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도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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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성적 화면에 나와 있는 이의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곧 이의 사유를 적는 칸이 나왔다.
“이걸 적고 기다려야 하는 건가 보네?”
즉, 온라인으로 이의신청 사유를 보내놓고 결과를 통보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교수가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학생은 그저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즉, 온라인에서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방법이 없다.
‘결국 교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단유의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새벽이 말했다.
“성적 이의 신청 기간에는 교수님들이 전화를 안 받으신 데요.”
한둘 정도만 신청하는 거라면 모를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신청을 한다면 교수 입장에서도 꽤 난처하기도 할 테고, 어쩌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 생각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교수님은 욕도 한다던데요. 그리고 다음 수업 때 더 안 좋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고요.”
결국 학생은 울며 겨자먹기로 다른 교수의 수업을 재수강으로 신청하거나 혹은 그냥 다른 과목으로 빵구난 학점을 채우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재수강을 해도 A+는 받을 수 없게 규정이 변경이 된 탓에 어쨌든 성적 보존은 쉽지 않다.
“학점 인플레 때문에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각 대학별로 학점 관련 규정이 상당 부분 변경되었어.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고.”
혹시나 하고 찾아간 학과 사무실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수강 학점 상한제를 실시하는 이유도 그런 거야. 그러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점수 방어는 힘들 거야.”
당시 이 제도를 들일 때, 당연히 학생 사회에서 말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찬반을 실시했을 때, 찬성한다는 입장이 반대하는 사람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유는 ‘학점 인플레로 인해 취업 시 학점에 대한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스펙 전쟁의 시작이었지.”
경쟁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려는 생각이 그 찬반투표에서 드러났다.
“결과론이지만, 재수강 제도는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어. 학점에 대한 공신력을 거론한 것은 학생들뿐이야. 실제 기업에서는 학점이 높든 낮든 별로 의의를 두지 않았거든. 어차피 실무에서는 그런 학점이 크게 의미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다른 스펙들이 더 많이 요구되었으니까.”
봉사활동, 자격증, 인턴 활동 등등. 열거하면 끝도 없을 스펙들이 자기소개서에 기입되며 경쟁에 불을 붙였고, 4.5점 혹은 4.0 만점의 학점은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
“뭐 아주 의미가 없다고는 못하겠지.”
1차 서류 심사라도 통과하기 위해 한 톨의 지적거리도 남기지 않겠다는 학생들의 분투는 현재도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밖에는 눈이 내리지만, 학과 사무실 안은 따뜻한 공기로 살짝 더운 느낌이다. 단유네 말고도 학과 사무실을 찾은 이들은 적지 않았고,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행정조교가 단유네에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툴툴거렸다.
“결국 교수님께 잘 보이란 소리네. 교수님한테 잘못하면 취업도 어렵다, 이거잖아.”
“그러니까 교수님한테 알랑방귀 뀌는 애들이 생기는 거지.”
“그리고 대자보에 붙을 일들이 생기는 거고?”
재수강을 받지 않기 위해,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학생들은 점수를 결정하는 교수님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더구나 상대평가이니 모든 건 교수님의 뜻에 달렸다. 교수님의 심사가 꼬이기라도 하면, 학생만 손해다. 반대로 학생의 교수님에 대한 어떤 반항도 불허한다.
“뭐, 요즘은 대자보보다 대숲에 먼저 글이 올라오기도 하지.”
그들도 단유를 알아본 모양이다. 단유는 행정 조교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새벽이 옆에 붙어 물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어쩌긴.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그냥 받아들여야지.”
“억울하잖아요?”
되려 유영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분을 터뜨리자, 단유는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왕에 못 먹게 된 거 억지로 간을 맞춘다고 해도 이미 식욕이 떨어진 마당이다. 단유는 피식 웃었다.
“억울할 게 뭐 있다고.”
“나중에 졸업할 때도 학점이 남을 거 아니에요? 내년에 재수강도 해야 하는데, 오빠 무려 3과목이잖아요?”
“학점이 남는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잖아?”
“···와.”
‘취업’을 위해 학점 관리하는 게 아니라면, 학점이 높든 낮든 무슨 상관일까? 두 사람은 갑자기 단유가 부러워졌다.
“취업 걱정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구나.”
“다 가진 사람은 이런 모습이었군요.”
단유는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줄까 하다 말았다.
만약 식당에 갔는데, 식당에서 못 먹을 정도의 음식이 나왔다면, 그런데 클레임을 걸려 해도 식당 주인이 클레임을 받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돈이 많으니까, 국 한 그릇 잘못 된 거 정도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 아니냐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유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신의에 관한 문제이고 일방의 불성실한 태도로 다른 상대가 손해를 입는다면 배상이 필요하지 않은가?
단유는 최선을 다해 수업에 임했고, 비록 학점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이 이유 없이 평가절하 받는다면 그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단유는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짧은 계획을 떠올렸다. 자신이 최대한 신의를 보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안타깝게도 그것은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이 당신의 수업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고 성실하게 행동했었는지를 교수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형, 전화요.”
새벽의 말에 전화가 오고 있음을 깨달은 단유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나. 어디야?
유진이었다.
“학교.”
―아, 그래? 나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뭐?”
―너 다음 주에 혹시 시간 있어?
“그렇게 막연하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굳이 말하면 비는 시간은 없어.”
―어? 너 바빠? 왜?
“공부해야지.”
―무슨 공부? 너 무슨 자격증 준비해? 아니면 고시?
“학과 공부.”
―야, 방학 때 무슨 학과 공부야? 그럼 시간이 있단 소리네?
“그냥 말 돌리지 말고 용건만 말해. 나 지금 전화 길게 받기 힘들어.”
통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밟으며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딘가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디가 좋을까?
―왜? 뭐, 데이트 중이냐?
“비슷해.”
―뭐라고? 너 여친 생겼어?
“용건.”
―거 되게 딱딱하게 구시네. 알았어. 다음 주에 나 지방에 갈 일 있는데, 시간 있으면 같이 가자고.
“지방? 촬영?”
―비슷해.
“그런데 내가 왜 같이 가?”
―사실은 회사 일정이 조금 꼬인 일이 생겼어. 원래는 지방 촬영이 없었는데, 제작사에서 갑자기 일정을 만드는 바람에 지방으로 가게 됐는데, 나 봐주는 매니저 오빠가 같이 갈 수 없게 됐거든. 그래서 혼자 가게 생겼는데, 솔직히 혼자 가긴 좀 그렇잖아?
“왜?”
―하아. 사실은 매니저 오빠가 며칠 전에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 중이야. 오래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한 대. 그나마···조금 쪽팔리는 이야기지만, 내가 스케줄이 많지가 않아서 다른 배우 봐주시는 분들이 시간 조정을 해서 나랑 같이 스케줄 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이번 지방 촬영은 갑자기 생긴 거라, 시간이 되는 매니저분들이 안 계셔.
그 뒤로도 구구절절 이어지는 유진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던 단유는 문득 자신을 향한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더니 유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 ‘왜’라고 물었더니 입술을 쭉 내밀고는 고개를 젓는데, 볼이 빨갛게 물든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영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거실에서 패티를 안고 있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빵의 모습이 떠오른달까?
―왜 웃어?
단유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던 모양이라, 얼른 정색하고 대답을 했다.
“나 말고 같이 갈 다른 사람 없어? 친구 없어?”
―니가 그 친구잖아?
“나 말고는 친구 없어?”
―너만큼 믿음직한 친구가 없지. 넌 어느 정도 현장을 알잖아?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점점 가늘어지는 유영의 눈빛과 호기심을 가득 담은 새벽의 시선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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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슨 촬영이래요?”
“웹 예능이라는데.”
“인터넷에서만 방송되는 건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 그거 유튜브나 모바일로 보는 예능인가 보네. 그런데 그런 거 보는 사람이 있나?”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있는 거지.”
“그런가?”
유영과 새벽은 따뜻한 커피잔을 움켜쥐며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학교에서의 볼일을 모두 끝내고 그냥 헤어지려다 그래도 자신을 따르는 두 동생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예은의 카페로 데리고 왔다. 방학인데도 매상을 올려주러 왔냐며 반가워하는 예은의 인사를 받은 뒤, 단유는 비어있는 창가 구석 자리로 향했다.
앉자마자 시작된 대화는 조금 전 단유가 승낙한 유진의 제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럼 오빠가 매니저 대신 해준다는 거잖아요?”
“뭐, 비슷하지.”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왜 혼자 못 간대요?”
“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연예인들이 괜히 매니저랑 같이 다니겠냐?”
새벽의 두둔성 발언에 유영이 발끈했다.
“매니저 없이 다니는 연예인도 있거든? 1인 기획사 설립해서 다니는 사람도 있고, 매니저 없이 자기가 협찬받고 메이크업이랑 준비해서 다니는 연예인도 있거든?”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거겠지. 니가 연예인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 사정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오바 아니냐?”
다른 장소라면 모를까, 다른 손님들도 있는 곳에서 다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단유는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해, 둘 다. 새벽이 말대로 유진이한테는 그만한 사정이 있고, 그걸 내가 납득했으니까 받아들인 거야. 그렇다고 유영이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말이야.”
유영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말을 받았다.
“전 오빠가 괜히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오빠 말처럼 오빠도 자기 시간이 있고 일정이 있는데, 그걸 그 언니를 위해 희생하는 거잖아요?”
“유영아. 난 이걸 희생이라고 생각 안 해. 만약 그걸 희생이라고 표현한다면, 내가 너희들이랑 이렇게 있는 것도 희생일까?”
“그건···아니죠.”
“유진이는 친구고, 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 뿐이야. 그리고···다른 이유도 있고.”
“무슨 이유요?”
“사실 난 이 나라를 많이 돌아다녀 본 적이 없거든.”
“이 나라, 라고 하니까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요?”
“···아무튼, 어릴 때 살던 고향이랑 서울 빼고는 다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전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승낙한 거야.”
“예전에 수학여행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음, 내가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이 없었어.”
“정말요?”
“아, 저 그거 알아요. 한때 안전 문제로 수학여행을 폐지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비슷한 이유였던 거 같은데, 솔직히 그 당시에는 나도 어디 돌아다니는 것보단 책 읽고 공부하는 걸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게 별로 싫다거나 하진 않았어.”
“어쩐지 형이 옛날에 어땠을지 알 수 있을 거 같네요.”
“너희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형만큼은 아닐걸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안 가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전 수학여행 때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었거든요.”
새벽은 자신의 수학여행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었는지를 늘어놓았다. 기억에 남는 건, 밤에 숙소에서 친구들이랑 장난치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났던 거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유영이 핀잔을 던졌다.
“기억에 남는 게 없다면서 되게 구체적이다?”
“넌 그런 거 없었냐?”
“왜 없겠어?”
어느새 두 사람은 수학여행에 관한 썰을 경쟁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누가 더 많은 추억을 남겼는지 겨뤄보려는 듯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단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전까지 내리던 눈발이 약해지며 이제는 금방이라도 그칠 듯 보였다. 옅어진 구름 사이로 금방이라도 해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얕게 쌓인 눈은 곧 녹을 테고, 거리는 질척해질 것이다. 하지만 반쯤 녹아 시커멓게 변할 거리의 더러움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의 하얀 전경(全景)을 즐기는 게 이 시간, 이 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이겠지.
단유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으며 그 온기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