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35화 (635/956)

너의 목소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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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차를 몰고 삼척으로 향했고, 그 사이 피곤을 못 이긴 유진은 잠이 들었다. 단유도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네비게이션을 조작해 인근 호텔을 찾아갔다.

“2개요.”

체크인을 하고 열쇠 하나를 유진에게 건넸을 때, 유진은 뭔가 말하려고 하다 지친 탓인지 그만두었다.

유진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 후, 단유는 다시 호텔을 빠져 나왔다. 바다에 인접한 호텔이라 그런지 차가운 12월 바닷바람이 눈을 시리게 했다.

단유는 주차장에 주차시켜 둔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호텔로 올 때보다 더 한적한 도로였다.

공터에 도착한 것은 아주 깊은 밤 중. 시간은 벌써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촬영팀은 떠나고 텅 빈 공터에는 잔불씨만 남아 있는 드럼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글로브박스에서 손전등을 꺼내 들고 차에서 나온 단유는 드럼통을 지나 건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적어도 아침까지는 돌아가야지, 마음먹고 시작했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건물에 도착하니, 사람 한 명 없는 건물은 아까와는 또 다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안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떠난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올라 새로운 방문자를 막아섰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었으니 촬영이 끝났다고 청소를 했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쓰레기를 남겼으면 남겼지. 바닥에는 장비 고정용, 선 정리용으로 사용했던 테이프의 잔해들이 뜯긴 살점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지듯 있었고, 그 밖에도 먹다 남은 빵 봉지와 누군가 정리를 하며 몰래 피우고 버린 담배 꽁초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단유는 손전등의 작은 불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소음이 마치 왜 돌아온거냐고 되묻는 거 같았다. 그만 돌아가, 네가 있을 곳이 아냐, 라고 거부하는 소리로도 들렸다.

‘할 일이 있으니까 돌아온 거야.’

다른 방들을 먼저 살핀 후 단유는 예의 그 방으로 걸어갔다. 싸늘함이 배가 되는 것 같다.

끼이익,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었더니 짙은 어둠이 단유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들어올래, 라고 묻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진짜 주인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단유는 어둠의 초대를 잠시 보류했다.

그 전에 문틀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자세히 살폈다. 아까, PD와 박사를 데리고 올라왔을 때, 단유는 카메라에 찍히지 않도록 문가에 서 있었는데, 그때 발견했던 것을 자세히 살펴볼 요량이었다.

흔적은 문틀의 아래쪽에 나 있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흔적이었다. 목재 문틀에 길게 그어진 흉터 같은 흔적은, 발톱이 날카로운 동물이 할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일상 생활 속에 흔히 생길 수 있는, 예를 들어 가구와 같은 것을 옮기다 긁혀 난 흠으로 볼 수도 있었다.

단유는 손으로 더듬으며 그 자국의 감촉을 느꼈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살핀 그 자국은, 분명 최근의 것은 아니었다. 색이 바래다 못해 검게 변색이 된 흠이라 정확히 추정하긴 어려워도 오래된 흔적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두울 때는 전혀 알아보기 힘들었을 자국이기도 했는데, 발견한 것은 사실 동물의 털 때문이었다.

단유가 이 집을 다시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에는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동물의 털이었는데, 단유는 방에 떨어져 있던 그 동물의 털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물론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고, 산속에 지어진 집이라 산짐승들이 몰래 들어와 살 수도 있으니, 그러다 보면 어떤 이유로 털 뭉치를 남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 매일 털갈이하듯 거실에 털을 흩날리는 두 개를 키우는 단유였기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단유는 그 털이 수상했다.

단유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다른 방도 살폈었다. 그리고 그 방을 살폈을 때는 그 동물의 털이 보이지 않았다. 사전 답사를 온 촬영팀이 미리 촬영에 맞게 집을 청소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으나, 그 점은 아까 촬영장을 나오기 전에 스태프에게 물어 확인했다.

“청소요? 여기를? 안 했어요. 오히려 안 하는 게 더 분위기가 사는데 뭐하러.”

대신 조금 허전한 느낌을 채우려고 소품을 추가한 점은 인정했다. 거미줄이라거나 깨진 접시 같은 것을 공수해서 바닥에 흩뿌려놓았다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유는 다른 방을 살폈고, 역시 동물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매트리스가 있는 방에만 동물의 털이 있었다. 털 뿐일까?

단유는 구석구석을 살폈다. 혹시 동물의 변 같은 것도 있을까 싶었던 까닭인데, 그것은 찾을 수 없었다. 오줌 같은 것이라면 예전에 말랐을 것이고, 어쩌면 변색이 된 부분이 그 흔적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부분들이 변색 된 마당이라 동물의 그것이라 특정할 수 없었다.

‘그 동물은 이 방에만 살았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문이 닫혀 있던 것도 아니고 모두 열려 있었는데, 이 방에서만 있었다? 왜?

단유는 자신이 마법으로 없앴던 동물의 털 외에도 다른 털뭉치도 추가로 발견했다. 눈으로만 보기에는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눈에 담아놨다. 그 미묘한 색을 기억해 두고, 담유는 굽혔던 허리를 펴서 일어섰다.

뒤돌아서니 예의 하얀 덩어리가 둥실 떠 있었다. 단유도 조금 전에 그것이 나타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다. 그 하얀 덩어리도 처음과 다르게 단유에게 달려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얀 덩어리는 단유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겠다, 는 것처럼.

‘네가 말한 거였지? 내가 들었던 그 이야기.’

단유는 물었고, 하얀 덩어리는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방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이 방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덩어리. 그리고 이 방에만 존재하는 동물의 털. 설마, 하는 마음이 들지만 아직은 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단유는 더 이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할 때까지 방 구석구석을 살핀 후에야 하얀 덩어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단유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하얀 덩어리 아래에 놓여진 매트리스에 눈이 갔다. 처음 봤을 때는 낡고 먼지 쌓인 매트리스라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보였다.

단유는 고개를 들어 하얀 덩어리를 향해 물었다.

“이거, 살펴봐도 되는 거냐?”

물론 답은 없었다. 그러나 하얀 덩어리가 살짝 몸을 흔드는 것 같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껏 살펴보라는 듯. 단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매트리스를 집었다. 손에 잔뜩 묻어나는 먼지의 두께가 조금 불쾌한 느낌을 줬지만, 단유는 그 감촉을 무시하고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꽤 무게가 나가는 매트리스였지만, 단유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트리스를 뒤집어 엎었더니, 어둠 속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라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혹시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 몰라, 집에서 청소하듯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손전등을 들어 매트리스를 비추었다. 반대쪽과 달리 시커멓게 물들어있는 매트리스. 단유는 그 흔적이 과거에 보았던 어떤 것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새까맣게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새빨간 색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가 적셔졌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네 거니?”

단유의 물음에도 하얀 덩어리는 조금 전과 같이 그대로였다. 단유는 몸을 일으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던 거잖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여전히 말이 없는 하얀 덩어리지만, 이제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의 의지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그렇게 하얀 덩어리를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제 집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나 촬영팀이 남기고 수많은 발자국과 쓰레기들로 인해 그것과 다른 흔적이나 증거들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비추며 살폈다. 그리고 그 방의 창문이 있던 방향으로 향하여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산짐승의 흔적은 물론이고 다른 무엇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긴 그 사이에 비가 내려도 수십 번은 내렸을 것이고, 12월이라 일찍 겨울이 찾아오는 이곳은 땅이 수십 번은 얼었다 풀렸을 것이다. 물론 몇 해 전의 일이라면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일 테니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리라.

집 근처에 심어져 있던 밤나무 근처까지 살피던 단유는, 문득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이 예전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헤매던 그때는 이렇게 이성적으로, 꼼꼼히 살필 여력이 없었는데. 물론 지금 단유가 배우고 익힌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던 때이니 무작정 뛰어다니며 사람의 흔적만 발견하려 했었다.

‘만약 지금이라면, 과연 그때와 다를까?’

유령의 흔적을 찾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이니 이보다 더 쉽지 않았을까? 한 사람도 아니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라진 일이었으니 지금처럼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면, 과연 결과는 달랐을까?

아니면 그때 그 일도 지금처럼 초자연현상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단유는,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한가지. 지금의 단유는, 그때 그 현상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다!

“······.”

사람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손짓, 아니 눈짓만으로 어떤 존재든 ‘해체’시킬 수 있으니까. 그 존재가 물리적인 존재라면 말이다.

작은 마을을 떠올렸다. 거리에는, 비록 옷은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맑은 웃음을 지으며 서로 인사를 하며 지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텃밭을 일구던 아낙네가 이마의 땀을 훔치다 바라보며 오늘 하루 어땠냐며 인사를 건네고, 골목에서 튀어나온 아이들이 길을 가로지르는 틈에 걸음을 멈춘 상인이 아이들을 향해 조심하라며 타이른다. 우물물을 지고 나르는 아낙의 뒤에서 나타난 남편이 짐을 덜어 주며 미소를 짓고, 젊은 남녀는 손을 맞잡고 산책을 한다.

작지만 활기가 넘치는 마을, 번화하진 않지만 영원히 지속될 일상을 즐기듯 살아가는 사람들. 그 마을 거리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낯선 사람을 보며 살짝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거나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무심한 눈을 돌리는 그림자.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긴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흙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빛이 뿜어져 나오며 열기가 훅 하고 밀려 들어온다. 어쩌면, 그마저도 통제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빛의 구슬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정도에서 마무리될지도 모르겠다. 빛이 발산하지 않고, 수렴하게 하여 시야를 가리지 않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라진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마을에 넘쳐나던 활기는 새벽 공기 밀려오듯 사라지고 싸늘한 적막이 찾아든다.

그림자는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한 방랑자처럼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들고 있던 짐이며, 입고 있던 옷이며, 신고 있던 신발이며 할 거 없이 모두 사라진다. 바람이 불어와 그가 걸어온 흔적마저 사라지게 하니, 마침내 모든 것이 원래 없었던 것인 양 그렇게 사라진다.

단유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 그림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덮어 씌워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마법사.’

지금 자신이 가진 지식을 그 ‘마법사’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오랜 시간을 바쳐, 세상의 진실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있는 만큼, 마법적 구현을 가능케 하는 마법사는 있을 것이다. 제윅도 그런 부류이지 않았던가?

꽉 쥔 주먹이 쉽사리 펼쳐지지 않았다. 단유는 자신이 기르고 있는 이 힘이, 세상의 진실뿐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기현상의 진실을 밝힐 힘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기현상을 일으킨 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알아. 꼭 마법사가 범인은 아니란 것을.’

그러나 마법사는 실마리다. 혹은 유력한 용의자다.

잠시 후, 단유는 고개를 돌려 달빛을 받고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2층 창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를 하얀 안개 같은 덩어리가 사진처럼 눈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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