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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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구르던 그 짧은 순간에 단유는 무리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체를 알 수도 없는데 무작정 대치해봐야 자신만 손해다. 그러니 일단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들어온 문을 향해 달려나가는데, 다시 비명이 들렸다.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일단 구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어깨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고, 무릎에도 무리가 갔던 건지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빨리 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하려는데, 하얀 덩어리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어.’
단유는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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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이곳’이라는 명칭을 생각하니 우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곳에서 산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마치 어린 시절부터 잘 때마다 끼고 살았던 인형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거리감을 느낀다. 이곳에 정이 붙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모질기만 한 성격 때문일까.
집이라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무척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안락한 느낌, 휴식의 공간, 일상의 쉼터. 물론 몇몇 사람들은 자기 집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세 1호, 2호, 월세 3호, 4호 잔뜩 늘려서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집 하나를 갖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단한 일상을 견디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집이 만약 낯설게 느껴진다면? 수십 년을 살아온 이 집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집에 있어도 어색하고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야만 할 것 같다면? 매일매일 집과 마주하며 낯가림을 떨쳐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할까? 대답도 없는 벽을 보며 대화라도 걸어야 하나?
누군가는 그랬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집이 싫으면 떠나라고. 꺼지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왜 떠나고 싶지 않겠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그냥 나가버릴까,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집을 떠나 걸식하며 살 용기가 없고, 비바람 맞으며 잠을 청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이렇게 낯선 집에 들어와,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닌가.
집에는 규칙이란 것이 있다. 사실 어딜 가더라도 규칙이란 것이 존재한다만. 가령, 밥은 주방 식탁에서 먹어야 하고, TV는 거실에 두고 봐야 하며, 아침에는 커튼을 걷어 아침 햇살로 거실을 채워야 하고, 용변은 반드시 화장실에서, 볼일 이후엔 물을 내리고, 잠은 지정된 장소에서 자야 한다.
오늘은 어쩐지 욕실에서 자고 싶네, 라고 해도 그래선 안 된다. 햇살이 좋으니까, 창문 틀에 앉아서 식사해볼까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정도는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 다 이 정도는 그냥 그렇게 지키고 살지 않은가.
그런데 이 낯선 집에는 낯선 집만의 규칙이란 것이 있었다.
부탁하지 마라. 모든 것은 자기가 스스로 해야 한다. 누군가에 기대어 살 생각은 해선 안 된다. 전등에 불이 나가도, 의자 한쪽 다리가 부서져도, 화장실 수도가 새서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도, 창이 부서져 차가운 바람이 집안에 들이닥쳐도 부탁하지 마라.
그러나 지시하는 내용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내려오라고 하면 내려가고, 올라오라고 하면 올라가야 한다. 소리 내지 말라고 하면 그날은 온종일 입 다물고 있어야 하고, 웃으라고 하면 슬픈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한다. 벌레가 온 집안을 돌아다녀도 불평하지 마라,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집을 나가야 한다.
무관심에 익숙해지고, 어둠에 적응하며, 침묵에 동조하여야 한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마치 텅 빈 집인 양, 그렇게 살아야 한다.
어느 날부터 집에 사람의 기운이 사라졌다. 사람은 없고 냉기만 흐른다. 하긴 그런 규칙을 따르며 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는 결국 혼자 남은 자신은 그 규칙을 성실히 따르며 살고 있다.
규칙이란 게 뭔가? 지키라고 있는 규칙인데 지키지 않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옛 철학자가 악법도 법이라며 했다는데, 지키자고 만든 법이라면 지켜야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속내는 단지 이 집에서 쫓겨나는 걸 두려워한 변명이지만, 변명이면 어떤가? 낯선 집이라도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우스운 건, 그 규칙을 만든 사람도 집을 떠났다는 점이다. 자기 편하자고 만든 규칙일 테지만, 모두가 사라지니 그 불편함을 오로지 홀로 견뎌야 했고, 그 불편을 견디지 못하니 나가는 것은 온당한 처사라 하겠다. 그나마 그 사람은 나갈 용기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 빈집에서,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규칙을 홀로 지키며 살아가는 이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 세상 모든 용기를 배척하고 홀로 낯섦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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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정신 차려 봐요.”
누군가가 몸을 흔들기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단유는,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작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는 상체를 일으키며 괜찮다고 답했다. 작가는 단유의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면서 자신이 얼마나 놀랬는지를 말했다.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예? 글쎄, 저도 방금 올라온 터라. 친구 분이 안 내려오니까 유진이가 걱정을 하길래, 제가 대신 올라왔거든요. 처음에는 조용하길래, 어디 있는지 몰라 방을 돌아다녔는데, 이 방만 문이 닫혀 있길래 혹시 하고 들어와 봤더니 단유 씨가 여기 위에 누워 있잖아요. 처음에는 얼마나 섬뜩했는지 몰라요.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있길래. 솔직히 무슨 시첸 줄 알았다니까요.”
작가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덩어리가 달려드는 것이었고, 이후에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도 모른채 깨어났으니. 게다가 자신이 어떻게 이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바닥을 미친 듯이 구르기만 하다, 마침내 방을 나가려고 저 앞까지 갔던 참인데 말이다.
“혹시 무슨 소리 들으신 건 없으세요?”
“무슨 소리요?”
예를 들면, 귀가 먹먹할 정도의 비명 소리라든가, 90㎏에 달하는 곰 같은 덩치로 낡은 마룻바닥을 쿵쿵 두드린 소리라든가.
그러나 작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상한 질문을 잇는 단유를 쳐다보며, 혹시 뭐라도 본 거냐고 되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뭔가를 봤고, 그 뭔가를 뒤집어 쓰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미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단유는 대답을 피했다.
“혹시···?”
“네?”
“혹시 여기 매트리스 위에서 잔 거 아니죠? 매트리스 있으니까 괜히 누워보려고 했다거나.”
“설마요.”
“그렇죠? 하긴 이게 어두워서 그렇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그렇죠?”
그런데 어째 눈빛이 탱글탱글 빛나는 게, 마치 난 네가 여기 일부러 누웠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고 말하는 듯했다.
상식적으로 여기 매트리스 위에서 누워 잔다는 게 말이 안 되잖냐, 고 항변해야 맞지만, 다른 말이 나올까 봐 이번에도 대답을 피했다.
“너, 뭐야? 옷이 왜 그래?”
그래도 마룻바닥을 열심히 구른 탓인지, 옷은 먼지로 가득했다.
“아, 조금 그럴 일이 있었어.”
“나가자, 나가서 옷 좀 털어.”
“됐어,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털고 올게.”
“야, 뒤에까지 엉망진창인데? 같이 나가. 작가님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요.”
장난기가 심한 남자 친구는 사귀기 곤란한데, 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는 작가였다.
유진은 단유를 끌어당겨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입과 코를 손으로 가리고 다른 손으로 단유의 뒤를 손으로 툭툭 털어줬다.
“너 위에서 뭐했어?”
“그냥 방 구경 했지.”
“그냥 방만 구경하는데 옷이 왜 이러니? 다른 사람은 올라갔어도 멀쩡히 잘만 내려 오더만. 너 혹시?”
“응?”
“너 혹시 바닥 헛디뎌서 넘어진 거 아냐? 넘어진 게 쪽팔려서 그러는 거지, 너?”
“···그런 건 아냐.”
넘어진 게 아니라, 일부러 굴렀다, 바닥을. 단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옷을 터는 데 집중했다.
“너도 무서움 많이 타?”
“나? 아니, 별로. 왜?”
“너 얼굴이 파란데?”
단유가 얼굴을 더듬자, 유진이 수상하다는 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단유를 살폈다.
“너 솔직히 말해. 위에 뭐 있었지?”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솔직히 말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유진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어쩌면 나중에 유진이 촬영할 때,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실체를 확인한 단유는 또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음, 사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
“뭐? 진짜? 진짜로 뭘 본 거야?”
단유는 어깨를 으쓱여 보인 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답 좀 해보라며 졸졸 따라오는 유진을 뒤에 두고, 단유는 박사에게 향했다.
“박사님.”
“네?”
“혹시 지금도 계속 장비 작동 중인가요?”
“일단은요. 왜요?”
“제가 올라갔을 때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나요?”
그러자 박사는 ‘잠깐 쉬느라고 모니터링을 안 해서 모르겠네요’라고 답하며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리고 보더니 ‘어?’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여기 이 부분 보니까 무슨 소리가 기록된 것 같은데?”
“무슨 소리요?”
“간헐적으로 50dB 정도의 소리가 관측됐다고 나오네요? 그 정도면 여기서도 뭐가 들렸어야 하는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장비를 조작하는 박사가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올라갔을 때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요? 아니면, 일부러 무슨 소리를 냈던 겁니까? 장비가 작동하는지 확인하려고?”
의문과 의심이 섞인 질문을 받은 단유는 고개를 젓고, 위를 가리켰다.
“소리도 소리지만 뭔갈 본 거 같아서요. 혹시 지금 같이 가서 보실래요?”
뭔가 봤다고 하니, 한층 더 의심이 섞인 눈으로 단유를 보던 박사는, 그래도 관측 증거도 있는 마당에 무시할 수 없는 제보라 여겨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단유와 박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PD가 다가와 사정을 물었고, 단유가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더니 PD가 난색을 표했다.
“곧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도 뭐가 있다니까,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박사의 말에도 PD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대안을 제시했다.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다음 출연자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요? 잠시만요, 여기! 누구 여기 찍고 있었던 사람 있어?”
“없는데요. 카메라 다 꺼놨어요.”
“그럼 거기 하나 들고 와서 여기 찍어.”
서두르는 카메라맨을 확인하고 다시 박사에게 시선을 돌린 PD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일단 지금 이 장면을 본방에 삽입할 거예요. 쉬는 시간에 이런 제보가 있었다. 그래서 제작진들이 긴박하게 촬영 준비를 해서 문제의 그 방으로 들어간다. 박사님과 출연하기로 한, 유진씨가 동행하여 들어간 방에서 우리는 신비로운 현상을 목격한다. ···괜찮죠?”
“뭐,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이게 타이밍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런 현상을 자주 목격하긴 어려운 일이에요. 어쩌다 발견되더라도 매우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지금 바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럼, 일단 카메라랑 저, 그리고 유진 씨만 올라가 보죠. 유진 씨 준비됐어요?”
유진은 당연히 준비되었다고 말하려는데, 단유가 말을 가로챘다.
“유진이는 잠시 후에 들어가죠.”
“왜요?”
PD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니, 단유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초자연현상에 대해 제가 아는 바가 별로 없어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위험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야 아무런 현상이 발견되지도 않은 마당이니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힘드네요.”
유진에 대한 안전 문제를 거론하자, PD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위험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그런 거 다 미신이에요.”
“박사님이 만약 위험한 게 없다고 확신하신다면 저도 아무 말 않을게요.”
갑자기 박사에게로 돌려진 화살에, 박사는 턱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과학적인 입장에서 초자연현상을 연구하고 있지만, 100%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죠. 무당이니, 퇴마니 하는 스토리를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니, 박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 촬영은 어떻게 하라고요?”
“하지만 위험하다고 말할 수도 없네요. 일단 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런 초자연적 현상 때문에 위험한 일을 당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우선 올라가서 확인하시는 건, 저랑 박사님, 그리고 PD님 정도로만 하죠. 시간이 더 길어지는 건 박사님 연구에도 좋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PD님도 위험하다고 여기시면 아래에서 기다리시고요. 카메라는 제가 들고 가서 촬영해도 되잖아요?”
“방송용 촬영을 아마추어에게 맡긴 순 없죠. 카메라는 제가 들고 갈게요.”
결국 박사랑 단유, 그리고 PD와 카메라 감독까지 네 명이 먼저 올라가기로 합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