다보던 그루버의 등을 누군가 두드렸다.

“뭐하냐?”

“아, 체보 형.”

체보는 그루버가 보던 방향을 힐끗 본 뒤, 특이할 게 없음을 확인하고 고갤 돌렸다.

“뭐라도 팔았어?”

“아뇨. 누가 가죽 매입하냐고 물어봐서.”

“응?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야?”

“저도 그게 좀···.”

“세상이 참 이상하게 돌아가니까, 그런 이상한 사람도 생기는구나. 됐고, 여기 청소 좀 하자. 아까 그 병사들 때문에 너무 지저분하다.”

안 그래도 청소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참이었는데, 수상한 남자 때문에 잠시 손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던 그루버는 얼른 빗자루를 챙기러 가게 구석으로 향했다.

****

예전에 가죽 무두질하는 법도 잠깐 배운 적이 있었기에, 시간만 된다면 가공한 가죽을 파는 방법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거니와, 무두질을 하기 위한 공구가 없으니 그냥 적당한 동물을 사냥해서 가죽을 넘기는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동물을 잡는 건 그냥 마법으로 어찌하겠지만, 가죽을 벗기거나 다듬기 위해서는 작은 손칼 정도는 있어야 할 듯했다.

대장간을 찾아간 단유는 망치질에 전념하고 있던 사내를 불렀다.

“저기 부탁할 게 있는데요.”

“뭐요?”

“혹시 이거 가공할 수 있나요?”

“응?”

사내는 단유가 내민 송곳니를 받아들었다.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사내가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어디서 났소?”

“가공 가능한가요?”

“···가능하오만.”

“가공비는 얼마죠?”

“···이게 정말 카니스의 송곳니가 맞다면, 50쿠퍼는 주셔야 하오.”

단유는 시선을 둘러 대장간 안을 둘러보다, 벽에 걸린 작은 칼을 가리켰다.

“저건 얼마죠?”

“35쿠퍼요.”

“이게 더 비싸네요?”

대장장이의 말로는, 철로 된 칼은 쓰다 보면 부러지기도 하지만, 카니스의 송곳니는 잘만 가공하면 금속 칼보다 더 내구성이 좋기 때문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정말 이거 어디서 난 거요? 혹시 죽은 카니스를 보기라도 한 거요? 아니면 설마···.”

제대로 대답하면 피곤해질 듯해, 단유는 말을 돌렸다.

“그럼 이거랑 저 칼이랑 바꿀 수 있나요?”

“응?”

대장장이는 또 한 번 눈썹을 꿈틀거리며 단유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놀리려는 것인지, 진심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단유가 재차 송곳니를 내밀며 말했다.

“가능한가요?”

가공하는 데만 50쿠퍼라고 말하긴 했지만, 가공해서 팔 수만 있다면 300쿠퍼라고 불러도 금방 팔 수 있을, 그런 물건이었다. 그걸 고작 35쿠퍼짜리 칼이랑 바꾸자고?

“흠, 그걸로 괜찮은가?”

단유는 대장장이가 건넨 칼을 받아들고 살폈다. 싼 칼이라도 관리를 잘했던지 날이 꽤 살아있었다. 이 정도면 사냥에 이용해도 무리가 없겠다 싶었다.

대장장이는 칼을 꽂을 수 있는 칼집도 함께 내주었다. 그리고 떠나려는 단유를 붙잡고 말했다.

“혹시 말이네. 이거랑 같은 걸 가지고 온다면 내 다음엔 제대로 값을 쳐주겠네.”

대장장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는 있을까? 단유는 대장장이를 한 번 쳐다본 뒤, 걸음을 옮겼다.

****

녹스 성을 빠져나오는 동안, 거리 곳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공국군들이 보였다. 그들 옆을 지날 때도 그들은 딱히 단유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성문으로 향하니 출입을 크게 제한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듯, 경비병들은 사람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비록 단유는 신분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지만, 전혀 문제 될 일은 없었다.

녹스 성을 나와 부지런히 걸어 가까운 산엘 올랐다. 나무 사이를 지나는 차가운 바람이 단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하루 만에 다시 산에 오를 줄은 몰랐지만, 내친김에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벌어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단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카니스의 가죽과 송곳니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엔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돈을 벌려면 거길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시간을 너무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몰아 쉬며 산엘 올랐지만, 주변에 보이는 동물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사냥이라 실력이 저하된 것일지도 모른다. 동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간 원치 않게도 가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단유는 무릎을 짚었던 손을 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결국 3일 후, 단유는 예의 카니스가 있던 산까지 오고 말았다. 가는 동안에 판드레위처럼 주위를 정찰―이라는 명목 아래 식량 조달을 담당하는 병사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피곤한 일을 피했다.

단유는 수풀이 우거진, 길도 없는 산을 오르며 주위를 경계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산짐승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는데, 그게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그 원인을 찾자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여력은 없었다. 그저 빨리 카니스라도 찾아서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끝내 단유는 사냥물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네 개의 송곳니와 두 장의 가죽을 얻은 단유의 손은 카니스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사냥은 지난번처럼 간단했고, 단지 가죽을 분리하는 동안에 손에 피가 묻었을 뿐이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정확한 시세를 모르니 이대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왕 손을 더럽힌 김에 끝을 보는 게 좋겠다.’

결국 좀 더 사냥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삼 일이 지난 뒤에야 단유는 녹스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모든 일에는 욕심이 문제다. 잠깐 욕심을 부렸더니 일주일이란 시간을 노숙하며 날려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시간을 들인만큼 획득한 사냥물도 많았지만.

성문을 지날 때, 사람들의 경계심이 한층 더 낮아진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아마도 단유의 외형이 그들과 비슷해진 때문일 것이다. 며칠째 감지 못하고 노숙으로 인해 떡진 머리와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진 망토를 두른 단유는 대로를 따라 걸으며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저기요.”

“네?”

“가죽을 팔고 싶은데요.”

“가죽이요?”

요즘 들어 가죽 수급이 많이 어려워진 상황이라 가게를 지키고 있던 체보는 미소를 지으며 단유를 반겼다.

“어떤 가죽인지 좀 볼까요?”

단유는 등에 지고 있던 불룩한 자루에서 가죽을 꺼내 들었다. 체보는 잠시 그 가죽을 보다가 단유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가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체보는 가게 안쪽에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루버를 불렀다.

“사형, 아니 스승님을 불러와.”

곧 그루버가 스승을 부축하여 나왔다. 가죽 장인 초폴로스는 가게 앞에 서서 가죽을 들고 있는 단유를 일별하고 매대 위에 펼쳐 놓은 가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거라면 이번에 주문받은 기사용 레더아머를 제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스승님?”

귀한 가죽을 보고 놀란 초폴로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값을 제대로 치루겠습니다. 혹시, 더 있습니까?”

단유는 꽤 괜찮은 금액에 가진 가죽들을 모두 팔 수 있었다.

대장장이는 일주일 만에 나타난 단유를 기억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단유의 말을 기다렸고, 단유가 자루에서 송곳니를 꺼내들자 역시 하는 눈빛으로 잽싸게 받아 감정했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군요!”

대장장이를 감탄하게 한 댓가로 단유는 전과 다르게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사냥물들을 모두 정리하고 두둑해진 주머니를 가지게 된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밀포대를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는 상점에 들러 두 포대를 산 뒤, 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에밀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밀포대를 사고도 돈은 많이 남았고, 에밀리아에게 신세를 진 만큼을 충분히 쥐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밀리아의 집 현관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지만 에밀리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등 뒤로 지나가는 수레꾼이 단유를 흘깃 쳐다보고 지나갔다. 단유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수레꾼이 혀를 차고 지나가는 듯 했지만, 딱히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혹시 에밀리아가 집 안에 없는 것일까, 생각하는 찰나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도 있었는데 바깥 거리의 소음 때문에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단유는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포대를 내려놓고 현관 옆의 창문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커튼이 처져 있지만 틈이 보였고, 그 틈으로 거실 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쌍의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단유는 현관을 힘으로 열려 했다. 그러나 현관이 잠겨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발에 힘을 주고 강하게 밀어 찼더니, 현관에 걸어놓은 나무걸쇠가 부서지고 문이 반쯤 부서진 채로 열렸다. 단유는 그대로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갔고 곧 거실 안쪽, 벽난로 근처에 있는 사람과 마주 설 수 있었다.

“누, 누구야? 너, 너는?”

단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의 사내는 턱과 볼에 작고 곱슬한 털이 나 있었는데, 툭 튀어나온 눈알이 뒤룩뒤룩 움직이며 단유를 살피고 있었다.

“그 손부터 떼라.”

사내는 에밀리아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한 손은 에밀리아의 입을 막고, 한 손은 에밀리아의 가슴을 쥐고 있었다.

“너 누구냐고? 누군데 함부로 남의 집을, 그것도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거야! 가, 강도냐?”

강도? 밀 두 포대를 들고 들어오는 강도도 있다던가? 아니, 그런 말은 다 필요 없는 말들이었다. 입이 막힌 에밀리아의 둥글고 순진한 눈동자가 말똥말똥하게 빛나며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불쌍한···.”

단유는 손을 뻗었다. 이 순간에도 에밀리아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는 사내의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더니,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아파, 아파!”

단유는 다른 손으로 남자에게서 풀려난 에밀리아의 손을 잡았다.

“일어날 수 있어요?”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어나진 않았다. 단유가 조금 힘을 주어 일으키자 그제야 일어섰다. 사내의 손목을 놓았더니 사내는 부어오른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그의 배를 세게 찼더니 숨을 못 쉬겠는지 컥컥,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몸을 공벌레처럼 마는 남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에밀리아를 덮어 주었다. 가슴이 드러나도록 벗겨져 있던 에밀리아를 가려준 뒤, 한쪽에 쓰러져 있는 의자를 세워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근데···베루센은 아픈 거 같은데?”

“아는 사람이에요?”

“옆집에 살아요. 저랑 아버지 먹으라고 음식도 가져다줘요.”

단유는 여전히 숨을 못 쉬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신음을 흘리는 사내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다시 에밀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이랑, 어떤 관계에요?”

“관계요?”

“네.”

“그냥 옆집 사람이요.”

“그런데 왜···가만히 있었어요? 저 사람이 에밀리아의 몸을 만지는 거 괜찮아요?”

“아버지가 그랬어요. 공손해야 한다고.”

단유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마는, 왠지 너무 오래 이런 일을 겪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에밀리아.”

“네?”

“저 사람 좋아해요?”

“어···.”

에밀리아는 쓰러진 사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바닥을 뒹굴던 중에 단유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내가 에밀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좋았잖아! 고맙다고 했잖아! 악!”

사내는 거실이 떠나갈 정도의 비명을 지르며 구멍 난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손가락만한 구멍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와 막은 손가락 사이를 붉게 물들였다.

단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의 에밀리아의 둥근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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