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44화 (644/956)

심판의 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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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되지 않은 늑대 고기를 씹으며 허기를 채우던 단유는, 마침내 산길을 벗어나 너른 평야에 당도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설마 했지만···.’

그 설마가 사실이 되어 평야 가운데 서 있었다. 높게 치솟은 성벽은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릴 만큼 여전했다.

“······.”

한때는 그 위용에 감탄한 적도 있었건만, 지금은 저마저도 어쩐지 단유를 혼란케 하려는 수작처럼 보였다. 지구에서는 흘린 적 없던 눈물을 여기서는 얼마나 많이 흘렸던가?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구에도 중세의 성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한국에도 옛 성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 있는 만큼, 여기도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거기, 누구요?”

단유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는 순간,

“아저씨?”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입이 열렸다. 덥수룩한 수염과 부리부리한 눈매, 헝클어진 머리가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낯익은 탓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핏줄 선 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도망치라고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음? 날 아시오?”

사내가 경계의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되물었고, 그제야 단유는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자세히 보며 그가 자신이 기억하는 ‘모슬라’가 아님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과 착각해서.”

사내는 여전히 경계의 시선으로 단유의 위아래를 살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말을 돌리는 걸 보니 꽤 의심스러운데?”

그 말을 듣고서야 그의 복식이 예전에 봤던 사냥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 말인즉슨,

‘예전과 다를 게 없구나.’

일전에 번역 일을 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데, 복식은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바뀌는 분야 중 하나라고 했다. 생산 수단, 종교, 예술, 경제, 사회제도, 산업, 교육, 기술, 사상 등 열거하면 끝도 없을 사회의 세밀한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가 복식이기에, 그 변천사를 통해 거꾸로 사회를 해석하는 학문이 존재할 정도이다.

물론 단유는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사내의 복식에서 시대의 변화를 통찰할 능력은 없었다. 철판이 덧대어진 가죽 재킷과 리넨 소재가 곁들어진 가죽 바지, 워커같이 생긴 신발을 보며, 약간 다른 점은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지만 예전보다 발달한 무언가는 없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자신의 복장이 저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보인다는 게 걸렸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지금의 복장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과거 비슷한 경우를 겪은 바 있기에 단유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해결책을 강구하기에 앞서, 우선은 눈앞의 사내와의 일을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칼이 눈에 거슬린 탓도 있고.

단유는 사내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양손을 살짝 들었다.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나 수상한 사람이요 한다던가? 누구지? 여기에 어떻게 온 것이냐?”

‘누구’냐고 묻는 질문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왔냐고 묻는 질문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 질문에 깔린 사내의 생각을 짐작해보자면, 이곳은 함부로 올 수 없는 곳이란 의미이고, 단유가 기억하는 한에서 그건 나오기 힘든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녹스가 본 대륙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소위 버려진 땅이란 것은 예전에 들은 바가 있다. 게다가 녹스로 오는 길이 거대한 늪으로 둘러싸여 과거에 이곳으로 오던 이들이 그 늪에서 길을 헤매다 죽기도 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늪지대를 관통하는 목제 다리가 건설되면서 더 이상 길을 헤매는 이는 없다고 들었다. 직접 그 다리 위를 달린 경험이 있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왔냐고 묻는다는 건, 녹스가 어떤 사정으로든 고립되어 있거나 혹은 일부러 길을 막아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단유는 일단 대화를 좀 더 진행하여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 저기서 왔어요.”

단유는 자기가 걸어왔던 방향을 손가락질했고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저기? 저기에 뭐가 있는데?”

“여기서 5일 정도 걸어가면 빈촌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 왔어요.”

“뭐라고? 그럼 저기 저 산을 넘어왔단 말인가?”

칼끝을 돌려 우뚝 솟은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키는 사내에게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며 단유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산을 혼자 넘어왔단 말인가?”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산을 홀로 넘을 수 있을 리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이번엔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몇 해 전부터 저 산은 몬스터가 점령해서 출입이 통제된 곳이다. 그놈들을 정벌코자 출정한 병사들이 숱하게 희생되고도 토벌을 마무리 짓지 못해 결국 포기한 곳인데, 저곳을 너 혼자 넘어왔다고?”

“···전 못 봤는데요?”

사내는 단유의 눈높이까지 칼을 쳐들었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의 예리함이 빛났다. 그 상태로 사내는 단유를 관찰했다.

사내는 단유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단순히 낯선 복장만 가지고 그런 게 아니다. 조금 거리가 있을지언정 상대가 칼을 들었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서 있을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든 칼은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진짜로 칼을 휘두르진 않을 거라고 믿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배짱 자체로도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은 할 수 있다.

키도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데다가 견갑을 하지 않았는데도 넓은 어깨를 가진 것을 보니,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몸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무기는 들고 있지 않은 듯하지만, 간혹 맨손으로 병기를 든 이를 제압하는 무술가도 있다고 하니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저 산은 이미 ‘카니스’ 무리가 점령한 상태다. 제아무리 뛰어난 이라도 맨몸으로 건널 순 없는 곳. 게다가 저 산 너머에 빈촌이 있다고? 단 한 번도 보고가 올라온 적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 솔직하게 정체를 밝혀라.”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보고’ 운운하는 순간, 그는 조직에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고, 어쩌면 과거에 만났던 포우와 같이 경비대에서 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부터 정체를 밝혀라!”

경계 태세로 칼을 든 채로 한 걸음 다가오는 사내. 만약 단유가 허튼짓이라도 한다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칼을 휘두를 모양새라, 단유는 혀를 찼다. 이왕이면 온화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게 좋지만, 지금 굳이 시간 질질 끌면서 피곤한 대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노숙하느라 피곤하기도 했는데, 이런 곳에서 애꿎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사내가 접근하는 것과 동시에 단유도 한 걸음 내디뎠다. 사내 역시도 단유와 피곤하게 대치상태를 이루기보단 먼저 그를 제압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단유의 접근이 공격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치켜든 칼을 살짝 뒤로 물렸다가 앞으로 쭉 뻗었다. 상대를 실제로 찌르기보단 상대의 접근을 막고자 하는 견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서 빛이 터졌다.

“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었다. 마치 한낮의 태양 빛을 그대로 올려다본 것처럼 눈이 따가웠다. 그 탓에 사내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빛이 사라진 직후 단유가 달려들 때 사내는 이를 막지 못했다.

단유는 사내의 멱살을 잡아 밀면서, 동시에 한쪽 다리를 사내의 장딴지 뒤로 밀어 넣었다. 사내는 어어, 하면서 허우적대다가 땅에 세차게 부딪혔고, 등에서 밀려오는 강렬한 통증에 헉, 하고 신음을 뱉어냈다. 단유는 곧바로 사내를 뒤집어 땅에 엎드리게 한 후, 사내의 두 팔을 뒤로 끌어 등에 붙였다. 무릎으로 사내의 척추 가운데를 꾹 누르니 사내는 완전히 단유의 손에 제압되고 말았다.

빛이 번쩍이고 난 후, 한 호흡 만에 제압된 사내는 입에 들어간 흙더미를 뱉어낸 뒤 씩씩거리며 몸을 들썩였지만, 단유는 쉽게 풀어줄 마음이 없었다.

“이름이 뭐죠?”

“···무슨 짓을 한 거냐!”

“우선 이름부터 알려주시죠.”

“너부터 이름을 밝혀라!”

“루치드요.”

사내는 단유가 그렇게 쉽게 이름을 밝힐 줄을 몰랐던 탓에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버둥거림도 멈춘 채 단유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오냐, 루치드. 우선 이것부터 풀어라. 지금 풀어주면 사정을 참작해 주겠다.”

“우선 그쪽 이름부터 말해요.”

단유가 무릎으로 그를 꾹 누르며 말했다.

“···판드레위, 욜요스 판드레위다.”

“판드레위. 그럼 다음, 저기 저 산에 몬스터가 있다고요?”

“역시 거짓말을 한 거구나?”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 주실래요?”

“카니스를 모른다고?”

판드레위는 잠시 머뭇거리다 설명했다. 붉은 눈, 커다란 입,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되는 덩치에 두개골을 한 번에 뚫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송곳니, 이곳에서 자생하는 소철을 한 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튼튼한 뒷다리를 가진 몬스터, 라는 설명에 단유는 혹시, 라는 생각을 가지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게 그놈의 송곳니와 비슷한가요?”

바닥에 턱이 닿은 채로 씩씩대던 판드레위는, 눈앞에 나타난 긴 송곳니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걸 어떻게?”

너무 놀란 나머지 단유가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시야에 내밀어졌던 송곳니가 사라진 뒤에야 등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단유는 가까이에 선 채로 그가 일어서는 것을 방관했고, 사내는 주의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주 섰다.

“서, 설마 직접···아니, 말이 안 돼.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면 제가 저기서 넘어왔다는 것은 증명한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이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몰라요. 그러니까 설명을 좀 부탁드리죠.”

사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단유가 건넨 송곳니를 받아 들여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단유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어, 내 칼이?”

칼날이 사라지고 칼자루만 남은 걸 뒤늦게 확인한 판드레위는 단유의 눈치를 살폈다. 단유는 판드레위가 알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판드레위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짐작하자면, 아까의 그 빛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 빛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를 조심해야 한다.’

카니스의 송곳니를 가지고 있으며, 비록 방심했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자신을 제압한 단유는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사이, 단유는 판드레위가 들려준 이야기로 머리가 복잡했다.

‘전쟁이라고?’

드뷔시 대륙, 부오노 공국의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녹스는 그동안 대륙에서 벌어지는 숱한 전쟁과 정쟁(政爭)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위치상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하거니와, 정치적, 경제적 이점이라곤 거의 없는 곳이기에 윗분들의 관심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판드레위는 말했다.

“부오노 공국과 대립 중이던 안테로 교국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고, 결국 수도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부오노 공국의 대공은 전선이 밀릴 때마다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고, 결국 최후의 저항지로 녹스를 지정한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녹스에 대공이란 사람이 와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전쟁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갈길 바쁜 단유다.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닐 각오까지 한 마당에 전쟁이 벌어졌다니.

한 몸 간수하는 거야 일도 아닐 테지만, 오늘과 같이 이런 피곤한 일들이 반복될 걸 생각하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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