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곁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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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텔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떠올라 사방이 밝아진 후였지만, 유진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간밤의 일로 피곤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잠을 청하는 건 무리라 여겨 단유는 호텔 내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푹신한 소파형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안 자네?
“깼어?”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였는데, 유진은 괜찮다며 단유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커피숍이라고 했더니 오늘 하루 동안 놀려면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며 씻고 내려가겠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동안 돌아다니겠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딜 가서 무엇을 보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계획을 짜서 돌아다녀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내 관둬버렸다.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그냥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든 때문이다.
그 충동이 그날 하루 단유를 그토록 괴롭힐 줄 몰랐기에 단유는 그때까지도 여유롭게 카페인을 흡수하며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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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와 유진 모두 강원도의 지리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어디를 가서 무엇을 구경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일단 발이 닿는 대로 가보자며,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빙을 시작했다. 비록 겨울 바닷바람이 거셌지만, 화창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에도 여전히 두 사람은 해안가를 달릴 뿐이었고, 뒤늦게 식당을 찾으려 할 때는 날이 흐려지더니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과 섞여 불어닥친 눈보라가 거세질수록 유진의 얼굴도 슬슬 굳어가기 시작했다.
“서울엔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오늘 하루 일정은 빼놓았다지만, 내일은 내일의 스케줄이 있는 유진이었기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눈이 더 많이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돌아가자.”
“진짜 미안해, 단유야.”
“니가 왜 미안해? 니가 눈 내리게 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유진은 창밖에 둔 시선을 단유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럼 다음에도 나랑 같이 오는 거?”
“···왜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야?”
“오늘만 날이 아니라며? 다음에도 우리 함께 하는 날이 있다는 말 아냐? 문맥상 당연히 그렇게 해석되어야 하는 거 아냐?”
“선 넘지 말랬다.”
“너 너무 철벽 치는 거 아냐?”
“양자 역학에 상보성이라는 개념이 있어.”
“응? 그게 뭔데?”
“양자적 실체는 모든 속성을 동시에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야.”
“···무슨 말이야?”
“복잡하게 설명하면 어려우니까 간단히 설명한 예를 들자면, 전자를 상자에 넣어 둘로 쪼갠 뒤, 그 둘을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 보내는 거야. 당연히 전자는 두 상자에 모두 존재하겠지? 그런데 누군가가 한 상자를 열어 전자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전자는 한 상자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이야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선만 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괜찮다는 거지.”
“하아. 모르겠다, 너란 남자.”
“좀 더 자. 많이 피곤할 텐데.”
“너도 피곤하지 않아? 좀 쉬었다···.”
단유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아 유진의 말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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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온 뒤, 단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전에 박사에게 받았던 연락처를 통해 단유가 가진 것보다 좀 더 좋은 기능의 장비들을 구입하였고, 지하실 한편에 설치하여 소소하게나마 실험실과 같은 구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는 이전과 같은 실험과 공부의 연속이었다. 좀 더 경계심을 갖고 실험에 임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달라질 게 없는 일상이었지만, 조금씩 쌓이는 데이터와 조금씩 조율되기 시작하는 ‘해체’ 마법의 힘에 단유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렇게 지하실과 방, 그리고 가끔 학교 도서관엘 가는 일상 속에 해가 바뀌었다. 새해 첫날이 밝았어도 단유의 일상은 크게 변할 일이 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 명수까지 참석한 크리스마스 축하 겸 연말 회식 모임을 가졌기에 따로 가족행사를 할 일도 없어, 단유는 방에 들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나 읽으며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득 바깥이 꽤 분주해진 느낌이라 신경이 쓰여 문을 열고 나가 1층을 내려다보니, 상미가 TV 아래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고 그 주변을 두 마리 개들이 킁킁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뭐 찾아?”
단유가 묻자, 상미가 깜짝 놀란 듯이 움찔하더니 위를 쳐다보았다.
“놀랐잖아. 방에 있었어?”
“응. 근데 뭐 찾아?”
“어. 약 상자.”
“왜?”
“밖에서 넘어졌어.”
“···칠칠치 못하긴.”
“밖에 되게 미끄러웠단 말이야. 길이 얼어서.”
단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 상자를 찾아다 주었다.
“어디 다쳤는데?”
“내가 할게.”
단유는 상미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손부터 씻고 와. 더러운 채로 약 바르면 덧나잖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유는 단호하게 지시했고, 상미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욕실에 가서 손을 씻고 나온 상미를 소파에 앉힌 후, 손바닥을 펼치게 했다.
“···너 오늘은 게임 못하겠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뭘 못해. 조금 까진 건데.”
단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바닥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말처럼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집에 있는 약으로도 충분해 보이긴 했으니 단유도 더는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뭐 살 게 있었어?”
그러고 보면 상미도 단유와 분야가 다르다뿐이지 평소의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히 누굴 만나러 나가지도 않았고, 거의 집에서 방송하다가 피곤하면 잠을 자고, 깨면 다시 방송을 켜는 일상이었다. 필요한 것들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갑자기 마실 것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이유로 편의점을 가는 일이 아니면 거의 나가지 않는 상미와 단유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말끝을 흐리는 상미였다. 말하기 곤란해 하는 눈치라 단유도 더는 묻지 않고, 상처 부위를 거즈로 감아주었다.
“또 다친 데 있어?”
“무릎도···. 그런데 그건 내가 할게.”
“그래.”
단유는 약 상자를 그녀 앞에 밀어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상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소홀했던 걸까?’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해 있는 듯 보이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느꼈던 일이지만, 상미는 자신의 고민을 쉽게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터넷 방송이라는 자기 일을 고집한 탓인지, 부모에게도 자기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은 늘 즐겁고 쾌활한 모습으로 하지만, 방송이 끝나면 진이 빠진 모습으로 나와 물 한잔을 마시고 들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괜찮냐 물으면 그저 피곤해서 그렇다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그런 일이 반복되니 그마저도 익숙하게 느껴져 안부를 묻지 않게 되었다.
사실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지만,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단유는 그런 생각을 잠시 가져보며 상미에게 물었다.
“혹시 요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아니, 문제는 무슨···.”
그저 가벼운 대화로 잠시 소통을 해볼까 생각했던 마음이었는데, 상미의 반응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뭔데, 이야기해 봐.”
상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상자를 정리하고 돌아가려는데, 단유가 상미를 붙잡았다. 상미는 고심하는 얼굴로 단유의 시선을 피하다 결국 실토했다.
“그런 걸 당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조금 전과 달리 단유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기대어 상미를 보았고, 상미는 금방이라도 석고대죄를 할 준비가 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얼만데?”
“···이백만 원.”
“돈 많구나, 너.”
“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이 와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니, 꽤 여유가 생겼나 보네.”
“그런 게 아니고···.”
상미는 다시 의기소침한 얼굴이 되어 괜히 약상자 속의 내용물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상미는 방송 중에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평소에는 방송 중에 전화가 와도 잘 받지 않는데, 왠지 전화벨이 불안하게 느껴져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상미는 고백했다.
―어머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저희 병원에 입원하셨거든요.
“네?”
상미는 당황했고, 얼른 송출되던 마이크를 껐다.
“어딘데요?”
―경기도 ××병원입니다.
사무적인 여성의 침착한 말이 오히려 상미를 더 당황케 했고, 급히 인터넷 창을 열어 병원의 이름을 쳐 실재하는 병원임을 확인했을 때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금 긴급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안 계셔서 부득이하게 전화로 구두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네, 네.”
이미 그때, 상미는 급히 옷장에서 외투를 걸치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어머님 수술하실 때, 필요한 약이 있는데 그게 꽤 비싸거든요? 그래서 지금 소정의 금액이 입금되어야 하는데 가능하신가요?
“네? 네? 얼만데요?”
이미 인터넷 뱅킹을 위해 은행사이트를 연 상미. 손은 눈보다 빠르다던가?
“자랑이다.”
단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다친 건 서둘러 병원 가느라고 그랬던 거야?”
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부르지 그랬어?”
상미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경찰은?”
“······.”
“연락했어?”
“···아직.”
상미는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로 가던 중, 빙판길에 미끄러지며 다쳤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고 했다. 그리고 택시에 타서 병원의 이름을 대고 마음을 졸이던 중, 핸드폰에 시선이 갔단다. 그리고 아버지의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시도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받으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갑자기 소리를 치는 바람에 택시 기사분이 놀라기도 했다고.
그다음은 그냥 흔한 희극 극본, 아니 이제는 식상해서 쓰이지도 않을 해프닝이 이어졌다.
―너희 엄마? 지금 옆에서 밥 먹고 있는데?
거기까지 이야기를 털어놓은 상미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진짜 우리 엄마 어떻게 된 줄 알고···.”
잘해준 것도 없이 속만 썩였는데,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도 한 달 전이었는데, 왜 자주 전화를 못 했을까 후회돼서 자기한테 화도 났는데,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면 어떡하냐고, 그래서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이어지는 말들은 울음이 반쯤 섞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상미가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단유는 상미가 좀 더 울면서 마음을 풀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 전화를 넣었다. 당사자가 직접 경찰서에 방문해서 사실관계를 진술해야 한다고 해서, 단유는 함께 가겠노라 말을 남긴 뒤, 상미에게 돌아갔다.
“그놈들, 너무하지 않냐? 고작 200만 원 등쳐먹으려고 사람을 그렇게 상처 주고 후벼 파는 짓을 하냐? 사람이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슬픔이 지나고 난 뒤에는 분노인 걸까?
이후에 단유와 상미는 함께 경찰서를 방문했고, 상미는 피해신고 후 ‘사건·사고 사실확인원’을 받았다.
“좀 더 빨리 전화를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계좌의 돈이 인출된 상태라 지급정지 신청은 어렵네요.”
보통 피해를 당하더라도 30분 내에 은행에 지급정지 요청을 하게 되면 피해 금액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미 그 시간을 택시에서 다 보냈던 상미였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요즘 또 보이스피싱이 성행하는 추세예요. 뭐, 당한 당사자분이야 힘드시겠지만, 일단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꼭 붙잡도록 하겠습니다.”
단유는 어쩐지 기계적으로 하는 인사말처럼 느껴져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에 이곳에서 뭔갈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단유는 상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남은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