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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46화 (646/956)

심판의 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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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해가 떨어진 후라도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쟁의 영향이 없진 않은가보다. 대신 중무장한 병력들이 조를 지어 정찰을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집과 집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만 골라 걸으며 대충 주변을 살핀 단유는 우선 적당한 곳에서 잠부터 청하기로 했다. 오랜 산행과 야숙에 지친 단유였다.

****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볼에 닿으며 단유는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과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다.

덮고 있던 짚들을 헤치고 일어난 단유는 옷에 붙은 것들을 대충 털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헛간과 붙어 있는 집의 창문에서 빼꼼히 쳐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느리게 꿈뻑거리며 단유를 쳐다보는데, 차라리 뭐라도 말을 하면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도 없이 그저 단유를 주시할 뿐이라 단유도 뭔가 다른 액션을 취하기가 곤란했다.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던 중, 근처에서 발자국과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암. 빨리 돌고 들어가야겠다. 졸려 죽겠네.”

“저도 침상에 누우면 바로 기절할 거 같습니다.”

“술 냄새는 안 나지?”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들어가기 전에 우물가에서 좀 씻고 들어가면 괜찮을 겁니다. 들렀다 가시죠.”

“안 그래도 그러려고. 목도 바싹 마른 기분이야.”

목이 바싹 마른다면서도 말은 많다. 술주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는 중에 창가에 있던 이가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아마도 들어오란 뜻으로 보이는데, 그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몰라 단유가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이자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향했더니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그 상자들 옆으로 뒷문으로 추정되는 문이 있었다.

굳이 저길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중에 문이 삐걱 열리며 예의 그 눈동자가 빼꼼 튀어나왔다.

“들어와요.”

낮고 조심스러운 미성에 단유는 주저하다, 다시 재촉하는 그 손짓에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 사방을 통나무로 둘러싼 벽에 어설픈 칸막이만 놓고 방을 구분했던 집을 기억하던 단유에게 지금 바라보는 집은 가히 현대식이라 칭해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곳이 주방이란 점에서, 과거 제대로 된 공간 없이 거실 한가운데, 혹은 벽난로 근처에서 대충 죽을 끓여 먹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였다. 제대로 만들어진 조리대와 불을 지필 수 있는 화덕이 갖춰져 있었다. 다양한 조리기구와 그릇들이 선반에 차곡 쌓인 모습들을 구경하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단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낡은 데다가 언제 씻은 건지 알 수 없게 밑단이 진흙색으로 물든 치마를 입은 그녀는 좁은 어깨에 기다란 갈색 머리를 치렁치렁 흔들며 부엌을 빠져나갔다.

부엌문을 열고 나가니 좁은 복도가 있었고, 곧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온갖 편의성 가구들-테이블, 소파, 의자, 수납장, 선반 등―이 곳곳에 자리 잡은 거실의 한편에 난 창문 중 하나가 아까 단유가 잠을 청했던 헛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창문의 아래쪽에는 시든 것처럼 보이는 꽃이 항아리같이 뚱뚱한 꽃병에 꽂혀 있었고, 그 옆에는 물뿌리개가 놓여 있는데 주둥이 부분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살피니, 거실 여기저기에 그런 꽃병과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벽에도 꽃이 걸려있을 정도고, 가구들에도 꽃무늬가 문양으로 새겨져 있을 정도라 이 정도면 편집증을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단유가 집안을 훑어보고 있을 때, 여자는 정문 쪽으로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가 커튼이 쳐진 창문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마주선 뒤에야 단유는 그녀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는 키도 작고 약간 어려 보여서 대략 20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처음에 보았던 동그란 눈이 의식되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에서도 눈이 제일 먼저 보였는데,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는 그녀의 머리 색깔처럼 짙은 갈색이었고, 쉴 새 없이 위아래,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단유가 그렇듯, 그녀 역시 단유의 생김새를 살피는 중이리라.

짚을 털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드문드문 붙어 있는 짚풀이 그토록 신경 쓰여서 쳐다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유는 여전히 지구에서의 그 복장 그대로였다. 면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하얀 운동화에 검은색 더플코트를 입은 단유의 낯설음에 잔뜩 경계하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혼자세요?”

“네?”

가슴께에 올려진 두 손과 불안한 두 눈동자를 보며 단유는 오해를 풀어주었다.

“절 도와주시려 했다면, 감사합니다. 그런데 혼자 계신 거라면 염치없이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 이만 나가 볼게요.”

“아···.”

여자는 숨을 짧게 들이쉬더니 조금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단유의 말을 받았다.

“지금은 아직 순찰 중인 군인들이 많으니까···그···모습으로 나가시면 위험할 거예요. 그러니까···조금 더 계셔도 돼요.”

“죄송하네요.”

“아뇨,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여자는 손을 내저으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네, 그럼 혹시 물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그럼요. 거기 앉으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여자가 황급히 부엌으로 향한 후, 단유는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방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저기 저 방에 있을 것인데 여태 인기척이 나지 않는 게 조금 이상하다 여기며, 여자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테이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단유는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아, 저···.”

머뭇거리는 여자의 모습에 단유가 먼저 말했다.

“루치드, 라고 해요.”

“아, 루치드. 전 에밀리아라고 해요.”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기, 루치드는 혹시 교국에서 온 건가요?”

“아니요.”

“그럼 그 옷은?”

“제가 살던 곳에서 입던 옷이에요.”

“어디요?”

단유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비록 벽에 부딪혔지만, 에밀리아는 단유가 가리킨 방향을 익히 알고 있는 듯 놀란 얼굴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저긴···.”

“네, 몬스터가 있죠. 그런데 그 몬스터가 있는 곳 너머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어요.”

“있었다고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말을 잇지 않았고, 에밀리아도 그 말에서 뭔갈 느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레를 끄는 소리, 넓은 천을 공중에 대고 털어대는 소리, 맞은편 집 문이 열리는 소리 등등이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단유와 에밀리아 사이를 메웠다.

“이제 사람들이 슬슬 일어날 시간인가 봐요.”

“네.”

“저도 이만 가볼게요.”

“······.”

단유가 일어서자, 에밀리아도 같이 일어섰다.

“저기, 루치드.”

“네.”

“식사···라도 먹고 가요.”

단유는 다시 거실로 눈을 돌렸다. 이 집에서 본 거라곤 부엌과 거실 밖에 없었지만, 그리 풍족해 보이는 집은 아닌 것 같았기에 신세를 지기가 미안했다. 몽골의 어느 부족처럼, 손님에게 반드시 대접해야만 하는 풍습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대접을 거부해선 안 된다는 룰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에밀리아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아침 준비할게요.”

에밀리아는 단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유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저런 모습을 보면서 그냥 외면하기는 조금 미안하다 여겼다.

스프와 노란 잼, 딱딱한 빵과 과일을 쟁반에 가득 담아 거실로 돌아온 에밀리아는 볼을 붉히며 말했다.

“맛은 장담하기 어렵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거예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스푼을 들어 스프를 한 입 떠먹는 단유의 표정을 살피는 에밀리아에게 단유는 ‘맛있다’고 응대했고, 그제야 에밀리아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더니 ‘먼저 드세요’라고 말을 남기고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단유에게 준 것과 비슷한 쟁반을 들고 닫혀 있는 문으로 향했다. 단유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후―단유는 계속 식사를 하는 척 했다―, 문을 두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단유가 빵 반 조각을 모두 먹었을 즈음에야 에밀리아는 방을 나왔다.

“다 드셨어요?”

“아뇨. 와서 같이 먹어요.”

“아, 예.”

쟁반은 옆 빈 의자 위에 두고 단유의 맞은편에 앉은 에밀리아는 얼굴을 또 얼굴을 붉혔다.

“저 때문에 식사 못 하신 건가요?”

“아뇨. 원래 천천히 먹는 편이에요.”

“아, 네.”

그 뒤로 조용한 아침 식사가 이어졌다. 에밀리아는 식사 내내 단유를 의식했고, 단유는 그런 에밀리아를 무시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에밀리아가 건넨 수프는 비록 간은 조금 밍밍한 편이었지만 몸 전체에 온기를 전달할 정도로 따뜻했기에 만족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단유는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잘 먹었어요.”

“아, 예.”

여전히 주저하는 에밀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단유는 몰래 숨을 길게 뱉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네?”

“계속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거 같으셔서.”

“아, 네.”

그러나 에밀리아는 여전히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접시에 올려진 빵을 먹지도 않고 조금씩 뜯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네?”

“저기 방에 계신 분은, 아버지신가요?”

“아···. 네.”

“다치신 건가요?”

방문이 살짝 열렸을 때, 단유는 후각을 자극하는 약초향을 맡았다. 에밀리아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놀란 얼굴을 하자, 단유가 그것을 설명해주었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밀리아는 결국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에밀리아의 아버지는 원래 가금상(Poulterer)이었다. 닭을 키우고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녹스성에서 나름 자리 잡은 직업이었다. 에밀리아의 아버지가 키우는 닭은 매우 건강한 편이라 꽤 잘 팔리기도 했고, 그래서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고 에밀리아는 말했다.

그러나 어느 날, 녹스 성에 공국군이 들어왔다. 그 전부터 부오노 공국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녹스는 언제나 본국, 아니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떨어져 있던 편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공국군이 들어오면서 녹스 성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의 일상을 크게 방해하지 않겠다던 공국군은 전쟁 물자 조달을 핑계로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말을 키우던 사람은 말을 빼앗겼고, 재단사들이 팔려고 만들어뒀던 옷들은 모두 몰수당했다. 말로는 전쟁 후에 보상하겠노라고 하지만, 당장에 먹고 살 수단이 사라진 이들에겐 그들의 약속은 허망할 뿐이었다.

에밀리아의 아버지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00마리 넘게 키우던 닭들을 모두 수탈당했는데, 억울한 나머지 아버지는 저항을 했고 이에 공국군의 기사 한 명이 아버지에게 실력을 행사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길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를 곤죽이 되도록 만든 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후 발을 동동 구르던 이웃들 몇몇이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말을 할 때, 에밀리아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일어서시질 못하시고 저렇게 누워만 계세요.”

울음이 뒤섞여 한 문장도 겨우 뱉을 정도가 되었을 때, 단유가 물었다.

“그래서 저를?”

에밀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해요. 저들은 악마같은 사람들이에요. 그 기사는, 아버지를 때리는 동안 내내 웃었다고 해요.”

어떻게 사람을 때리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냐는 에밀리아의 하소연은, 솔직히 공감이 되질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모르니까 저러는 거다. 특히 이곳 녹스에서 단유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웃으며 때린다? 웃으면서 사람의 목을 베던 미친 마법사도 있었는데.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 잘 모르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며 단유는 물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도움을 주길 바라나요?”

“······.”

절박하게 단유를 붙잡고 식사를 주며 도움을 주려는 것은 뭔갈 부탁할 게 있으니 그런 것이리라. 처음에야 단유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 집에 불렀더라도 말이다.

“네?”

에밀리아는 단유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는데요?”

“네?”

이번엔 단유가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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