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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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정말···부탁이나 요구하는 게 없다고요?”
“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에밀리아의 태도에 단유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기분이었다.
“아까 식사를 하는 동안, 저한테 뭔갈 말하려 했던 거 아니었어요?”
“아, 그게···.”
이것도 부탁이라면 부탁인 걸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단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옷, 갈아 입으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옷이요?”
단유는 자신의 옷을 잠깐 내려다보고 다시 에밀리아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고작 이 옷을 원한다고?
‘하기 이곳에서는 신기해 보이는 옷이니까 욕심이 날지···.“
단유의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에밀리아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 옷을 입은 채로 나가면 분명히 병사들에게 잡힐 거예요. 병사들은 별거 아닌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그렇게 귀한 옷이라면 분명히 뺏어갈 생각만 할 거예요. 단순히 뺏기는 것만 아니라 끌려가서 몰매질을 당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
뭔가 단유가 짐작하는 것과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추리가 에밀리아의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혹시 제가 건방진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건방져요?”
“예전에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요. 말을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자칫하면 건방져 보일 수 있다고.”
점점 에밀리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말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열 번, 스무 번 생각하고 말하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외모도 어려 보이긴 하지만, 에밀리아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려 보였던 이유는 바로 저런 점 때문일까? 어쩌면 9살 난 여자아이가 딱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니요. 제가 오해를···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오해를 사게 했던 건가요?”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밀리아를 진정시키며 단유는 물었다.
“그럼 혹시 갈아 입을 옷이 있을까요?”
“아, 네. 저희 아버지가 입던 옷이요. 조금···작을지도 모르지만요.”
얼른 가져올게요, 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에밀리아의 장단에 조금 더 맞춰주며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에밀리아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에밀리아가 건넨 것은 울 재질의 오버코트와 망토(Cloak)였는데, 둘다 심하게 색이 바래진 데다 곳곳이 얼룩덜룩한, 당장이라도 표백제를 가득 첨가하여 세탁기에 두 번 정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옷이었다.
“따뜻한 옷이에요.”
아마도 후드도 없는 단유의 더플 코트가 그녀의 눈에는 꽤 춥게 보였나 보다. 단유는 더플코트를 벗고 오버코트를 입은 뒤 망토를 위에 걸쳤다.
“여기요.”
에밀리아는 오버코트를 정돈할 수 있는 벨트를 건넸고, 단유는 그걸 받아 허리에 둘러맸다. 바지가 조금 눈에 띄지만, 에밀리아가 함께 건넨 바지는 단유에게 맞지 않았다.
“어때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이제 밖에서 자더라도 춥지 않을 거예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인 후, 옆에 내려놓은 더플코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아, 잠시만요.”
에밀리아는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자루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기에 담으시면 될 거예요.”
단유는 자루를 물끄러미 보다, 자루에 옷을 구겨 넣었다. 그 사이 에밀리아는 다시 부엌을 가더니 두 손에 빵을 들고 돌아왔다.
“에밀리아.”
단유는 자루를 정리하며 그녀를 불렀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예요?”
“네? 그게···그냥 도와주고 싶었어요.”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단유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돕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뭘까? 뻔하다. 그간 살아왔던 세상이 그랬으니까. 오직 가족이라 생각하는 친구들만이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를 위한다고 생각했다.
연민과 동정을 무시할 마음은 없지만, 진짜로 연민과 동정을 발휘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하긴 단유 본인도 그랬으니까. 어렸을 때는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은 점점 희석되었고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랬기에 에밀리아의 호의를 단유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루를 등에 짊어 매는 단유를 보며 에밀리아는 괜히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단유는 얼른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피다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지금 일을 전혀 못 하시는 건가요?”
“···네.”
“그럼 먹을거리는 어떻게?”
“아, 옆집 분들이 조금씩 도와주시거든요.”
이마저도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 건 여전히 단유의 문제일까?
“혹시 필요한 거 없어요?”
“필요한 거요?”
“그냥 이렇게 도움만 받기 미안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그런 거 없어요. 그냥···그냥 위험한 일 당하지 말아요.”
다른 의미로 계속 한숨만 쉬게 만드는 에밀리아다. 여기서 계속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단유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이 신세는 꼭 갚을게요.”
“괜찮아요, 정말.”
단유는 다시 한번 정중히 인사를 한 뒤,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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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과 확실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인적이 드물었던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고, 덩달아 소란스럽다 여길 정도의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후드를 눌러 쓰고 걸어가니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단유에게 머무르긴 했지만 달리 의심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는데, 예전의 녹스에서는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기억에는 없는, 아마도 새로 생긴 것이리라 생각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구에서 종종 봤던 노점상 같은 판매대가 여럿 모여 있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요컨대 시장이라 부를 만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예전에는 녹스의 동서, 남북을 가르는 대로변에 위치한 상점에서만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았는데, 이런 식으로 소규모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색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목제 상자를 겹겹이 쌓아두고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도 보이고, 바구니를 손에 든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간을 보는 아낙도 있었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열심히 입을 놀리는 상인도 있었고, 물건을 지고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내도 보였다.
단유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며 주위를 살피다, 한 상인에게 다가갔다. 단유와 비슷하게 망토를 두른, 붉은 머리에 커다랗고 빨간 코를 가진 중년인은 단유를 보며 뭘 사려하냐고 물었다.
“여기 돈 말고 다른 것도 받나요?”
“돈 말고?”
상인의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단유의 위아래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돈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면 고려해 보겠지만···.”
상인은 자신이 파는 밀 포대를 툭툭 두드렸다. 단유는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가 빼냈다. 상인은 단유의 손에 들려있는 작고 투명한 물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뭐지?”
“보석, 이에요.”
“보석?”
순간 상인의 눈에 욕심이 잠깐 보였는데, 그것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귀한 걸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어.”
“왜요?”
“보석이 필요한 사람이 없으니까.”
상인은 혀를 차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요약하면, 전쟁 때문이었다. 녹스 성을 점령한 공국군들 때문에 시끄럽게 떠들 수는 없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패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는 버림받은 땅이었으나, 지금은 천혜의 요지가 된 녹스의 주변 환경 때문에 근근이 버티는 중일 뿐이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외부와의 왕래가 완전히 막혀버린 지금, 보석 따위 있어 봐야 환금성이 떨어져 소용이 없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이 난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보석 따위 있어봐야 소용없어. 내가 보석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취미를 지닌 귀족도 아니니까.”
상인은 자신의 낡고 허름한 망토를 흔들어 보이며 말을 맺었다.
“만약 전쟁 중이 아니라면, 이건 꽤 가치가 있는 것이었겠죠?”
“그럴지도. 그런데 전쟁 중이 아니라도 내가 그 보석을 욕심낼 이유가 없었을 거야. 보석을 거래할 상대가 없거든.”
단유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까요?”
“모르지. 그건 윗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잖아? 나 같은 사람들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일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설령 교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더라도 일반 서민의 삶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교국이 점령지를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면, 이곳도 전쟁 전과 비슷한 경제력을 회복할 테고, 경제 논리에 따라 실물 경제가 살아날 테다. 그렇게 되면 이런 재화들도 본래의 가치에 맞는 환금성을 회복할 테고, 그렇게 되면 단유가 들고 있는 보석은 꽤 높은 가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이 보석을 소유한다면, 아마도 몇 배의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상인에겐 통하지 않겠지.’
전쟁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전쟁이 끝난 후, 개인의 재산이 그대로 보존될 거란 확신도 없다. 자국민을 수탈하는 시대에 점령지 약탈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장고에 빠진 단유가 불쌍해 보였는지, 상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 보석은 잘 간직해두고, 돈을 벌게나. 다들 그런 이유로 여길 나와서 장사하고 있는 것이니까.”
단유는 보석을 다시 망토 속에 집어넣고, 상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안타깝지만 먹고 살려고 이러는 것이니 돕지 못해 미안하다는 상인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 조건 없이 도움을 준 에밀리아에게 신세를 갚겠다고 했으니. 물론 언제까지 갚겠다고는 안 했으니,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단유 본인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 돌아와 갚아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걸 바라고 있을 에밀리아는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는 일정이 기다리는 마당에 마음속 빚을 계속 품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지금 잠깐 발품을 팔아서 신세를 갚고 떠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에는 본인이 찾는 매대가 보이지 않아, 단유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물었다.
“근처에 혹시 가죽 공방점이 어디 있나요?”
젊은 여인은 이상한 소릴 듣는다는 듯 단유를 잠시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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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에 이곳과 비슷한 소규모 시장이 여럿 생겼지만, 기존의 상점들은 그대로 장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군사용 물자를 조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몇몇 상점들, 기술자들은 군의 보호를 받으며 상점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편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까지 아니었나?”
일단의 병사들을 등 뒤에 세운, 육중한 철갑 무장을 한 기사의 거만한 눈빛에 녹스의 이름난 가죽 장인 중 한 명인 초폴로스는 노구의 몸을 굽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몸살이 걸려서···. 그래도 내일까지는 꼭 납품할 수 있을 겁니다.”
“내일? 내일이라고?”
“그···조금 서두르면 오늘 저녁까지라도 가능할 겁니다.”
“서둘러? 대충 만들겠단 소린가?”
“그, 그럴 리가요? 정성을 다해 최고의 레더아머(Leather Armor)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기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쯤 벗겨진 노인의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매대 위에 올려져 있던 팔목 보호대 하나를 집었다.
“마침 쓰던 것이 낡아서 새로 바꿀 때가 되었는데···.”
“아, 예.”
“떨떠름해 보이는구만?”
“아닙니다. 쓰십시오. 대장님께서 쓰신다는데 기꺼이 드려야지요.”
“우리가 이겨야 자네들도 편히 생활할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렇지?”
“네, 그럼요.”
팔목 보호대 하나를 바꾼다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미 수십 번은 이기고도 남았으리라.
철컹거리는 소음과 발맞춰 걸어가는 병사들이 인파를 헤치고 사라지자, 상점 뒤에서 몸을 숨긴 채 기다리던 이들이 나와서 노인을 부축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모자라서···.”
“아니다. 애초에 오늘까지 만들어 내기 힘들었던 양이지 않았느냐?”
아랫입술을 깨무는 사람, 씩씩거리지만 차마 욕을 하지 못해 얼굴을 붉힌 사람 등, 여럿은 노인과 함께 가게 뒤로 향하며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한 사람, 무리 중 막내에 속하는 그루버만 가게에 남아 어지럽혀진 매대를 정리하며 장사를 준비했다.
“저기, 여쭤볼 게 있는데요.”
그루버가 고개를 들자,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누, 구시죠?”
“아.”
후드를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낸 단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