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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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녹스 성에는 대공이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그리고 얀테로 교국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군대가 마지막 힘을 기르는 중이고.”
“마지막, 이라고 표현하시는 걸 보면 승리의 가망성이 적다고 점치시나 보군요.”
“어···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이미 공국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으니까. 지금 최전선은 오르라 성이지만, 그 성만 밀리면 녹스까지는 금방이니까.”
거리상으로는 금방이지만, 천혜의 험지가 자리하고 있기에 쉽게 들어오긴 어려울 것이다. 대공 측은 그걸 고려하여 녹스까지 물러난 것이고, 여차하면 대 늪지의 목제 다리들을 모두 부수고 항전할 생각일 것이라고 판드레위는 추측했다.
“추측이 아니라 거의 사실이겠지만 말이야.”
만약 그 다리들을 모두 부순다면 대공의 군사들도 녹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말 그대로 고립이며, 그저 대공의 목숨을 유지한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전쟁에서 패배를 승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대공이 죽든, 살든, 부오노 공국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든, 패배를 하든 단유는 상관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대공 측이 필사의 항전이란 핑계로 다리를 부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때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단유 역시 녹스에 고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수많은 군사가 진을 치고 있을 지금 상황에서 무사히 다리를 지나 녹스를 나갈 수 있을까?
현재 녹스 성에는 대공의 근위대가, 녹스 성 주변에는 최후의 결전을 벌일 군대가 야숙(野宿)하고 있다며, 그리고 돌아가면서 주변의 정찰 활동을 펼치는 중이라고 판드레위는 밝혔다.
“혹시 모를 간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정찰 활동을 혼자 다니나요?”
판드레위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곤란한 얼굴을 하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판드레위는 행정관 출신 장교라고 했다. 수도에서는 나름 고위직에 있었지만, 전쟁에서 밀리는 동안에는 그저 잡병 수준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작전 참모 역할도 아니고, 잡다한 행정 처리만 하던 행정관이었기에 패전을 거듭하는 전장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녹스에까지 후퇴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왔는데, 녹스에서는 부대가 재편되면서 자신 같은 장교들은 하급부대의 부대장 정도로 좌천되었다고.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녹스 주변 정찰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녹스의 식량 사정이 꽤 나쁘다. 그래서 말로는 정찰이라고 하지만, 부대별로 식량을 자체 조달해야 하는 임무도 하고 있지.”
아무리 군대에 대한 지식이 모자란 단유라 해도,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는 군대의 식량 사정이 나빠 개별 부대에 식량 조달을, 그것도 수렵의 형태로 구하도록 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끔 북한에서 굶주린 병사들이 산에 올라 뿌리 식물을 캐서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무려 전쟁 중이지 않은가?
“늪지대 쪽으로 정찰 나가는 쪽이야 정말로 경계를 해야 하지만, 이쪽은 외부인이 올 만한 지형이 아니니까, 정찰이 아닌 식량 조달이 우선이지. 그런데···.”
그런데, 단유가 눈앞에 딱 나타나니 여간 놀란 게 아니라는 그의 설명이었다.
“동행 정찰이 원칙이지만, 각자 흩어져서 살피는 게 시간도 아낄 수 있고 효율적이니까.”
단유는 그 정도면 충분히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루치드. 이대로 녹스로 갈 것인가?”
단유가 그럴 예정이라고 말했더니, 판드레위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되물었다.
“자네 정말 얀테로 교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지?”
관련이 있다면 판드레위는 공국군의 장교로서 단유를 제압해야 할 일이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그리고 만약 특정한 목적을 가진 간자라면, 예를 들어 대공이나 주요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들어온 이라면 더더욱 녹스 성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자신은 없지만.
“관계가 없다면 말이야, 혹시 공국군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가?”
“네?”
“잘은 모르겠지만,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군에서 중히 쓸 걸세. 아마 요직을 주지 않을까? 내가 옆에서 증언하지.”
단유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중히 쓰네 마네, 증언을 하네 마네란 말인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유의 웃음에 판드레위는 불안한지 급히 말을 이었다.
“내 비록 체술을 전문으로 단련한 군인은 아니지만, 자네 정도로 빠르고 강한 이라면, 게다가 그···몬스터를 홀로 잡을 수 있는 실력자라면 자격은 충분하네. 그리고 조금 전의 그 빛···도 자네가 한 거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술을 가진 이라면 분명 고위직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걸 내가 증명해주겠다, 이거네.”
“생각 없습니다.”
단유는 딱 잘라 말했다. 판드레위의 속셈을 짐작하고 말고 할 거 없이 어딘가에 소속될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기에 단유는 판드레위의 말을 막았다.
“전 이대로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단 녹스로 갈 생각입니다.”
“이봐, 조금 전에 내가 한 이야기 잊었는가? 자네처럼 신분이 정확하지 않은 이가 성에 들어가면 보나 마나 내부 경비병에게 붙잡히고 말걸세.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들어가세. 들어가서···.”
“괜찮습니다.”
“아니, 안 되네. 자넬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내 비록 허접한 행정관이라도 공국군이네. 공국군으로서 위험할 수 있는 자네를 풀어줄 수 없어.”
갑자기 신념이 투철한 병사 흉내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그의 말 속에 숨은 절박함은 그가 속한 조직에 관련된 문제이리라. 공을 세우려는 속셈? 혹은 출세를 해서 직위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 뭐든 상관없다.
****
“부장님, 부장님!”
판드레위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정찰’을 나온 부하의 목소리였다.
“위데스?”
“뭐 하십니까?”
판드레위와 비슷한 복장을 한 위데스는 양손에 불룩한 자루를 들고, 아까 전 판드레위가 서 있었던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어?”
판드레위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자기 앞에 서 있던 단유가 보이지 않았다. 위데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잠시 동안에 모습을 감춘 걸까? 판드레위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단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장님, 뭐하십니까?”
경사진 땅을 폴짝 뛰어 내려온 위데스가 판드레위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곧 해가 집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해요.”
“위데스.”
“네.”
“혹시 방금 내 앞에 서 있던 사람 못 봤나?”
“네?”
“나보다 이 정도 더 크고 이상한 복식을 한 사내인데, 못 봤는가?”
위데스는 오히려 판드레위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누가 있었습니까?”
“조금 전까지 이야길 하고 있었는데?”
“제가 조금 전에 왔을 때, 부장님 혼자 여기 서 계셨는데요?”
“뭐?”
“부장님 혼자 여기 서서 계셨습니다.”
나름 열심히 돌아다니며 식량 조달 임무를 마친 위데스가 부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왔을 때, 부장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일을 다 못 끝낸 것인가 싶어, 부장이 갔던 방향을 쫓아갔고 곧 나지막한 언덕 너머에 부장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위데스는 증언했다.
“몇 번 불렀는데도 부장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몇 번이나 불렀다고?”
판드레위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무섭게?”
전쟁의 참화에서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은 몇몇 심약한 군인들이 이상 증상을 보일 때가 있었다.
“아냐, 진짜 여기 있었어. 루치드라고···체술을 단련한 사내였는데···눈 깜짝할 사이에 날 바닥에 내쳤다고.”
“공격을 당하셨단 말입니까?”
위데스는 깜짝 놀라 판드레위의 위아래를 훑었지만, 딱히 어딘가를 다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의심해야 한다면 아마도 어깨 위에 달린 그것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카니스를 혼자 잡았다고···카니스의 송곳니를 보여줬는데···.”
“카니스를요? 혼자서?”
점점 이해하기, 믿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판드레위.
“괜찮으십니까? 부장님?”
혹시 식량 조달 임무를 달성하지 못해 늘어놓는 변명은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
“일단 돌아가시죠. 운이 좋았지만 제가 목표량도 충당했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위데스의 거북한 시선에 판드레위는 자기가 진짜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카니스가 가득한 산을 홀로 넘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갑자기 눈앞을 가득 메웠던 그 빛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고위 기사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마법 물품 중에 그런 효능을 내는 게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조금 전의 사내는 그런 귀한 물품을 가질만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부대로 귀환하는 와중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처음부터 열까지 모두 이상한 것들뿐이라, 정말 자신이 유령을 본 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어지고 땅에 부딪혀 비비기도 했던 턱을 쓰다듬던 판드레위는 힐끔 돌아보는 위데스의 시선에 얼른 손을 내렸다.
****
판드레위와 위데스가 부대로 귀환하던 그 시간, 이미 자리를 떠나 녹스를 향해 가던 단유는 곧 녹스의 남문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동문으로 가려 했으나 동문 쪽의 분주한 분위기에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판드레위의 이야기에서 추정컨대, 아마도 야숙을 한다는 군대는 북문 쪽에 있을 것이니, 정 반대쪽인 남문 쪽은 상대적으로 한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대로 남문 쪽은 출입하는 사람이 적은 탓인지 한산해 보였다. 해자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적었는데, 그래도 그 틈을 몰래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밤이 되길 기다릴까?’
환상 마법을 거는 방법도 있지만, 단유의 환상 마법은 세 사람 이상에게는 걸지 못했다. 걸어본 적이 없기에 자신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불확실한 방법을 시도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안전하게 사람이 더 적을 때를 노리는 것이 맞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판드레위에게 걸려 시간을 적잖게 보낸 탓인지, 밤은 금방 찾아왔다. 하늘이 어둑해지자마자 성벽에 횃불이 걸리고, 곧 성문이 닫힐 분위기를 보이자 단유는 걸음을 떼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눈뜬장님처럼 단유를 지나 보냈다. 그리고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익숙한 듯 보이는 건 가운데 난 큰 대로(大路) 뿐이었고, 건물들은 매우 낯설게 변해 있었다. 단유의 기억에 남쪽에는 두 개의 지구(地區)가 있었는데, 그 두 지구는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나뉘었다. 그래서 대로의 왼쪽은 슬럼가를 상상케 할 만큼 더럽고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오른쪽은 그와 정반대로 깔끔하고 정비된 집들이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게 단유의 기억 속 녹스였다.
그러나 지금 녹스는 많이 달랐다. 우선 통나무를 세우고 진흙을 덧발라 만들었던, 가축우리 같았던 집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대신 붉은 벽돌 지붕을 가진,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얼핏 보면 관광을 위해 보존된 동유럽의 어느 구도시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마치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똑같은 집들이 대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고, 대로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판드레위의 복식만 보고서는 변한 게 없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달라진 주택 양식을 보고 단유는 조금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지구의 발전 양태를 기준으로 두고 판단한 게 오류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단유는 좀 더 이 세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며 걸음을 떼었다.
곧 어둠이 단유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