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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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 경사의 산길은 평소에 충분히 단련된 터였다. 건물 안에 뛰어들려는 찰나에 입구에서 스태프 한 사람이 단유를 막았다.
“잠시만요.”
단유는 밀치고 들어가려다 한 번 참았다.
“안에 촬영 중이니까, 조용히 하셔야 하거든요.”
미친 듯이 달려오는 단유 때문에 소란이 생길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닌가요?”
“비명 소리요?”
스태프는 안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때마침 어떤 출연자의 비명인지 놀라는 소리가 건물을 울리며 들려왔다.
“아까부터 계속 나던 거라. 흉가체험이니까 연기자들이 좀 더 과장해서 소리 내는 것도 있지만.”
스태프의 말은, 저건 그저 촬영의 일부이니 달리 주의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흉가 체험하면서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가 아니겠냐는 뜻이겠지만, 단유는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들어가셔도 되는데, 대신 조용히 하셔야 돼요. 소리 따고 있으니까.”
상황을 확인하고픈 마음이지, 현장을 깽판 칠 생각은 아니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재 촬영은 1, 2층 나눠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1층의 큰 방에서 본부를 꾸며 놓고, 출연자들이 한 명씩 2층에 올라가 방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영상은 허름한 철제 의자 몇 개를 두고 앉은 연기자들의 모습이었다. 연기자들은 모니터용 화면 없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2층을 다녀온 사람들의 체험담과 2층을 올라간 이가 지르는 비명에 맞춰 깜짝깜짝 놀라는 정도의 리액션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옆에는 김 박사란 사람이 자신의 장비들을 모니터링하는 화면을 바라보다 이상현상이 발견되면 이야기 해주는데, 단유가 왔을 때는 딱히 감지된 것이 없어서 그런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박사가 아니더라도 출연자들이 빈틈없이 오디오를 메우고 있어 전문 방송인이 아닌 박사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카메라 앞에 5명이 조르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반해, 카메라 뒤편에는 그야말로 혼잡함 그 자체였다. 바닥에는 여러 촬영 장비들에 연결된 줄들이 나스카 지상화를 겹쳐놓은 듯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PD, 작가 외의 연출팀, 촬영팀, 조명팀 스태프 등 대략 50 여명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좁은 현장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피하고도 이만큼 몰려 있으니 추워도 추운 줄 모르겠다.
단유도 그 틈에 슬쩍 끼어들었는데, 스태프 한 사람이 단유를 알아보고 슬쩍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왼쪽에 자리한 유진은 촬영 때문에 패딩을 벗은 상태였는데, 대신 멋을 강조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조금 추워 보이긴 하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질렀던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침 유진도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렸다가 단유와 눈이 맞았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로 보내는 유진을 보며 단유는 자신이 잘못 들었던 건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촬영장은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뒤에 서 있었기에 PD나 작가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뭘 들은 거지?’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유진에게 잠시 나가 있겠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밖을 가리켰다. 유진이 잠시 눈치를 보고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이해했다는 뜻으로 해석한 단유는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 나갔다.
“괜찮죠?”
밖에서 손을 비비며 서 있던 스태프가 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태프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매니저님은 되게 열성적이네요.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바로 달려오기도 하고.”
“제가요?”
“봐봐요. 다른 매니저님들은 얼씬도 안 하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비명을 듣고 달려온 건 단유 뿐이었다. 혹시 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달려오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결국 혼자 유난을 떤 셈이 돼버렸다.
“저희가 좀 허접한 편이긴 해도, 사고가 날 정도로 허술하게 준비하진 않아요. 그리고 진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여기 사람이 몇몇인데요.”
“그래도 연기자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계속 주의해야죠.”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면 너무 피곤하지 않아요? 제가 매니저인 것도 아니니까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요, 저도 이 현장에 오래 다니면서 알게 된 게, 매니저도 사람이잖아요? 적당히 현장을 즐기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즐겨요?”
“표현이 이상한가? 제 말은, 너무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흠, 사실 촬영 현장이라는 게 긴장을 안 할 수 없는 곳이긴 한데요, 오히려 긴장을 너무 많이 하고 있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매니저들처럼 좀 느슨하게 기다릴 여유도 필요하다 이 말이에요. 어차피 촬영이 끝나려면, 내일 새벽은 되야 할 건데.”
새벽 언제까지라고 명시할 순 없지만, 그래도 대략 4~5시간 이상이 남았다고 봐야 한다는 스태프의 말에 단유는 다시 현장이 있는 건물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간이 그렇게 길어진다면, 뭔가 더 필요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필요한 걸 미리 챙기지 못했던 미안함이 있었다. 당장에 핫팩만 봐도, 단유나 유진이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현도가 빌려주었다. 정식 매니저가 유진을 따라왔다면,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가 필요하지?’
당장에 생각나는 것만도, 핫팩과 뜨거운 물, 그리고 쉬는 시간에 당을 채울 만한 먹거리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뿐만 아니라 1, 2층을 오가는 촬영 현장인데 혹시라도 넘어져서 다치거나 한다면 필요할 구급약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을 이어나갈수록 필요한 게 적지 않았고, 그것들이 전부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단유는 곤란함을 느꼈다. 길어지는 촬영 시간 동안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촬영 언제 쉬어요?”
“그거야 감독님 마음이죠.”
단유는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말을 전한 뒤, 다시 현장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쉬는 시간이 올 때까지 유진을 지켜보며 기다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30분 쉬었다 가겠습니다.”
PD의 선언에 조용한 현장이 시끌벅적하게 변해 버렸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새어들어 갈까 봐 숨죽이고 있던 스태프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소음. 카메라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오기 위해 더 과장된 리액션을 펼치던 출연자들. 그 사이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깨지며 터져 나오는 안도감이 스태프들의 그것과 섞이며 동네 놀이터처럼 활기를 얻는 현장이었다.
“괜찮아?”
단유는 현장에 준비되어 있던 물통 하나를 집어 유진에게 건넸다.
“안 괜찮을 건 뭐래? 니가 보기엔 어떤데? 괜찮았어?”
“난 잘 모르지.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하는구나 싶던데.”
“사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예능을 많이 안 해보기도 해서, 이게 잘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잘하고 있어요, 유진 씨.”
지나가던 작가가 이야기를 듣고는 끼어들었다.
“정말요?”
“홍일점이라 카메라에 더 많이 잡힐 거예요. 현도 씨가 또 많이 받아주기도 했잖아요.”
나중에 현도 씨한테 고맙다고 인사라도 전하라는 말을 남기며 작가는 자릴 떠났다.
두 사람도 일단 건물을 빠져 나왔는데, 현도를 비롯한 연기자 몇몇이 매니저를 찾고 있었다. 단유가 공터 아래를 가리키며 알려주자,
“아 놔, 이 형은 맨날 자기만 쉬어? 이래도 되는 거야?”
라며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도 내려가자.”
“그런데, 유진아.”
“응?”
“너도 2층에 올라갔었어?”
“나? 아니. 아직 안 갔어. 아마 다음에 올라가지 싶은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야. 남자들도 올라갔다가 무섭다고 저렇게 호들갑인데.”
“무서워?”
“에이, 무섭긴. 그게 아니라,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좋을까 싶어서 그러지.”
역시 프로 방송인. 무서움도 어떻게 표현해야 카메라에 더 잘 담길까를 걱정한다.
“그럼 아까 여자 비명소리는 누가 낸 거지?”
“여자 비명 소리?”
“응. 아까 저 아래, 다른 매니저 분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들렸거든. 그래서 뛰어 올라갔던 건데.”
“잘못 들은 거 아냐? 나는 계속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고, 다른 스태프들이야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황이었는걸? 혹시 호준님 목소리 들은 거 아냐? 그분이 엄청 크게 소리 질렀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크게 소리 지르는 바람에 우리 막 웃음 터질 뻔 했었잖아.”
“분명히 여자 목소리였는데.”
건물을 돌아보는 단유의 모습에 유진이 팔을 툭 쳤다.
“무섭게 왜 그래?”
“아니면 됐어. 너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 30분이면 밑에 잠깐 내려갔다 올 시간 될 거 같은데, 필요한 거 있으면 미리 사다 놓자.”
“별로 없는데?”
“너 핫팩도 없잖아? 새벽까지 촬영한다는데 핫팩이라도 좀 사다 놔야지.”
“오오, 너 그러니까 진짜 매니저 같애.”
“오늘 하루는 매니저 해주기로 했잖아? 뭐 먹을 건 필요 없어? 아, 밥은 여기서 주려나?”
“9시쯤에 다 같이 내려가서 식사하기로 했다던데? 못 들었어?”
“응. 못 들었네. 미안.”
“미안하긴. 그럼 지금 시내 내려갈 거야?”
“나중에 갈까?”
“나중에 가자. 지금은 그냥 좀 쉴래.”
“그래.”
단유는 걸음을 돌리려다, 멈췄다. 그리고 다시 건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유진이 단유의 팔을 붙잡았다.
“무섭게, 왜 계속 그래?”
“아, 잠시만. 너 먼저 내려가 있을래?”
“왜?”
“잠깐 들어가서 좀 보려고.”
“뭘?”
“아까 그 장비들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잠깐 시간 난 김에 박사님한테 가서 물어보게.”
“넌 진짜 별나다. 그럼 같이 가. 나 혼자 내려가서 쉬기도 뭐한데.”
“아냐, 넌 내려가서 쉬고 있어.”
“됐어. 혹시 모르니까 나도 그 기계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어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촬영할 때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
결국 단유는 유진과 함께 건물로 들어갔고, 몇몇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현장을 점검하는 사이, 한쪽에 놓인 모니터링 장치를 조작 중이던 박사에게 다가갔다.
“박사님?”
“네? 아, 유진 씨라고 했던가?”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저기 여기 얘가 제 친군데, 박사님한테 여쭙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요.”
박사는 유진의 옆에 선 단유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아까 장비 살 수 있냐고 물었던 친구네요? 정말 관심이 많은가 봐요?”
“네. 그렇기도 하고, 또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가요?”
“아까 설치된 장비 설명하실 때, 가청 주파수 외의 음향도 기록하신다고 하셨죠? 혹시 그거 계속 기록되고 있는 건가요?”
“그런데요?”
“실은 제가 아까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 것도 기록이 되어 있는지 궁금해서요.”
“음, 일단 그쪽 분이 들으셨다면, 가청 주파수 내의 소리일 테죠. 그리고 그런 소리라면 당연히 기록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장치에 자동 필터가 내장되어 있어서, 1층에서 난 소리는 거르도록 해 놨어요. 그래서 설치된 2층의 소리만 채집하도록 해 놨고, 그 기록은 모두 여기 저장되어 있죠.”
“잠깐 볼 수 있나요?”
어렵지 않다며, 박사는 프로그램을 조작해서 기록된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색색의 그래프가 한꺼번에 표시되어 있는데, 주파수 별로 색깔이 지정되어 있어 한눈에 살펴보기 편했다. 그리고 박사가 보여준 해당 시간대의 그래프에는 선들이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사실, 계속 없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여기 기대하고 왔는데, 별로 잡히는 게 없어요. 조금 전에 PD님도 와서 묻던데, 이래서는 딱히 방송에 내보낼 만한 게 없을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군요.”
“그런가요.”
“그런데, 진짜 뭐 들으신 거예요?”
“네, 뭐, 일단은.”
박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이런 분위기의 건물이라, 가끔은 환청을 들을 때도 있죠. 사실 사람의 감각기관이란 게 100% 신뢰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런 장비를 사용하는 거고. 공포심이 사람을 자극하면 안 보이는 걸 볼 수도 있고, 안 들리는 걸 들린다고 착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 것도 저희가 연구하는 주제 중 하나죠.”
단유는 박사의 말이 길어질 것을 염려해 일단 알려 준 것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유진과 함께 방을 나서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게 되었다. 뭔가 호기심을 굉장히 자극하는 계단이었다. 어쩌면 그냥 심심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엉뚱한 주제에 관심이 쏠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유는 그 호기심을 채워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잠깐 올라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