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41화 (641/956)

너의 곁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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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은 후부터 태도가 바뀐 양 실장에게 단유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 마당에 뭔갈 알아보겠다는 건 무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저기요.”

“네?”

“진짜···여기 사실 거예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이는 경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단유의 시선에 경숙은 자신이 속물이 된 것 같아 괜히 창피한 마음도 있었지만, 창피함보다 돈이 우선이었다.

“그건 거래하기 나름이죠.”

“말이 좀 그렇네. 내가 땅주인이라니까? ···내가 원래 여기 이 땅을 안 팔려고 했어요. 여기가 생각보다 입지가 좋거든. 그쪽이 여기, 뭐 귀신? 이런 거 때문에 관심이 많은 거 같은데, 내가 안 팔면 어쩔건데요? 그렇죠? 설마 가격 후려쳐서 살 생각, 그런 거 아니지?”

존대와 하대를 오가는 그녀와 계속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고픈 욕망과, 땅을 팔아서 한 몫 챙기려는 욕심, 그 둘이 뒤섞인 지저분한 눈빛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악의보다 더 불쾌한 느낌이었다.

“거래는 쌍방의 합의로 이뤄지는 것이죠. 아주머니가 팔기 싫다면 안 파셔도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단유는 돌아섰다. 경숙이 급하게 단유를 불러세웠다.

“이봐, 학···아니, 그쪽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편한 대로 부르세요. 다시 볼일도 없을 텐데.”

다시 볼 일이 없다는 말이, 마치 거래를 하기 싫다는 말인거 같아 경숙은 더더욱 단유의 속을 읽기 힘들었다.

“조금 전에 여기 사겠다며?”

“가격이 맞으면 산다는 거지, 굳이 억지로 살만한 땅은 아니죠.”

“아니, 그래서 산다는 거야, 안 산다는 거야? 확실하게 말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헷갈릴 게 뭐 있습니까. 팔 생각이 있으면 파시고, 팔기 싫으시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별장을 짓든, 뭘 하든 알아서 하시면 되죠. 제 뜻이 중요합니까?”

“젊은 사람이 말버릇이 고약하네. 그게 어른을 대하는 태도야? 응?”

또 이런 패턴이네.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며,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고 단유는 생각하며 볼을 긁적였다.

“양 실장님?”

“네, 네?”

“통화 하셨죠?”

“이봐, 총각. 나랑 이야기하다 말고 뭐야?”

단유는 무시하고 양 실장에게 말을 던졌다.

“이 근처에 매매되는 땅이 설마 여기 하나 뿐인 건 아니죠?”

양 실장이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통화 상대가 서울의 유명 PB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눈앞의 젊은이를 상당히 존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게 신종 사기가 아니라면, 저 눈앞의 사내는 분명 큰 손인게 분명했다. 금수저든, 자수성가든, 뭐든.

“물, 물론이죠.”

“지금 뭐하는 거예요?”

경숙의 날선 목소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못했다.

“이런 야산이면 되요. 적당한 곳을 소개해주시고 공PB님에게 전화주세요. 그분께서 매매 대신 진행하실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양 실장!”

양 실장은 경숙의 팔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사모님. 사모님도 진정하시고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사모님도···솔직히 파실 생각 있으셨잖아요? 마침 이렇게 매수자가 딱 맞춰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요. 이건 사모님한테도 좋은 기회시니까, 진정하세요.”

그 사이, 단유는 여전히 비석처럼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박사에게 가서 말했다.

“이제 날도 어두워지는데 그만 내려가시죠.”

“아니, 그게.”

“차는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태워드릴게요.”

“아니, 차는 저기 집 뒤에 세워놨어요.”

그제야 공터에 차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왔던 건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기 저 많은 장비들을 맨손으로 짊어지고 올라왔을 리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아니, 근데, 진짜 사려고요? 여기?”

“되면요.”

박사는 뭔갈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단유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중에 전화할게요.”

단유는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임으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경숙의 옆을 지날 때, 경숙이 예의 도끼눈으로 단유를 째려보면서 붙잡으려 했지만, 양 실장이 경숙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린 덕분에 단유는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

―정말 살 건가요?

“일단은 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전에 제가 조언해 드릴 때는 별 관심을 안 보이시더니.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강원도의, 그런 야산을 사겠다는 건가요? 단유군 정도면 서울 외곽지역 쪽에 투자해도 좋을 텐데.

“투자 목적은 아니니까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그런 곳을 찾다보니 마침 눈에 띄어서 말한 거니까, 보시고 대신 판단해 주세요. 그리고 만약에 상대가 너무 무리하게 가격을 부르면 사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아까도 들었으니, 그렇게 진행할 겁니다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아쉽네요. 거기는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전혀 쓸모가 없는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네, 알아요. 어쨌든 부탁드릴게요.”

단유는 통화를 마무리한 후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어둑해진 강원도 하늘 아래서 밤을 새게 생겼다.

금방이라도 입산통제를 시킬 듯 하더니, 그대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포장도로를 비추며 올라가던 중, 문득 정말 이 산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늘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면, 이렇게 고집스럽게 산을 오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미 단유가 할 건 다 했고, 낮에도 와서 대충이라도 살폈으니 더는 올라올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아직 뭔가 남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간, 차를 공터에 주차 시킨 후 시동을 끄자 실내등이 켜진 차 바깥이 모두 어둠으로 가득 찼다. 글로브박스에서 손전등을 꺼내 손에 쥐고 차에서 내리니, 낮에는 질척거렸던 땅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신발로 땅을 쿡쿡 밟아본 뒤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다.

겨울이라 그런지, 벌레 하나 없는 모양이었다. 소음을 내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 주위는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공터를 나와 폐가로 향하니 길옆에 삐져나온 풀잎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와 얼어붙은 땅을 딛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예전에도 밤에 혼자 왔었지만, 오늘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산속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하얀 입김을 뿜어내길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건물 앞에 당도했다.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춰 보니, 음영이 부각되어 음산함이 더했지만, 단유는 개의치 않았다.

박사는 위험하다며 오르지 못하게 했던 2층을 올라가니 반쯤 무너진 집이 비명을 질렀다. 무시하고 2층 안쪽 방으로 들어간 단유는 손전등으로 방 안을 비췄다. 매트리스가 있던 자리는 주변과 색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곤 특이한 점이 없었고, 그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뭘까? 도대체 뭐가 날 다시 오게 한 걸까?’

예전에 읽은 책 내용 중에 그런 게 있었다. 간혹 눈으로 인지하고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 장애’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요컨대, 단유의 무의식에서는 정답을 알고 있는데, 그 정답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답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상관이 없는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정답을 몰라 답답한 상황이 바로 단유가 직면한 상황이었다.

그 정답을 알기 위한 실마리가 바로 이곳에 있다고, 단유의 직감이 말했다.

그러나 집 안, 나와서 바깥을 모두 살펴보아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인내심 강한 단유지만 아무리 살펴도 알 수 없으니, 절로 이를 악물게 되었다. 낮이 아니라면, 밤이 답일 수도 있다 여겼는데, 이렇게 해도 알 수 없다면 계속 답답한 마음을 안고 있어야 한다. 모르는 수학 문제가 나오면 답지를 살펴보든, 인터넷을 찾아 풀이 방법을 찾든 해보겠지만 지금은 어떤 도움도 구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움푹 파인 땅 한가운데 서서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 보던 단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법을 사용했다.

‘해체.’

질량을 가진 물질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해체가 가능했다. 눈으로 관측하기 힘든 미세 먼지 따위라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지금 단유가 밟고 있는 땅은 눈에도 보이고, 질량도 충분히 가진 물질. 당연히 마법이 적용되는 대상이었다.

발밑에서 빛이 솟구쳤다. 뿜어져 나온 빛은 단유를 감싸고 지나가더니 주변을 눈부시게 밝혔다. 그것은 일순간이었고, 이내 사위는 어둠에 먹혔다. 혹시나 하는 변화를 기다렸으나, 어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단유는 처음으로 포기를 생각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단유였지만, 단유가 알지 못하는, 혹은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가. 그 문제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였다. 포기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미뤄둔 문제들이 단유의 개인 노트에 수십 개씩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너무 막연했다. 단 하나의 실마리만 찾으면 정답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하나를 찾는 게 어렵다.

‘그래. 이렇게 매달릴 일만은 아니었잖아?’

초자연적 현상을 보고 흥미, 혹은 호기심을 느꼈지만, 그것이 단유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호기심을 느끼게 했던 대상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당에 지금 단유가 하고 있는 건 불필요한 집착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너무 마법 실험에만 몰두하다보니 그 외의 것들에 정상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열심히 합리화 과정을 거치던 단유는 자신이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결론이었지만, 답지 않게 감정적인 느낌에 이끌려 온 것일 뿐이다. 정신 차리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

하늘에서, 아니 공중에서, 아니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 소리인 것도 같고, 천이 부딪치는 소리인 것도 같고, 아무것도 아닌 이명(耳鳴)인 것도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단유는 곧 어떤 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에 보았던 하얀 안개를 닮은, 정체를 알 수 없던 그것과 다른 ‘무엇’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그것을 발견한 단유는 시선을 고정하고 그 정체를 알기 위해 애썼지만 너무 멀어서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걸음을 떼어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손전등을 비출 때보다 아래로 내렸을 때가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손을 내렸다. 마치 디딤돌처럼 발 아래를 비추는 손전등 불빛 위를 걷던 걸음이 멈춘 것은 희미한 그것이 진하게 보일 무렵이었다.

‘어?’

하얀 입김이 짧게 토해지던 그 순간, 좀처럼 놀랄 일이 없던 단유가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라고 생각했던 그것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게 왜?’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친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한때 익숙하게 느꼈던,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생소한 나무껍질의 질감. 손으로 쓸어내렸더니 꺼끌꺼끌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허리께에 이르러 밖으로 돌출된 뭔가가 손에 잡혔다. 단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붙잡고 당겼다.

훅, 하고 밀어닥친 탁한 공기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낮은 천장과 벽에 걸린 낡은 외투, 말린 과일, 시든 꽃처럼 낡고 마른 풀 묶음. 두꺼운 통나무를 잘 가공해 만든 낡은 의자, 식탁, 한쪽 구석에는 시커먼 입을 쩍 벌린 형태의 벽난로.

쿵, 등에 닿는 충격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고 있었던 모양이라 통나무를 촘촘히 박아 만든 벽에 부딪쳤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주변을 살폈지만, 어둠 속에서도 눈에 익은 이 공간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주 오랫동안 오지 못했던, 고향 빈촌의 그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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