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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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에 올라간 네 사람은 단유가 말한 방 앞에 섰다.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방 앞에서 네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발을 내딛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사님. 저는 사실 귀신 같은 거 잘 안 믿거든요. 그런데 이 방 앞에 서니, 어쩐지 걸음을 떼기가 힘드네요.”
PD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백하니, 박사도 덩달아 웃었다.
“확실히 여기는 다른 곳과 다르네요. 분위기란게 확실히 다른 거 같아요.”
박사의 말에 PD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뒤에 선 카메라 감독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찍고 있어요?”
“응.”
“안쪽에서 들어오는 걸 찍는 게 좋을까요, 밖에서 뒤따라 가는 형식으로 가는 게 좋을까요?”
“···나야 뒤따라 가는 방식이 좋지···만, 이미 대답은 정해진 거 아냐?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는?”
“그런 거 아니에요. 솔직하게 여쭤본 겁니다. 형이 방 안에서 우리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는 게 그림에 좋을지, 아니면 거기서 우리가 먼저 들어가는 장면을 찍는 게 좋을지.”
“두 개 다 찍으면 되겠네. 기다려봐. 내가 밑에 내려가서 스탠드 가져올게.”
“에이,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해요. 그냥 들어가요. 우리가 먼저 들어갈게요.”
PD가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내쉬더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이밀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것과 달리 방 안에 들어서고서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D와 박사가 방에 들어가고, 그 뒤를 카메라 감독이 들어갔고, 단유는 출연자가 아니기에 카메라에 걸리지 않도록 문가에 서서 안을 바라보았다.
이미 방에 매트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PD는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래봐야 묵은 먼지만 풀풀 날릴 뿐이었지만.
“진짜 뭐 본 거 맞아요?”
단유는 촬영하는 카메라에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사이 손전등으로 구석구석을 살피던 박사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PD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일단 뭐라도 나온다면 확실히 잡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네. 나오기만 한다면요.”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며 살펴보아도 어떤 일이 벌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PD는 살짝 실망하기 보다는, 이후 촬영할 때 어떤 점을 보완해야 그림이 잘 나올까를 고민하며 방을 계속 살폈고, 박사는 핸드폰 카메라로 주위를 찍었다.
‘다른 사람은 저게 보이지 않는구나.’
단유는 방 안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하얀 덩어리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딱히 사람한테 물리적인 충격을 주지는 못하는 거 같네.’
혹시나 싶어 문가에서 물러서 있었던 것인데, 하얀 덩어리는 단유에게 쉽게 달려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의 관심은 방 안에 들어온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얼굴이란 게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런 걸 지박령이라고 하던가?’
멀리서 관측 가능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지켜보고 있자니, 아까와는 달리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비명이란 걸 지르는 것 같지만, 딱히 고통이나 슬픔에 찬 목소리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인간이, 아니 단유가 듣기에 꽤 높은 고주파의 소리라 ‘비명’이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저것은 단지 소리만 낼 뿐, 의미를 담은 언어를 전달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들은 건 뭐지?’
정신을 잃은 동안 들었던 그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였을까? 저것의 이야기였던 걸까, 아니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이야기였을까?
위험할지도 모를 일에 사람을 끌어들인 건 조금 미안할 수 있는 일이지만, 유진을 위험하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어차피 저런 현상을 연구하는 박사이고, 저런 위험을 감수하고 촬영을 진행하는 PD였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은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저들이 안전하다고 해서, 유진이 이곳에 올라와 촬영해도 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단유는 카메라가 잘 찍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
“왜 그러세요?”
“지금 잠깐 빛이 번쩍였던 거 같은데, 못 봤어요?”
“아니요, 못 봤는···.”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앞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우와!”
놀란 두 사람이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쿵쾅거리는 마룻바닥의 울림이 그들의 다급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고, 그들은 곧 1층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숨을 헐떡이는 그들에게 기다리던 스태프들이 달려와 괜찮냐고 안부를 물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단유만이 방관자처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윗층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형, 찍었어요?”
숨을 고르고 가장 먼저 꺼낸 말이 ‘찍었냐’는 PD의 말에 카메라 감독이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니터 해봐야겠지만, 일단 다 찍긴 했어.”
“그럼 그것부터 바로 확인해 보죠.”
PD와 카메라 감독이 서둘러 보조 모니터로 향하자, 호기심에 들뜬 스태프들도 다 함께 우르르 몰려갔다. 그 사이, 온풍기를 쐬다 급히 달려온 유진이 단유의 위아래를 살피며 괜찮냐고 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유진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진짜 뭐가 있었던 거야?”
“응.”
진짜로 있기는 했으니까.
“뭔데? 뭐였는데?”
“너도 저기 가서 봐봐.”
유진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듯, 단유에게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하고는 사람들이 몰려든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단유는 다시 2층을 올려다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꾸준히 실험을 한 끝에 단유는 어떤 물질을 어느 정도로 ‘해체’시켰을 때, 빛과 열이 어느 정도로 나오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어 대략 이 정도로 열과 빛이 나겠구나, 짐작하는 수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 정도라도 조금 전, PD와 박사, 카메라 감독을 놀라게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단유는 바닥에 뒹굴던 이름 모를 짐승의 털 조각을 대상으로 ‘해체’를 했다. 극소단위 입자로 해체되자마자, 규칙을 알 수 없는 조합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열에너지와 빛에너지가 발생하여 목적을 이뤘다. 비록 단유의 짐작 이상의 열과 빛이 나와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상처를 주는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방 안에서 놀란 사람들이 뛰쳐 나올 때, 단유는 한 걸음 물러서 그들이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그들이 달려나간 뒤, 단유도 그 뒤를 따르긴 했지만 방을 벗어나기 전 방 안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덩어리를 마주 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분명히 자신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순간 만큼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방 밖으로 내몰아줘서 고맙다는 걸까, 아니면 단유가 보인 힘에 두려움을 느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단유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걸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이상, 그것의 생각을 알아챌 방법은 없었고, 대화를 나눌 수단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것의 생각을 알 방법은 없을 것이다.
단유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촬영이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많이 걸렸다. 단유는, 무섭지만 해보겠다며 유진이 자신감을 내보였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실제로 체감된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을 강행하는 것은 반대라고 소신을 밝혔다.
“만약 촬영을 한다면, 다른 스태프도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긴데, 혹시 아까 봤던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촬영은 더 이상 이어지면 안 됩니다.”
작가도 단유의 말에 동조하며, 나중에 촬영본에 그 말을 자막으로 삽입해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는다면 더 좋은 반응이 있을 수도 있다고 PD를 설득했다. 결국 좀 더 인기를 끌 수 있는 영상, 다시 말해 자극적인 영상을 촬영하길 바랐던 PD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현장의 책임자인 PD이고, 그 책임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달려온 출연자들도 보조 모니터를 통해 촬영본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이미 그 방을 드나들며 촬영했던 이들은 왜 자기는 저런 걸 보지 못했는지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내 눈앞에서 저렇게 됐었으면, 난 기절해서 못 일어났을 거야.”
결국 PD는 보조 모니터의 영상을 다시 한번 보고 난 뒤, 각 출연자 별로 소감을 듣는 인터뷰 씬으로 남은 시간을 채워 넣었다. 다양한 표현과 실감 나는 표정, 그리고 기록된 영상만으로도 조회수는 충분히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PD는 자신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분량을 채우지 못했지만, 유진의 몫은 편집으로 잘 살려주겠다며 유진을 달래주었다.
“제가 더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좀 더 열심히 말할 걸 그랬어요.”
“아냐, 유진 씨는 잘했어. 솔직히 오늘 유진 씨 덕분에 촬영도 스무스하게 진행된 것 같은걸? 역시 남자들만 데리고 하는 건 무리가 있다, 고 생각될 정도였다니까. 예산만 잡히면, 유진씨를 우리 고정으로 삼고 싶으니까.”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건물 밖으로 나와 클로징 씬을 진행하고 촬영을 마무리했다.
“이거 방송되면, 여기 핫플레이스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위험하다고 써 붙여 놔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당연히 위험하다고 해야죠. 박사님은요?”
“저희는 다시 제대로 팀을 꾸려서 여기를 조사해볼 예정입니다.”
“이 무서운 곳을 또다시 오시겠다고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 무서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오늘 게스트로 오신 유진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한 게 없다니요? 오늘 저희가 유진 씨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요.”
설치했던 장비를 떼어내는 일을 해야 하는 스태프들과 박사, 박사의 보조들은 두려움에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지만, 개중에 용감하고 호기심이 공포를 넘어설 정도로 넘치는 이들이 도움을 주어 무사히 촬영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스태프들이 촬영장을 정리하는 사이, 출연자들은 먼저 각자의 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유진과 단유는 각 출연자들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전한 후에 차에 올랐다.
“한 것도 없이 힘드네.”
차에 오르자마자 무너지듯 힘을 잃고 쓰러지는 유진을 보며, 단유가 물었다.
“배 안 고파?”
“아, 그러고 보니 밥도 안 먹었네? 밥을 안 먹어서 힘이 없는 건가?”
“그럴지도. 시내 내려가서 문 열린 식당이라도 찾아봐야겠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과연 식당이 있을까? 그냥 편의점에서 김밥이라도 사서 먹지, 뭐.”
그렇게 말하더니 곧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생각해보니까, 별로 배가 안 고파. 그냥 지금은 자고 싶어.”
“그럼 자고 있어. 나중에 휴게소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휴게소? 서울 올라가려고?”
“응.”
“야, 내일 올라가기로 했잖아.”
“···그건 촬영이 내일 새벽까지 이어질 줄 알고 한 말이었잖아.”
“원래, 촬영 끝나고 강원도 바닷가도 둘러보고 올라가기로 한 거였잖아. 너 여기 온 김에 둘러보고 간다며.”
“그건 내 사정이니까, 니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렇게 올라가면 내가 미안하지. 그리고 나도 일부러 내일 스케줄 빼놓은 건데. 이왕 온 건데 좀 쉬다 가면 좋잖아, 나도.”
“···말하자면, 그냥 네가 놀고 싶다는 말인데?”
“이왕이면 너랑 같이 노는 거지.”
“그러지 마라.”
“왜? 나랑 같이 논다니까, 막 설레?”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나 진짜 서울 간다.”
“으흠, 말인즉슨, 서울 안 가겠다는 말이구나?”
“···됐다. 관두자. 그냥 서울 갈란다. 벨트 매.”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무슨 애가 이렇게 무드가 없니.”
“무드 같은 소리 하지 마.”
“알았어. 그럼 어디 갈 거야?”
“지금은 밤이 늦어서 어디 갈 때가 있나 모르겠다.”
“그럼···일단 호텔?”
“······.”
“어쨌든 잠은 자야지.”
반박은 못 하겠다. 단유는 일단 차를 몰아 산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