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곁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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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유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혹시 그 이야기 들었어?
“앞뒤 설명 없이 무턱대고 들었냐고 물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진짜 정 없게 말한다. 딴 게 아니라, 우리 촬영갔던 곳 있잖아? 흉가 말이야.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내용은 짐작가능했다. 그리고 짐작한 바와 같이, 유진은 제작진으로부터 흉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반파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너무 놀라서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정말 귀신이란 거 있었나 봐? 나 거기 계속 있었으면 어떡할 뻔 했어? 작가 언니가 그러는데 말야….
꽤 흥분한 듯 이어지는 유진의 수다의 끝은 나중에 같이 한 번 가보자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같이 가볼래?”
“싫어.”
“너무 즉답인데? 안 궁금해? 우리 갔던 곳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데? 너 그런 거 되게 궁금해하는 성격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이번엔 그다지 내키지 않네. 할 일도 있고.”
“나랑 같이 가기 싫은 건 아니고?”
“응, 아냐.”
굳이 말하자면, 같이 가기 싫은 건 아니다. 그날은 그냥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빨리 돌아가야 하기도 해서 자리를 떠났지만, 다시 한번 돌아가서 정말 제대로 마무리가 되었는지 검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혼자서 해야 할 일이었지, 누군가를 곁에 두고 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들어보니 한동안은 제작진, 혹은 그 집에서 벌어진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 때문에라도 가긴 힘들 거 같았다. 물론 방송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들로 주위가 혼잡해질 가능성이 있으니, 그 전에 가야 편할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즉, 타임리미트가 정해진 미션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단유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며칠간 단유는 여느 때와 같은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겨울은 더 깊어져 갔다. 집 앞에는 자주 빙판길이 생겼고, 그래서 그럴 때마다 단유는 새벽마다 제설작업을 해서 매일 출근길을 나서는 하은이 혹시라도 상미처럼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대비했다.
또, 그 사이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명수를 찾아가 격려를 하기도 했고, 주말에 하은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새벽과 유영을 데리고 예영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오랜만에 출판사를 찾아가 일거리를 받아오기도 했다.
****
“후우.”
단유는 길게 숨을 토해내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딱히 시간을 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욕심을 내서 시작했는데 다행히 마칠 수 있었다. 단유는 좌우로 고개를 까닥거린 뒤, 화면에 떠 있는 폴더에서 파일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러자 곧 프로그램 하나가 실행되더니, 화면에는 두 개의 분할 모니터링용 화면과 두 개의 그래프가 떠올랐다. ‘룸1’이라는 이름으로 메뉴를 세팅하고 실행버튼을 눌러 방에 설치된 장비들과 동기화를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설치된 장비들을 눈으로 훑은 단유는 장비가 둘러싸고 있는 특수 상자 안의 물질을 ‘해체’시켰다. 마법 이후의 반응을 장치가 잘 감지하는지, 그리고 잘 기록하는지 확인한 후에야 단유는 컴퓨터에서 벗어났다.
‘끝났네.’
이름 붙이길, ‘자동 감응 기록 시스템’이라고 명명한 측정 시스템을 겨우 완성했다. 이제 따로 조작할 필요 없이, 장치에서 컴퓨터로 입력되는 신호를 정리하거나 저장한다. 그리고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값을 내는 것까지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을 해 놓았다. 이로서 단유는 필요할 때 찾아 듣기만 하면 된다. 물론 완벽한 프로그램이라고 자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단유에게 가장 필요하고 유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새 프로그램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실험에 열을 올렸더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재미있다고 계속 매달렸다간, 어렸을 적 명수가 새 게임을 사서 그랬던 것처럼, 밤새는 줄 모르고 실험에만 매진할 뻔했다. 다행히 그 전에 정신을 차리고 자제하면서 단유는 늦지 않은 시간에 침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단유는 천장을 바라보며, 다음 일을 생각했다.
****
다음 날, 단유는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하은에게 외박을 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여자 친구 생겼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혼자 바람 쐬러 가는 거예요.”
“정말 바람이라도 난 것 같네. 하지만 좋아. 넌 밖으로 돌아다닐 필요가 있어. 매일 집에서 책만 보니까 피부가 나보다 더 하얘진 것 같잖아.”
“저 자주 나간 것 같은데요?”
“아 몰라. 난 못 봤어.”
“매일 아침마다 운동도 하는데요?”
“아, 몰라. 그냥 나가.”
어쨌든 허락이라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강원도에 가는 길에 단유는 흉가에 들르기 전, 먼저 곧 제대를 눈 앞에 둔 말년병장 친구의 면회를 하기로 했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 1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래도 이 시기에 면회 오니까 좋다.”
“그럼 다행이고.”
단유는 사가져 온 것들을 채윤에게 건넸다.
“소대원들이랑 나눠 먹어.”
“고맙다. 그런데 너, 학교생활은 어때?”
“뭐가 어때?”
“우리보다 어린 애들이랑 동기잖아?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런 애들이 있긴 했는데, 가끔 개념 없이 구는 애들 있잖아? 그런 애들 때문에 힘든 건 없었나 하고 말이야.”
“전에 말했잖아. 나랑 친하게 지내는 애들 있다고. 걔들 덕분에 딱히 문제는 없었어.”
“나 제대하면 바로 복학해야 할 것 같은데, 고민이다. 요즘 취업하기도 힘들다는데.”
“복학하기도 전에 취업 걱정은 너무 이른 거 아냐?”
“뭘 모르는 소리하네. 너야 서울대니까, 취업 걱정이 없을지 몰라도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대학 입학부터 졸업 때까지 취업 걱정만 해야 한다고.”
“서울대라고 다를 건 없더라.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
취업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어서 단유는 화제를 볼렸다.
“제대하면 복학 말고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가끔 학교에서 복학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복학 전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던데, 만약 채윤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금전적으로라도 지원해 줄 요량으로 물었다.
채윤도 생각을 많이 했던 모양인지, 단유의 물음에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1학년 때 빠졌던 수업들 다시 들어서 학점도 올려야 하고, 이왕이면 장학금을 받으려고 해야지. 후배들도 좀 챙겨주고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알바도 좀 하고. 너 정도는 안 되더라도 과외 알바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지금은 노가다를 뛰어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이거 보이냐?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너 보면서 난 안된다, 생각했는데 군대 오니까 몸이 이렇게 달라지더라고. 진짜 안 되는 건 없는 거 같아. 군대 다녀온 사람은 다 공감할걸?”
전역하고 나서도 헬스를 다니며 몸 관리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채윤. 10분 정도 군대 이야기를 하다가 10분 정도 알바 이야기를 하고, 30분 정도 여자 신입생에 대한 기대감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는 나 휴가 나가서 보자. 그때는 술 한잔하면서 못한 이야기 하자고.”
이른바 ‘투머치토커’가 된 채윤의 말년 휴가 계획을 더 들은 후에야 단유는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흉가로 가는 동안, 단유는 채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평범한 20대 청년이 가지고 있는 고민,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들이 친구의 이야기에 모두 들어있었다. 새로울 게 전혀 없는 이야기들이긴 했다. 지난 1년간 술자리에서, 강의실에서, 새벽과의 수다 중에서 종종 듣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수차례 반복된 대화들 속에서 단유는 자신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은 해도 공감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새롭게 깨달았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예전부터 또래 친구들, 혹은 갤럭시즈나 도연과 같은 연예계 사람들, 또 살면서 마주쳤던 몇몇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단유가 제대로 공감한 경우는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단유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고 가끔은 생각을 밝혀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했다. 아니, 진짜 해결이 됐는지는 자신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심성의껏 그들의 대화에 임했다고 자신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단유의 그런 면을 잘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무리한 부탁을 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잘 들어주니까. 속없이 대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물론 단유도 딱히 문제만 없다면 그 부탁들, 고민들을 들어주는 편이긴 했다. 그들에겐 어려운 일들이라도 단유에겐 별거 아닌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친구들은 확실히 달랐다. 채윤도 그렇고, 얼마 전 상미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경향들이 있었다. 상미도 단유가 채근하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안 했을 것이다. 그때도 단유가 예민하게 바깥의 기척을 느꼈기에 들킨 것이지, 상미는 단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움직이던 중이었다. 바보같이.
채윤도, 어쩌면 단유가 어떤 의도로 복학 후 계획을 물었던 건지 눈치를 챘던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단유와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들이기에, 단유가 감정적인 소통에 있어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알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이기에 더욱 단유를 배려한다.
그래서 단유는 친구들이 소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행을 다니면서 느꼈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 만났던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 점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게 좋았고, 친구들 외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꺼려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더 친구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고민과 걱정이 있을까 봐 더 표정을 살피고, 그들이 해준 것 이상으로 배려하려 애를 쓴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낯익은 시내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내리니 벌써 저녁때라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 번에 왔을 때와 다른 점이라면 가장 먼저 눈에 띈 게,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 쌓인 하얀 눈이 쌓인 광경이었다. 그나마 요 며칠간 눈이 내리지 않았던 탓에 비포장도로를 올라올 때 땅이 꽤 질척이긴 했지만, 통행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촬영 이후에도 이곳에 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비록 흙과 뒤섞여 진창이 된 곳이 더러 있었지만, 눈이 많이 녹아있던 상황이었다.
‘걷기 힘들겠는데.’
옷이 많이 더러워질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단유의 걸음을 늦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이라면, 공터에서 올려다봤을 때 보이던 건물의 외형이었다. 건물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단유였던 만큼, 지난 새벽에 그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해가 떨어지지 않은 낮에 보는 건 또 달랐다. 특히 붉은 노을에 물든 건물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번보다 더 무섭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얀 입김을 공중에 뿌리며 올라가니 언덕에 가려졌던 건물의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덜 녹은 눈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고, 그 수만큼이나 많은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얼어붙은 바닥에 화석처럼 붙어 있었다. 문득 떠난 자리도 깨끗한 선진 사회, 라는 경구가 생각났다.
어쩌면 단유 본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었다. 일을 벌였던 그 새벽에 제대로 마무리를 했었다면 두 번 걸음을 할 일이 있었을까?
또 생각을 이어보면, 역시 아까 차에서 생각했던 것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유령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를 대했던 단유의 태도는, 솔직히 말하면 그 존재를 집에서 벌어졌던 어떤 일로 인해 생성된 무언가로 인식했을 뿐, 그 존재가 ‘왜’ 생성되었는지, 그 사정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다시 올 마음을 품었을 때도 단유는 그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를 확인하고픈 마음이었지만, 오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니 조금은 변덕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어떤 사정으로 인해 그런 일을 겪은 것일까? 알아보고 싶어졌다.
물론 ‘그것’이 여전히 집에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