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27화 (627/956)

무한 도전(3)

-------------- 627/952 --------------

유진과 약속한 날, 단유는 유진이 기다리고 있는 샵으로 차를 몰고 갔다. 유진은 이전에 예은의 카페에 단유를 데리고 갈 때, 단유의 차를 타 본 경험이 있었다. 그 이유 때문에 단유에게 부탁을 한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유진은 단유에게 단지 촬영지까지 같이 가는 것만을 부탁했고, 새벽 일찍 일어나 헤어샵에 가는 일정은 홀로 했다.

“오늘 일찍 일어났다며? 한숨 자.”

굳이 조수석에 앉겠다며 옆에 앉은 유진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 너무 편해서 눈 감으면 차가 움직이는 지도 모르겠어. 아마 눈 감자마자 잠들 거 같아.”

“오버하지 마.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정말이야. 평소에 매니저 오빠 차만 타다가 이 차를 타니까 아주 딴 세상인걸?”

단유는 네비게이션을 조작한 뒤 예상 도착 시간을 유진에게 알려주었다.

“도착까지 3시간 10분 정도 걸린다네. 그때까지 눈 좀 붙여.”

“그럼 너 심심하잖아?”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현장 가면 너 계속 긴장해 있을 거잖아. 그때까지만이라도 쉬면서 체력 보존해.”

“너 그러니까 진짜 매니저 같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너 내 매니저 할래?”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눈 좀 붙이라고.”

단유는 시선을 전방에서 떼지 않은 채로 대꾸한 뒤, 오디오를 조작했다. 곧 자동차 내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장가냐?”

“응.”

단유의 심심한 반응에 유진은 짐짓 토라진 척을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나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직이 숨 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때부터 단유는 유진의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어져, 마음 편히 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일이지만 이른 아침에 출발한 터라 차는 막히지 않았다. 30분 전에야 겨우 동이 트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도 하늘이 밝지 않은 것은 짙게 깔린 구름 때문이었다. 하지만 촬영지는 지방이니 그곳의 하늘은 맑을지도 모른다. 날씨 정도는 어련히 체크하지 않았을까?

목적지는 강원도 태백시의 연화산 근처였다. 인근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오늘 유진이 촬영하게 될 웹예능의 촬영지였다.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촬영을 하는 건가 싶어 물었더니,

“흉가 체험이래.”

라고 유진이 대답했다.

아무리 TV를 잘 보지 않는 단유라도 흉가 체험과 같은 공포 컨셉의 예능은 여름에 주로 방영한다고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여름보다 겨울이 더 컨셉 잡기 좋대.”

“왜?”

“진짜 춥잖아, 날씨가? 그래서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게 잘 드러나기 때문에 제격이라네.”

어차피 촬영은 유진과 같은 출연자들이 신경 쓸 문제고,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건 제작진의 문제니 단유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무섭지 않냐는 물음을 던졌더니, 유진은 씩씩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입금됐잖아?”

인기가 있든 없든, 어쨌든 유진도 프로 연기자고, 프로는 돈이 들어오면 뭐든 한다. 사실 지금 유진 입장에서 가리고 자시고 할 처지는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출연 기회를 잡고, 인지도를 끌어올려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여수대로를 지나가며 이어지는 몇 개의 터널들을 거친 후 광주원주고속도로에 올랐다. 여전히 하늘은 어둡고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규정속도 대로만 간다면 별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보니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유진은 고개가 옆으로 한껏 기울어 있었다. 단유는 실내 히터를 조작해 너무 덥지 않게, 그러나 긴 잠에서 금방 깨기 힘들 정도의 실내 온도를 맞춰 주었다.

첫 휴게소가 보였을 때, 단유는 시간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천천히 주차시킨 후, 뒷자석에 둔 그녀의 짐에서 목베게를 꺼내 유진의 목에 끼워주었다. 조금 뒤척이다 깨나 싶었는데, 많이 피곤했던지 유진은 쉽게 눈을 뜨지 않았다.

단유는 휴게소 안에 들어가 물과 가벼운 먹을거리를 산 뒤 돌아왔다.

“으음. 여기 어디야?”

한참 운전 중일 때 유진이 정신을 차렸다.

“더 자. 아직 도착하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거야.”

“하암. 다 잤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던 유진은 곧 컵홀더에 꽂혀 있는 생수 페트병을 발견했다.

“어, 이거 언제 샀어?”

“아까. 휴게소에 들렸었어.”

“아, 진짜? 전혀 몰랐네.”

“목마르면 마시라고.”

“고마워.”

유진은 물을 마신 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는 동안에 메시지가 들어왔던지 확인하는데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단유야.”

“응?”

“매니저 오빠한테서 연락 왔었는데, 잘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연락왔네.”

“잘 가고 있다고 알려줘.”

“응. 그리고 이참에 더 푹 쉬라고 말할까봐.”

“······.”

“아주 매니저를 바꾸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런 농담은 자제하자.”

“진지하게 생각해봐. 나도 우리 회사에 강력하게 이야기해 볼테니까.”

“잠이 더 필요한가 보네. 그럼 더 자.”

유진은 자기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그 뒤로 한 시간을 더 달려 마침내 목적지 인근까지 오게 되었다. 근방에 한적한 거리의 시내가 있었는데, 거리에는 사람이나 차가 별로 없었다. 아주 예전에 지어졌을 것 같은 낮은 층수의 아파트도 있었고, 슈퍼마켓 간판을 단 가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시내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구름 낀 하늘 때문에 더 주위가 한적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는 안 오겠지?”

“만약 오면 비가 아니라 눈이 오겠지. 바깥 온도가 영하인데.”

“오늘 촬영 일찍 끝났으면 좋겠다.”

“그거는 감독님께 여쭤보도록 하고. 이 길로 가야 하나 보다.”

이윽고 시내를 빠져나온 단유의 차는 산속으로 올라가는 1차선 도로를 찾아 들어갔는데, 오늘 촬영 컨셉을 계속 염두에 둔 탓인지 주변의 모든 게 음산하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가다 보니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이길 맞아?”

“맞을 거야.”

“미안하네.”

“뭐가?”

“괜히 나 때문에 고생시키는 것 같은 것도 있고. 차도 많이 더러워질 것 같고.”

“차는 세차하면 그만이고, 고생은 그만한 보상을 받아야지.”

“보상? 어떤 보상? 뭐 해줄까? 뭐 기대하는 거 있어? 말해 봐.”

갑자기 보상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단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유진의 이마를 밀어내며 단유가 대꾸했다.

“너한테 받을 거 아니고. 며칠 전에 너희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고맙다며 사례하겠다고 하더라.”

“아, 그거. 그거는 그거고. 따로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말해 봐.”

“없어.”

“없긴 왜 없어? 괜찮아. 뭐든 말해 봐. 들어보고 해줄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줄 테니까.”

“오늘 촬영 벌써 시작한 건가? 왜 갑자기 으슬으슬해지지?”

“너 내가 아직도 유진이로 보이니?”

“지금이라도 차 돌려서 병원을 찾아가야 하려나?”

유진은 단유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김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무슨 농담도 그렇게 진지하게 하니? 너 얼굴 보면 진담인 줄.”

“반쯤은 진담이니까.”

“그럼 나도 반쯤 진심으로 말하는데, 진지하게 생각해봐. 난 언제라도 너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어.”

“앞으로 나 보기 싫으면 계속 그렇게 해.”

“너랑 나, 바뀐 거 아냐?”

“자주 듣던 이야기네.”

“치.”

“다 왔다.”

“어? 그러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가에 한 젊은 남자가 어깨를 움츠린 채 두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는데, 단유의 차를 보고는 살짝 물러서더니 단유의 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유가 속도를 늦추자 남자가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단유는 유진을 가리키며 촬영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했고, 유진의 이름을 확인한 남자가 주차장을 안내해줬다. 그리 넓지 않은 공터였는데, 이미 도착한 촬영 스태프용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기 옆에 세우시면 돼요.”

공터가 그렇게 넓지 않은 탓에 주차관리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남자가 알려준 장소에 주차를 시키고 유진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어우, 추워.”

“겨울인 데다, 산속이니까 더 추울 거야.”

단유는 유진이 들고 있던 짐을 대신 들어주며 말했다.

“고마워.”

단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저기로 쭉 가시면 금방 발견하실 거예요.”

별다른 수사 없이 건조한 안내였지만, 그 남자의 말처럼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대략 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핸드 카메라를 점검하고 있는 사람, 붐마이크를 만지는 사람, 조명을 설치할 위치를 고르는 사람 등으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유진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 거기로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요?”

파르스름한 턱을 가진 중년인이 유진을 보고는 인사를 받았다. 아마도 이 촬영의 진행을 맡은 PD이리라. 마침 곁에 서 있던 중년 여자도 유진의 인사에 미소로 반겼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예. 오늘 날이 많이 춥죠?”

“그렇네요.”

하얀색 패딩에 목도리까지 한 유진을 보며 작가가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요’라고 말을 건넸다. 촬영이 일찍 끝난다면 그런 걱정 덜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PD가 단유를 보며 이채를 띄자, 유진이 곧 설명했다.

“제 친군데요, 오늘 일일 매니저로 왔어요.”

“매니저요?”

유진은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고, PD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미팅 때 봤던 매니저도 꽤 풍채가 좋다고 여겼는데, 이 친구는 더 몸이 좋은 거 같은걸? 운동하시나?”

단유는 한 발 나서며 인사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오늘 유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더 부탁해야죠. 그런데, 남자 친구?”

“그냥 학교 친구입니다.”

“학교 친군데 여기까지? 썸타는 사인가?”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친한 친구라 도와주러 온 겁니다.”

그때 작가가 끼어들었다.

“학교 친구면, 그쪽도 서울대예요?”

“네.”

감독이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유진씨 서울대였지? 이야, 이런 데서 서울대 엘리트 두 명을 한꺼번에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과찬이시네요.”

엘리트라면, 오히려 PD가 더 엘리트 직군 아닌가?

“그런데 친구도 꽤 마스크가 좋은데?”

단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PD의 모습에 유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려다, 단유의 눈짓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PD는 금방 그 눈짓을 알아챘다.

“뭐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단유는 PD의 호기심에 난감해졌다. 그저 일일 매니저 행세나 하러 따라온 건데, 그렇지 않아도 촬영 준비로 바쁠 PD가 왜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유의 이해와는 별개로 PD는 유진을 바라보며 채근했다.

“사실 예전에요, 이 친구도 이쪽 계통에 있었거든요?”

“이쪽? 아역 배우였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고, 우연한 기회로 잠깐 했을 뿐입니다.”

그때, 줄곧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작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뮤직비디오에 나오지 않았어요?”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유진이 깜짝 놀라며 호응하자,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나. 그, 가디스R 뮤직비디오 맞죠?”

“작가님, 그거 되게 옛날 건데 기억하시네요?”

“유진씨한테는 옛날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별로 멀지 않은 기억이네요. 방송 작가로 들어와 한창 일할 때 봤던 거라. 그때 그 노래 되게 인기 있었잖아요?”

PD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 했지만, 작가의 이야기에는 흥미를 보였다. 단유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때문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단유의 표정을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이쪽 일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안 합니다.”

단유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촬영은 언제쯤부터 시작하나요?”

“아, 아직 출연진이 안 왔어요. 유진씨가 가장 먼저 온 거예요. 뭐, 아직 촬영 준비도 끝나지 않았고. 하지만 일단 10시에 시작할 예정이에요.”

“그럼 그전까지 대기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유진이 컨디션 조절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 차 가지고 왔어요? 차 가지고 왔으면 차에서 대기해도 되고요. 저기 저 건물은 나중에 촬영할 때 들어가야 하니까 들어가기 어렵거든.”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유진이는 차에 있도록 할게요.”

“나 괜찮아.”

“너 입술 보랏빛이야.”

입술을 더듬거리는 유진을 보며 작가가 웃었다.

“일일 매니저가 열심이네.”

“그렇죠? 이참에 매니저로 전업시킬까 하는데, 제 말이 잘 안 먹히네요.”

유진의 우스갯소리에 작가가 웃음을 지을 때, 단유는 촬영 준비하시는 데 방해된다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유진을 끌고 자리를 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