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곁에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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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표팀과의 평가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난 평가전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내고 언론과 여론의 질타를 맞았던 대표팀은 절치부심하여 이번엔 꼭 이기고 말겠다고 벼르던 중이었다.
나름 K리그에서 주목받는 신예 공격수로 이름을 떨치던 명수도 지난 평가전에서 썩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이를 갈았다.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도 줄이며 연습에 매진했는데, 부상을 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체력을 모두 쏟아붓는 연습량에 팀 코치가 말릴 정도였다.
팀 훈련과 개인 훈련, 근력 운동 등 모든 일정을 끝낸 후에야 숙소로 돌아온 명수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며 낮에 했던 팀 훈련에서 자신이 실수했던 장면을 복기하던 명수는, 어느 순간 연이어 울리는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들어보았다.
상미에게서 온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하는 것을 보며 최근 며칠간 너무 소홀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미리 전화 자주 못 할 거 같다고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밤에 잠시 통화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잡은 물고기한테 밥 안 준다는 소리 들을까 봐 더 잘하려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핑계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리고 괜히 통화하다가 불필요한 말이 오가며 심력 낭비를 하게 되면, 다음날 컨디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으니 일부러 피한 면도 있었지만, 역시 핑계이지 않냐고 하면 딱히 아니라고 부정하긴 어렵다.
그런 마음이 메시지 확인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뭐야? 9개나 보냈어?’
명수는 덜 마른 머리를 긁적이다 메시지 아이콘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명수는 곧바로 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무슨 일인데? 무슨 말인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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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은 소파에 앉아 거실을 왔다 갔다 반복하는 상미를 바라보았다. 상미는 당황과 걱정이 섞인 얼굴로 넓은 거실을 맴돌았고, 가끔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만하고 앉아. 정신 사나워.”
“아직도 전화 안 받는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죠?”
“단유가 보통 애니? 지 앞가림은 지가 잘 하는 녀석이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앉아.”
“그래도,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데···.”
“걔 전에 여행할 때도 몇 달씩 연락 안 된 적 있었어. 괜찮을 거야.”
상미는 눈꼬리를 내린 채로 하은의 옆에 앉았다. 그 뒤를 패티가 쪼르르 따라와 같이 소파에 올라오려고 끙끙거렸고, 하은은 패티를 들어 품에 안은 채로 상미를 바라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려.”
“선생님은 진짜 걱정 안 되세요?”
“걱정이 왜 안 되겠어? 되긴 되는데,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란 거지. 막말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어 모두가 죽는다 해도 단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그건 단유일거라고 생각하니까.”
“의미는 알겠는데, 그래도···걱정이 돼서···.”
“알겠으니까, 일단 좀 앉아.”
하지만 하은도 초조함과 불안감을 감추고 있을 뿐이지,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분명 단유는 며칠 전 집을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그저께까지 돌아오겠노라고 했었고, 자기가 한 말을 꼭 지키는 아이였으니 만약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면 반드시 전화로 통보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도 단유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상미 모르게 숨을 토해내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미와 하은이 동시에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TV 아래 놓인 자기 방석 위에 누워 있던 호빵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선생님!”
명수가 급한 걸음으로 뛰어들어오며 하은을 부르자,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라면 그냥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로만 여겼을 명수가 오늘은 어쩐지 듬직해 보였다.
눈치없이
“명수야.”
“어, 상미야. 단유는? 연락 왔어?”
“아니. 없었어.”
“내 전화도 안 받아. 선생님, 단유가 뭐라고 하고 갔어요?”
하은은 단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전했다.
“그럼 그저께 오기로 했단 거죠?”
“그래.”
명수는 하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를 한참 검색하나 싶더니 이윽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여보세요?”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명수가 입을 열었고, 상미와 하은은 놀란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그들이 생각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통화를 이어나갔다.
“저 단유 친구인데요, 일전에 한 번 뵌 적 있죠? 네, 맞아요. 예, 평가전 있죠. 그건 그거고요, 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혹시 단유한테서 연락 받으신 거 있으신가요?”
그리고 잠시 상대의 말을 듣는 듯 싶던 명수가 급하게 되물었다.
“정말이요? 그래서요?”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미와 하은은 그저 답답하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지만, 명수는 그들에게 어떤 답을 들려줄 여유가 없었다.
“네, 네.”
한참을 듣던 명수가 되물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3일 전이란 건가요? 그 이후에 전화해 보신 적은 없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명수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하은이 급히 물었다.
“뭔데? 누군데?”
“공택윤 PB님이라고, 단유 돈 관리해주시는 분이요.”
“아, 그분.”
하은도 단유에게 들은 바가 있고, 연락처도 있었지만, 미처 그에게 연락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하은도 많이 당황했었던 것이다.
명수는 그와 통화한 내용을 들려주며, 단유가 땅을 사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강원도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하자, 하은이 벌떡 일어섰다.
“내가 갔다 올게.”
“어딘 줄 알고 가신다는 거예요?”
“그분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들 기세라, 명수는 하은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혼자 어떻게 가요? 저랑 같이 가요.”
“됐어. 나 혼자 가도 돼.”
“같이 가요.”
“너 훈련 있을 거 아냐? 며칠 뒤에 경기 있잖아?”
“감독님한테 전화하면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일단 내가 혼자 가볼 테니까, 너는 다시 돌아가.”
“괜찮다니까요. 저도 같이 가요.”
“아냐, 명수 넌 다시 돌아가. 내가 선생님이랑 같이 갈게.”
“너도 방송 해야 되잖아? 너 방송 안 하고 가는 거랑, 내가 가는 거랑 뭐가 달라? 같이 가.”
“바보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난 고작해야 인터넷 방송인거고, 그것도 시청자들한테 미리 공지하면 하루 쉴 수 있지만, 넌 그런 게 아니잖아? 국가대표가 하기 싫다고 마음대로 경기 빠질 수 있는 거야? 아니잖아? 그러니까 선생님 말대로 넌 돌아가.”
“됐어, 단유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돌아간다고 내가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단유는 무사히 돌아올 거야. 만약에 단유가 돌아왔는데, 그때 네가 대표팀에서 징계받고 시합을 뛰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단유가 뭐라고 할 거 같아? 그러니까 일단 돌아가.”
“너도 걱정이 된 거니까 날 부른 거잖아? 불러놓고 다시 돌아가라는 건 무슨 경운데?”
“그래서 널 부르지 말았어야 한다는 거야? 단유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너한테 연락하지 말까? 솔직히 나도 너한테 이걸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연락한 거거든?”
“부르지 말란 소리가 아니잖아? 왜 사람 말을 그렇게 듣냐?”
“니가 먼저 그랬잖아? 왜, 오라고 했다가 가라고 하니까 똥개훈련 시키는 거 같아서 그래? 미안해, 미안하니까 사과할게. 그러니까 돌아가.”
“야!”
“왜 소릴 지르고 그래? 선생님도 계시는데 목소리 낮춰라.”
결국 듣다 못해 하은이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
“선생님···.”
“됐어. 명수 넌 돌아가. 그리고 상미 넌 그냥 집에 있어. 혹시 단유가 집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집에서 기다렸다가 무슨 연락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선생님, 저도 같이 가요.”
“아냐. 네가 집을 지키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강원도에 가는 건데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혹시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넌 서울에 있는 게 좋을 수도 있어.”
하은은 정리가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 코트를 찾아 걸치고, 대충 가방을 챙긴 뒤 거실로 나왔다.
“명수 넌 그만 가봐.”
“선생님.”
명수가 목소리를 깔고 나직하게 부르자 더는 하은도 명수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왜?”
“단유, 저한테 가족이에요.”
“알아.”
“단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저 못 참아요.”
“안다니까.”
“국가대표, 까짓거 다 필요 없어요.”
“명수야.”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단유 어릴 때 가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 있다고.”
“그래, 알아.”
“중학교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어서 별로 걱정한 적이 없는데, 만약 그런 경우라면 이렇게 기다릴 수 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야 한다고요.”
“······.”
“같이 가요. 차라리 저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지만, 그러면 선생님이 또 뭐라고 할 수 있으니까, 같이 가요.”
“···대표팀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설령 이번 일로 경기를 뛰지 못한다고 해도, 저 아직 어려요. 더 기회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단유는 아니잖아요.”
명수의 확고한 의지와 명확한 대답에 하은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상미야.”
“······.”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어, 미안해. 그래도 나한테는 누구보다 가족이 우선이야. 알지?”
“···알아.”
“그럼, 넌 집에서 기다려. 내가 선생님 모시고 다녀올게.”
한참을 고민하는 듯 싶더니, 결국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도 단유는 가족 이상이야.”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해 준거지. 다 알아.”
“···조심해서 다녀와.”
“응.”
“연락 자주하고.”
“알았어. 내가 하든, 선생님이 하든 연락 자주할게.”
남겨진 사람이 불안하지 않도록. 명수는 상미를 가볍게 안아준 뒤, 하은에게 말했다.
“가요, 선생님.”
****
단유가 있었다는 산에 올라가, 그의 차를 발견했을 때는 잠깐 섬뜩한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차체 위로 설핏 쌓인 눈이 얼어붙은 모양새라 명수는 속 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유리창에 낀 얼음을 손으로 긁어 안을 들여다본 뒤, 하은에게 고개를 저은 명수가 폐가가 있던 방향으로 올라갔다.
“선생님, 길이 미끄러워요.”
“그래, 알았어.”
경사도 어느 정도 있는 데다가 자국눈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한 산길이라 하은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옆에서 하은을 부축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서 확인하고픈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인지 하은은 명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먼저 올라가. 난 천천히 따라갈게.”
“조심하세요.”
명수는 사양하지 않고 먼저 위로 올라갔다. 바싹 마른 잎사귀가 스칠 때마다 옷깃이 젖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올라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처럼, 마치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같이 반이 잘려 안을 내보이는 폐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유야! 단유야!”
코끝이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을 따라 명수의 목소리가 곳곳으로 울려 퍼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 근처로 다가가니, 때마침 2층 난간에 아슬아슬 달려있던 고드름이 떨어져 내리며 동시에 쌓였던 눈이 잘게 부서져 흩날렸다.
“명수야, 위험해.”
“괜찮아요.”
명수가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집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었고, 그에 맞춰 쌓인 눈이 떨어져 내리며 명수의 시야를 가렸다.
“그만 나와.”
“위에만 올라가 볼게요.”
설마 이 위험한 곳까지 단유가 올라갔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명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발에서 느껴지는 약한 저항을 느낄 때마다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올랐음에도 단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요, 선생님.”
“응.”
“단유는 왜 여길 사려고 했을까요?”
“······.”
하은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단유가 이유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상정해보면, 분명 이곳에 뭔가 특별한 것, 혹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그 이유를 알아낸다면, 지금 단유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은은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