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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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단은 이것부터.’
단유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내딛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다고 느껴졌다.
적막을 깨뜨리는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지나 방에 들어갔을 때, 이제는 약간 동정심마저 느껴지기 시작한 하얀 덩어리가 단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 뒤집어 놓은 매트리스 위의 얼룩. 아마도 제작팀이 이것을 발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 봤다면 출연자들에게 뭐라도 언급을 했을 테니까. 말하자면 원래 그들이 왔을 때부터 뒤집혀 있었다는 뜻이고, 이는 곧 이전에 누군가가 이 매트리스를 뒤집어 놓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추정컨대 그 누군가는 아마도 이 얼룩을 만들어낸 이와 동일인물이지 않을까? 얼룩이 만들어진 것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동물의 흔적과 문틀에 난 흠집들.
누군가 이 집을 사용했다. 매트리스의 모양과 브랜드를 봐서는 아주 옛날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단유의 나이보다 오래된 것은 아니리라. 이 집에 사람이 살 때 있었던 일일 수도 있고, 빈집을 은신처로 사용한 누군가의 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 방에 감금시켜 놓았던 것 같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혼내주겠다고 협박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단유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끝은 이 매트리스 위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단유를 지켜보는 하얀 덩어리가 바로 그것일까?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원령(怨靈)? 혹은 지박령? 그런 것일까?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무슨 퇴마사라도 된 것처럼 구는 모습이 스스로 우습게 느껴졌다.
“넌, 사람이니, 동물이니?”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동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쩌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을 뿐, 그 의지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단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었고. 그러니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너의 원한?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런 걸 풀어줘야 하는 걸까?”
역시나 대답이 없다. 물론 대답을 원하지도 않았다. 창밖을 잠시 바라보니, 아까보다 조금 밝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오긴 했으나,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단유는 하얀 덩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아니면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처음으로 하얀 덩어리가 반응을 보였다. 슬쩍 꿈틀거리나 싶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안개가 옅어지듯 희미하게 변하는 하얀 덩어리를 보며, 애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없으면 될까?”
그게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유는 그게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족쇄처럼 느껴졌다. 과거를 붙잡고 끌어당기는 매체인 것처럼. 마치 단유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유품처럼. 그리운 아버지의 유품인 동시에, 고향을 추억하게 만들고 단유에게 벌어졌던 슬픈 일들을 끊임없이 되뇌게 만드는 그것. 다른 점이라면, 단유는 그것을 버릴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영원히 곱씹어야 할 아픔인 것이다.
‘집중하자.’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불쑥 치미는 이유는 아까 깨달은 일의 여파이리라.
단유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는 듯, 하얀 덩어리는 지르던 비명을 멈췄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그가 보여준 여러 의미 중 가장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몸짓이었다.
단유는 매트리스를 바라보다, 여기서 그것을 사용해선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제껏 이렇게 큰 물건을 상대로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열과 빛이 나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우라늄과 같은 방사능 물질이 아니더라도, 저 정도 질량의 물체를 한 번에 해체하면 적지 않은 에너지와 셀 수없이 많은 입자들이 발산될 게 뻔하니까.
단유는 팔을 걷어붙이고 매트리스를 붙잡았다. 뒤집을 때도 느꼈지만 무게가 좀 되는 매트리스였다. 아무래도 요즘 제품들 같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먼지나 습기를 잔뜩 머금은 터라 그럴지도 모른다.
끙끙대며 매트리스를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낮 촬영 당시 오프닝을 촬영했던 집 앞 넓은 마당에까지 매트리스를 가지고 나오니 새벽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당에 내려놓고 단유는 주변을 살폈다. 좋은 말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돕는 일이라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유 본인도 이 정도의 물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단유는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해체’
이미지를 그려내고 대상을 향해 의지를 투영하자, 대상체―침대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밀려든 빛의 무리로 인해 단유는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리고 후끈한 열폭풍이 밀려 들어와 단유를 덮쳤다. 만일에 대비해 ‘해체’ 마법을 사용하기 전, 미리 바람의 벽을 둘러놓았는데도 열 폭풍을 모두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듯, 온몸으로 느껴지는 열기를 막아내기 위해 단유는 몸을 비틀었다.
그 와중에 아득해질 정도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열기와 빛무리가 겹쳐 단유의 감각을 뒤흔들었다. 마치 폭탄이 떨어지는 한가운데 맨몸으로 섰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였다. 나름 준비하겠다고 거리도 두고 바람의 벽을 쳤음에도 이러니, 다른 무엇을 대상으로 했다면 어찌했을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다.
눈은 뜨기가 힘들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며, 바닥마저 흔들리는 듯 해 주저앉아서 이 현상이 끝이 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착각이지 싶어서 단유는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단유는 눈을 떴다. 하얀 캔버스 위에 홀로 선 느낌이 드는 공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단유는 살짝 당황했다.
어디지, 라고 묻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함은 감춰뒀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단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남자 아이, 아니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누군가가 흰 바탕보다 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빨간 입술이 아주 매력적인 아이는 단유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걸?”
“누구시죠?”
“고작해야 하나에 하나를 더 하면 둘이 된다는 정도밖에 모르던 아이가 말이야. 드디어 진리의 조각에 손이 닿을 만큼 성장했다는 게, 놀랍고 기특해.”
대답은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아이를 처음 보았다고 인지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익숙함에 단유는 당황했다. 머릿속을 헤집어 과거의 기억에서 그 아이를 떠올리려 노력하는 동안, 아이는 깊은 심연을 닮은 검은 눈동자로 단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포시나르(Αποσυναρ)를 해낼 줄이야. 아마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침을 흘렸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다들 나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부러워하고 찬양해 마지않는 것이겠지만.”
“누구시죠?”
단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뭘 물어. 다 알면서.”
“······.”
“몇 번이나 마주친 사인데, 몰라보면 쓰나.”
“그렇군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 때마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하지만 외형이야 어쨌든,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저 존재의 근원. 영원불멸.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난 거였죠?”
“나도 그런 걸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몇 번째 만남이니까 이벤트라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 안 그래?”
“지금은 당신을 몇 번이나 만났다는 걸 떠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평소에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음, 그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조금 힘을 쓴 거지.”
“왜요?”
“날 기억한다는 건 반칙이거든.”
“이해가 가질 않아요.”
“난 말이야, 인간 위주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야. 날 본다거나, 나를 기억한다거나 하는 건, 그것만으로 반칙이 돼버리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거든. 만약 어떤 사람이 내 존재를 확실히 각인하고 인지하게 되잖아? 그는 나의 그 힘을 빌릴 수 있게 돼.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축복이란 거지. 자의로 주는 축복도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키득거리는 아이는, 보기엔 순박한 미소년이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절대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절대적’이라는 형용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존재.
“좋아요, 그렇다고 치죠. 그럼 이번엔 내 나타나신 거죠?”
“너의 성장을 축하해주기 위해. 조금 전에 내가 자의로 축복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몇몇에게는 내 의지로 축복해주기도 해. 내 마음이 내킬 때 하는 일이라 누군가는 변덕스럽다고 하지만, 그 변덕도 나의 존재 의의니까.”
아이는 단유에게 걸어갔다. 단유의 가슴께에나 겨우 닿을 만한 키를 가졌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이 텅 빈 공간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만큼이라 단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너에게 베푼 것이 있으니 그렇겠지만, 그래도 넌 무척 잘 성장하고 있어. 그래서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지.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더 잘 자라주길 바란다.”
아이는 손을 뻗어 단유의 손을 잡았다. 고작 손을 잡은 동작인데도 거부할 수 없었다. 손에 느껴지는 열기는 조금 전, ‘해체’마법 이후 느꼈던 열기 이상의 것이었고, 단유는 손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손을 뺄 수도 없었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감각에 매몰되어 정신을 잃기 전에, 마치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어느새 아이는 몇 걸음 물러나 있었고, 단유는 잡혔던 손을 살폈으나 그저 멀쩡하기만 한 자신의 손이었다.
“앞으로도 쭈욱 지켜볼테니 부디 잘 커다오.”
아이가 마지막 말을 남기는 듯 하여, 단유는 서둘러 그를 불렀다.
“저기요.”
“응?”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당신은···그러니까 모든 걸 다 아시는 분, 이죠?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지켜보셨던 거, 맞죠?”
“그렇지.”
“그럼, 저희 마을에서 있었던 일, 저희 가족에 대한 것도 다 알죠?”
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이의 한쪽 입꼬리가 씩, 하고 말려 올라갔다.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로구나. 그래서 늘 너를 반겼다만, 기억도 하지 못할 일을 묻는 어리석음은 주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알고 싶습니다.”
단유는 단호하게, 그러나 애가 타는 심정으로 요구했다. 아이는, 한층 짙어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내 입에서 듣긴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실이 바로 너를 성장시키는 힘이니까. 너의 성장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얻는 나로서는 그 즐거움을 깨뜨리고 싶지 않구나. 물론 네가 스스로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건 그것 나름의 즐거움이니 막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 또한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할 테니 지금 당장 말해준 들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말하기가 꺼려지는구나.”
아이는 몸을 돌렸다. 단유는 돌아선 그 아이를 붙잡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다시 돌아서며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단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것도 변덕이려니. 과연 내가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을 과연 너는 기억할 수 있을까? 나 역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완전하진 못하구나.”
아이는 단유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까와는 달리, 아이가 접근할수록 단유는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것처럼,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었다는 옛 이야기의 그것처럼.
아이는 단유와 마주 서더니, 단유의 어깨를 짚었다. 단유는 버텨낼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붉은 입술이 다가오더니, 단유의 얼굴을 지나 귓가에 머물렀다. 절로 느껴지는 아찔함 속에서 아이가 속삭였다.
그리고 단유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단유가 정신을 차렸을 때, 단유는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볼에 묻어 있던 흙들이 후드드 떨어졌다.
주변을 살피니, 집 앞의 마당이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기억 속의 주변과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었는데, 주변 지형에 비해 손바닥만큼 움푹 파인 곳에서 깨어났다는 사실과 얼마간 떨어진 곳에는 그보다 더 깊이 파인 구멍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폭탄을 맞았던 것처럼 반쯤 무너진 집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을씨년스럽기만 하던 일제 시대 목조 양식의 집이었지만, 지금은 안이 훤히 드러나게 부서져 흉물스럽게 변한 쓰레기 더미였다.
그리고 드러난 안이 육안으로 살펴질 만큼 밝아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니 절로 신음소리가 났다. 일어서서 숨을 토해내고, 바람을 일으켜 몸에 묻은 흙과 먼지를 날려 보냈다.
똑바로 서서 다시 현장을 바라보니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건 이전에 단유가 사용했던 그 어떤 마법보다 강력하기도 하지만, 또한 이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라보다,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안개 같은 존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속설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부디 좋은 곳을 갔길 순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단유는 자리를 떠났다.
늦기 전에 유진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 물론 그녀는 잠에 빠져 이 모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