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28화 (628/956)

무한 도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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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로 돌아가는 길에도 마주치는 모든 스태프에게 인사를 건네는 유진을 따라 단유도 고개를 숙였다. 정식 매니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유진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니 이왕이면 할 수 있는 건 하자는 생각이었다. 뻣뻣하게 굴어봐야 유진에게 피해가 갈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인사하느라 공터에 도착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도착 후에도 금방 차에 오르진 못했다. 비포장도로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올라온 차 때문이었다. 공터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내린 인물을 발견한 유진이 서둘러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아, 오늘 같이 하기로 한 친구죠? 이름이···.”

“정유진입니다.”

“아, 반가워요.”

말쑥한 외모에 검은 롱패딩을 둘러쓴 남자는 유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가벼운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끝낸 모습으로 보아 출연자이리라 예상은 했지만, TV를 잘 보지 않아서인지 단유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뻘줌하게 유진의 뒤에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유진이 재빨리 소개를 했다.

“저랑 같이 온 친구예요.”

“친구?”

“원래 저 담당하시던 매니저 분이 사정상 오실 수 없어서요. 대신 절 돕기 위해 와준 친구예요?”

‘혹시?’하는 남자의 눈빛에 유진은 얼른 ‘남사친’이라고 재빨리 덧붙여 오해를 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TV를 잘 보지 않아서요.”

“아, 그래요? 근데 TV봐도 저 잘 안 나와요. 별로 안 유명해서.”

억지로 웃는 것 같지는 않은 게, 남자의 성격이 고약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유진이 단유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왜요, 선배님 되게 유명하신데. 이 분 예전에 개그 프로에도 자주 나오셨고, 지금은 예능 MC도 많이 보셔.”

“정현도라고 해요.”

“김단유라고 합니다. 오늘 유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런데 친구는 매니저가 아니라 연기자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칭찬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라 정말.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얼굴은 더 잘생겼고. 그냥 남사친이 아닌 거 같아?”

“선배님, 농담이 지나치세요.”

“농담이라니, 진담이에요. 그런데 유진씨가 저보다 선배 아닌가? 내 데뷔 날짜는 유진씨보다 늦을걸?”

“전 아역 때 잠깐 나온 건데요. 그 뒤로 별로 활동도 없었고요. 그걸로 데뷔라고 하긴 어렵죠. 게다가,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이 바닥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데뷔가 빠르면 선배시지?”

그때 차를 주차시키고 나온 현도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형, 그만해요. 유진씨 곤란해 하시잖아요.”

“아, 유진씨. 여기 내 매니저.”

“안녕하세요.”

“내 매니저가 유진씨 팬이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유진씨가 아역 출신인 걸 몰랐거든? 그런데, 이 친구가 유진씨 예전에 나온 드라마를 봤다네? 오는 동안 그 이야기를 계속 해주는데···.”

“형!”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나중에 우리 매니저한테 사인 한 장 해줘요. 우리 매니저가 엄청 좋아할 거야.”

“네. 고맙습니다.”

유진이 방긋 웃으며 현도의 매니저와 마주 인사를 나눈 뒤, 현도와 그의 매니저는 PD에게 인사하러 가보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서야 유진도 차로 돌아왔다.

유진을 뒷자리에 앉으라고 말한 뒤 차에 오른 단유는 차가운 날씨에 유진의 얼굴이 많이 굳은 듯 보였다. 그래서 시동을 켜고 히터를 틀어주었더니, 유진이 그러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아까는 자느라고 몰랐지만, 히터는 피부에 별로 안 좋대. 그냥 꺼.”

“춥지 않아?”

“그럼 네가 안아주면 되겠네.”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농담이야, 농담. ···진짜로 안아주면 더 좋겠지만.”

룸미러로 유진을 째려보는 단유의 표정에 유진은 멋쩍은 듯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더니 차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방음이 잘 되는 차인지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아, 유진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에 넘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미동도 없이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단유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단유야?”

“응?”

“아까 미안해.”

“뭐가?”

“아니, 난 그냥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서 네 옛날이야기를 조금 한 건데, 네가 별로 반기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실수한 건가 싶었어. 그래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 그거. 음···확실히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건 별로 반기지 않는 게 사실이야. 네가 말한 것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딱히 너한테 서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괜찮아. ···다만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거야?”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옛날의 내가 했던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남들한테 자랑하듯 떠벌리냐 이거지.”

“감추고 싶은 흑역사 같은 거야?”

“굳이 감추려고 애를 쓰지는 않지만,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는 과거, 정도랄까?”

“그렇구나.”

유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하얀 입김을 후, 하고 뱉었다. 차 안인데도 온도가 낮아서인지 하얀 김이 눈에 보였다.

“너무 춥지 않아? 나중에 너 촬영할 때 지장이 갈까 봐 걱정이야.”

“그러지 말고 뒤로 와서 안아달라니까?”

“버틸만한가 보네.”

“어, 나가야겠다.”

유진은 새로 도착한 차를 보더니, 차 문을 열고 나섰다. 단유는 차 앞으로 나가는 유진을 잠시 바라보다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

“안녕하세요, 장현도입니다. 오늘 저희가 할 체험은 바로, 흉가 체험입니다.”

경악하는 얼굴로 현도를 바라보는 출연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서움을 표현했다. 이미 흉가체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왔지만, 마치 처음 들었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현도에게 항의를 하는 출연자들. 그리고 그들의 항의를 받으며 버겁다는 시늉을 하던 현도는 오늘의 특별 게스트가 있다며 출연자들을 달랬다.

“아역 배우 출신이자 현재 서울대에 재학 중인 엘리트 여배우, 정유진 씨입니다.”

카메라 앵글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대기하던 유진이 표정을 고치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마치 조금 전에 생일선물을 받은 거 마냥 생글생글 웃으며 등장한 유진에게 출연자들이 환대의 표시로 박수를 쳤다.

“컷!”

PD의 외침에 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흐르고 있던 긴장이 뚝 끊어졌다. 어차피 이 장면 이후에 유진의 프로필 컷이 인서트 될 예정이라 잠깐 끊어져도 된다며, PD는 출연진들의 위치를 새로 잡아 주었다.

“조명, 여기 좀 받쳐줘요. 그림자가 너무 지네.”

조명 감독이 얼른 팀을 움직여 조명기기를 재설치했다.

“오늘날이 좀 어두워서 그래요.”

현도가 나서서 물었다.

“그럼 오프닝 새로 따요?”

“아뇨. 그냥 이대로 가도 돼요. 프로필 들어가고 그다음부터 이어갈 테니까.”

“얼굴에 그림자 많이 지는 거면, 새로 하죠?”

비록 웹 예능이라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이들 모두 얼굴을 파는 직업인데, 이왕이면 얼굴이 잘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차마 PD에게 말 못하는 출연자들을 대신해 MC 역을 맡은 현도가 나서서 제안하자, PD는 머리를 긁적이다 허락했다.

“그리고 되도록 끊지 말고 가죠. 날도 추운데 계속 끊어지면 서로 힘들잖아요.”

현도는 그렇게 부탁하고, 뒤로 돌아 다른 출연자들을 다독였다. 그 사이 몇몇 코디네이터들이 달려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을 고쳐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와줄 이 없는 유진은 단유에게 부탁하여 거울을 보며 스스로 고쳐나갔다. 단유는 거울을 든 채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민망하기까지 한 농담을 던지던 유진은 없고, 오로지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 준비하는 프로만이 있었다.

다시 촬영에 들어가는 그들, 아니 유진을 바라보며 단유는 조금 힘을 쓰기로 했다. 적어도, 유진을 향해 부는 바람을 막아주면 화장이나 머리를 고치기 위해 신경 쓸 일은 줄어들 것이니까.

‘부가적으로 추위도 한결 덜 테고.’

단유는 그렇게 유진을 서포트하며 현장 뒤편에서 지켜보았다.

****

오늘의 게스트는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대기하는 동안에는 몰랐다가, 촬영이 시작될 즈음에 PD가 출연자들에게 소개시켜준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물을 현도가 카메라 앞에서 시청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전문가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귀신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신 분입니다. 심령현상학회의 김영한 박사님 모십니다.”

현도의 소개로 나선 인물은 역시 두꺼운 진회색 파카에 짙은 고동색 코르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추위를 막기 위한 복장에 비해 머리숱은 꽤 적어 보였다.

그 후로 한동안 자신의 연구 활동과 귀신에 대한 생각을 밝힌 김영한 박사에게 현도와 몇몇 출연자들이 질문을 던지며 토크를 이어가는 동안 유진은 잠시 소외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낄 틈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현도가 이내 유진에게 시선을 돌리며 발언 기회를 주자, 유진이 질문을 꺼냈다.

“귀신을 탐지기나 검출기같은 장치로 밝혀낸다고 하셨는데, 귀신이란 존재를 에너지를 가진 비물질적 객체로 상정한 이유가 있나요?”

“오오, 역시 서울대! 무슨 말이진 전혀 모르겠어!”

적당한 리액션과 호응이 이어진 덕분에 분위기는 무겁지 않게 흘러갔고, 작가는 좋은 질문이었다며 유진을 조용히 응원했다.

대략 한 시간 반 정도를 오프닝에 쏟아부은 뒤에야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괜찮아?”

“응. 거울 좀.”

“일단 이거 마셔.”

“어? 따뜻하네?”

“스태프가 준비한 거래. 아까 시내 내려가서 사 왔더라.”

휴식 시간에 주려고 준비했던 따뜻한 음료수를 챙겨와 건넨 단유는 유진을 차로 데리고 왔다. 유진뿐만 아니라, 남자 출연자들도 각자의 차로 향한 상황이었다. 다음 촬영은 건물 안에서 진행될 예정인데, 촬영 준비를 하려면 적어도 20분 정도 걸릴 거라고 스태프가 전해줬다.

“그러면 30분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겠지.”

단유는 시동을 걸었다.

“괜찮다니까?”

“너 진짜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어. 이 이상은 위험해.”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가려지지 않는 낯빛 때문에 단유는 히터를 틀어주었다.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따뜻한 온기에 몸이 풀린다는 듯 온몸을 비틀며 굳은 몸을 풀어주던 유진이 단유를 향해 말했다.

“옆으로 좀 와봐.”

“왜 또?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쉬어.”

“너 오늘 매니저 하기로 했잖아? 잠시만 와봐. 응?”

유진이 엉덩이를 옮겨 자리를 비켜주자, 단유가 뒷자리로 옮겨탔다. 유진은 씨익 웃더니 단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뭐야?”

“잠시만 이러고 있자.”

“너 원래 매니저분께도 이러냐?”

“할 때도 있지. 왜 질투 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말랬지?”

“잠시만 이러고 있자.”

“차라리 그냥 눕는 게 낫지 않나?”

“그러면 머리 헝클어지잖아.”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는 불쌍한 신세, 라고 과장되게 한탄하던 유진은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단유야.”

“왜?”

“···정말 좋다.”

“뭐가?”

“겨울에 말도 안 되게 흉가 체험이라는 기획도 그렇고, 대기실도 없어서 차에서 몸 구기며 쉬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 정도로 빡센 촬영 현장이랑,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날씨도 다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좋다.”

“무슨 소리야?”

“네가 계속 지켜봐 주고 도와주니까, 고맙고 좋다고.”

“······.”

“있잖아? 사실 우리 엄마가 나 따라오려고 그랬다? 너 알지? 우리 엄마.”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으니 모르진 않았다.

“나 아역 할 때, 우리 엄마가 나 계속 따라다녔어. 내가 정식으로 회사랑 계약 맺고 나서도 한동안 우리 엄마가 나 따라다녔잖아. 그때 나 되게 힘들었거든. 하나하나 다 간섭하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무슨 행동을 해도, 모두 우리 엄마 눈에 걸리니까, 그리고 나중에 그것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시는데, 정말···힘들었어.”

단유는 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김이 서리는 창문 때문에 바깥이 흐리게 보였다.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이거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해서 안 되고. 오른손을 들라고 하면 오른손을 들어야 하고, 달리라고 하면 무조건 달려야 하고, 울라고 하면 울기 싫어도 울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마치 인형이 된 것 같았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조작하는 인형. 엄마의 마음에 꼭 들어야만 하게 만들어진 인형.”

한숨을 나직하게 쉬던 유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지쳤고, 그래서 아예 그만둘 생각을 했었어. 그때 네 생각이 났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렸고. 연기 보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더니, 우리 엄마가 굳이 그래야 하냐고 그러시더라. 그래도 아빠가 내 편이 되어 주셔서 한동안 공부만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서울대에 들어왔지. 그러고 보면 내 머리가 꽤 좋은 편이긴 한가 봐? 그렇지?”

“머리 좋아, 너. 상황 판단력도 빠르고. 재치도 있어.”

“정말?”

“응. PD님이랑 작가님이 너 칭찬 많이 하시더라.”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다 네 덕인 거 같다.”

“나?”

“네가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니까, 어쩐지 힘도 나고 그래. 아까 촬영하는 동안에도 어쩐지 덜 추운 것만 같고 그러는 게 다 네 덕인거 같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촬영도 훨씬 잘 풀린 거 같아. 그래서 좋아. 최근에 겪은 현장 중에 제일 마음이 편한 현장이야.”

“그만 말하고 쉬어. 이제 금방 또 나가야지.”

“···응.”

히터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유진의 볼이 살짝 불긋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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