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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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빈촌은 그대로였다. 자신이 마지막에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그대로인 텅 빈 마을을 거닐며 단유는 분노를 곱씹었다.
그건 정말 분노였다. 또 이유도 모른 채 이곳으로 불려오게 된 이 상황에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대체 왜!’
이건 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겨우 이곳에서의 기억과 아픔들을 가슴 깊숙이 꾹꾹 누르며 새로운 삶에 적응을 해나가던 참이었는데, 옛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 마냥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분명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인위적인 일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돌발성을 좌우하는 의지, 그것은 ‘누군가’의 개입을 생각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단유는 그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화를 내는 일이 드문 단유가 목이 붉어지도록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 숨어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단유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주먹을 쥔 채로 사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나와, 당장!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소리가 더 멀리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단유의 절규에 메아리가 세 겹, 네 겹씩 겹치며 주위를 떨게 했지만 그에 반응하는 것들은 날아갔던 새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단유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술을 헐떡이며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핏줄 선 눈동자로 텅 빈 집을 바라보던 단유는 며칠 전, 이런 폐가를 돌아다녔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일어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조금 전의 흥분과 독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단유는 가장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밝아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하다가 더 이상 빛이 뿜어져 나오지 않을 때쯤에 단유는 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후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집으로 들어갔고, 다시 조금 전의 현상이 반복되었다.
마을의 모든 집을 그렇게 돌아다닌 후, 마지막 집을 나왔을 때는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했던 생각처럼 지금의 단유라면 어렸을 적에 찾지 못했던, 혹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도 자신이 마법을 썼을 때 그 마법에 반응하여 나타났듯이, 이번에도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마을은 비어 있었고, 가족들, 마을 사람들의 흔적은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나오지 않았다.
기대하면 거부당하고, 희망을 품으면 절망을 주는 이 순환고리에 질릴 정도라 단유는 다시 이를 악 물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겠지? 지금 내 모습을? 내가 아파하고 상처받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뜻대로 살지 않을 거야.’
위기를 극복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고픈 마음은 가진 적도 없다. 위기 따위 없는 편이 나았고, 절망을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픈 마음 뿐이었고, 가족과 오순도순하게 살 수만 있다면 지금 단유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해도 단유는 기꺼이 버릴 용의가 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을 거야.’
단유는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기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했다. 자신의 안위와 의지가 무엇보다 우선인 단유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끌려다니며 통제받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문득, 이라크전에 참전 후 PTSD를 앓는 어떤 미 해병은 사막의 사진만 봐도 발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록 PTSD까지는 아니지만, 단유는 눈앞의 마을을 이대로 보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다짐했다.
“이게 내 답이야.”
단유는 집중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고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내세워 이미지(포르마)를 그렸다. 인식(아나그노리시)의 과정을 거쳐 재현(컨슈메)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 어둠 속에 불꽃이 튀어 오르듯 머릿속에 뭔가가 번쩍였다.
‘이거였구나!’
오랜 실험을 하는 동안에도 찾지 못했던 규칙 중 하나가 베일을 벗고 드러났다. 예상치 못했던 깨달음, 디아포였다.
‘챕터!’
해체 마법을 쓰는 동안, 정확한 규칙을 알지 못해서 할 수 없었던 ‘챕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현(컨슈메).
눈앞에서 빛이 터졌다. 주변 뿐만 아니라 멀리 서 있는 산까지도 모두 감쌀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면 그 빛을 보고 눈이 멀 정도로 밝고 환한 빛이었다.
물론 시전자인 단유는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고, 그 빛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손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토록 빛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사방으로 발산한 빛의 무리는 금새 어둠에 묻혔다. 정확히 따지자면 불과 1, 2초 정도의 시간만 흘렀던 것. 그리고 단유가 손을 내렸을 때,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 자리했던 집 한 채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전에는 물질의 입자들이 극소단위로 해체된 뒤, 그 입자들이 특정한 규칙에 따라 재조립되어 일부는 빛으로, 일부는 열로 전환되어 나타났었다. 정확히 측정하지 못해 가정에 불과하지만, 더 많은 입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무언가로 재조합되는 것 같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추측하자면, 우주에 가득한 암흑 물질이라는 것도, 그런 종류의 입자들이 조합된 덩어리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기존의 해체마법은 그렇게 조합되는 것들의 규칙성을 알지 못해 그냥 내버려 두었던 셈인데, 조금 전 마법에서는 특정한 규칙 하나를 깨달았다. 그래서 단유는 입자들의 조합을 규칙에 따라 유도하는 방식(챕터)을 사용했고, 그 규칙에 따라 해체된 입자들은 빛으로 전환되어 발산했다. 그것은 기대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선물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단유가 어렸을 적에 얻었던 마법이란 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누군가의 뜻대로, 그게 선의든 악의든, 그저 강제적으로 부여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탓이다.
비록 단유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단유를 이날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힘이지만, 과연 이 힘이 평온한 일상과 맞바꿀 힘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고 여겨질 뿐이었으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가족과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단유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 지워버리겠어.”
이곳이 만약 불행의 시작점이라면, 차라리 다 없애겠다고 단유는 다짐했다.
동쪽 산에서 해가 완전히 떠올라 사방을 밝혔을 무렵, 그 햇빛마저 가릴 정도의 빛이 사방을 채운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그저 빈 땅만 남은 넓은 공터 한가운데 서서 땅을 바라보았다.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외로움과 불안함이 사뭇쳤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단유는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쨌든 해답은 이 저주받을 힘에 있어.’
우연히 돌아가게 되기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리라. 동시에 그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도 없으니, 단유는 최대한 그의 뜻을 짐작해 방해하리라 마음먹었다.
갑자기 단유는 허기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던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강원도 야산에 오르기 전이었으니 단순 계산만으로도 12시간이 넘었다. 이 상황에서 배고픔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워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가보자.’
단유는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넓은 공터 끝에서 들판으로 이어지는 좁은 소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은 긴 들판을 지나 가파른 산길로 이어질 테고, 몇 개의 산을 지나고 몇 번의 밤을 지새면 다시 넓은 들판이 나올 것이다. 다시는 올 일이 없고, 다시는 볼 일이 없다 여겼던 성벽을 보게 될 테고, 그 근처에서 단유는 다시 한번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을 태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갈 길은 그 길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성벽이 있을까?’
시간이 지난 만큼 이곳도 꽤 많은 발전을 하지 않았을까? 지구의 모든 문명이 그러했듯, 시간은 지식의 축적을 낳고, 지식의 축적은 문명의 발달로 이어진다. 고대문명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증명한 사실. 게다가 여기는 지구의 시간보다 빠르지 않았던가?
내심 이 곳이 얼마나 발전했을지 기대하는 단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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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산길을 지나며 단유는 어렸을 적 자신이 어떻게 이 산을 지났던 것인지 의아해졌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약한 몸이었는데, 비록 마법이 있다고 해도 쉽게 지나기 어려운 길이었다.
‘하긴 처음 이 산을 넘을 땐 죽을 뻔 했었지.’
불을 사용해서 늑대의 위협에서 겨우 빠져나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등 뒤까지 쫓아왔던 늑대의 악취와 날카로웠던 송곳니가 생생했다.
바위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주위를 둘러보던 단유는 적당히 쉬었다 싶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옷은 어떡하지?’
강원도에 있었을 때의 복장 그대로라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경비병이 이상하게 볼 터였다.
‘아니지, 경비병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아?’
녹스가 어떻게 변했을지 아직 모른다. 어쩌면 깜짝 놀랄 정도로 급 성장하여 복식도 이전과 달리 현대식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고, 경비병 대신 경찰 제도가 도입되어 순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어린 단유가 아니었고, 자신을 감추기 위해 똥수레를 끌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시 걸음을 떼고 녹스로 향하던 중,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을 지날 때, 단유는 평소에 듣기 힘든 소리를 들었다. 그르렁거리는 울음과 함께 살갗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의 적의가 숲 속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니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그래도 묘한 타이밍에 출현한 그것은 바로 늑대였다. ‘늑대’라고 하지만, 지구에서 봤던 늑대와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지구의 늑대에 비해 2배 이상 큰 몸집과 아래턱을 벗어날 정도로 돌출된 송곳니, 붉은 눈동자와 길고 뾰족한 귀는 차라리 상상 속의 괴물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눈앞의 늑대는 현실이었고, 지금 당장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달려들 태세였다.
‘빈틈을 보이지 않아도 달려들 것 같지만.’
그래도 늑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릴 적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고, 늑대의 습성을 닮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하면 무엇보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이지 않은가?
마주보고 있는 늑대 외에, 등 뒤에서도 조용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협동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의 착오는 그들의 먹잇감으로 찍힌 단유가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만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강한 포식자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예전에 쟤네들을 잡아 먹었을 때 어땠더라?’
그때도 저들은 단유의 식량이 되어 주린 배를 채워줬었는데, 이번에도 착실하게 역할을 수행코자 달려와 주었다.
‘설마 이것도 당신의 배려인가요?’
몹쓸 배려라 해도 이건 거절하지 않겠다. 단유는 손가락으로 마주 선 늑대를 가리켰다.
손가락만한 크기로 압축시킨 바람이 쏘아져 나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늑대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총을 사용해보지 못해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 정도면 일반 권총탄이라고 알려진 것보다 크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땅에 풀썩 처박히는 늑대를 뒤로하고 틈을 노리던 늑대 무리 중 한 마리를 지정하여 해체 마법을 사용했다. 각 개체가 모두 몸이 크니까 굳이 여러 마리를 사냥할 필요는 없었다.
빛이 확 하고 뿜어지자 바로 곁에 있던 늑대는 물론이고 뒤에서 대기하던 늑대들까지 모두 앓는 소리를 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때문인지 몇몇은 괜히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고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단유는 모두 물러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먼저 잡았던 늑대를 향해 걸어갔다. 머리에 뚫린 구멍으로 피와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유는 늑대의 다리 한쪽을 붙잡고 가까운 물가를 찾아갔다. 바닥에는 늑대가 흘린 피의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두려움도, 어려움도 없던, 가벼운 사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