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25화 (625/956)

무한 도전(1)

-------------- 625/952 --------------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군대를 다녀온 선배들은 하늘에서 쓰레기가 떨어진다며 투덜댔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군부심이라며 그들의 감성을 일축했다. 여학생들은 교정에 쌓인 하얀 눈밭을 밟으며 즐거워했고,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니는 여학생들을 쫓는 남학생들도 즐거워했다.

그래도 행정관에 이르는 도로는 차를 가지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덕분에 단유도 차를 가지고 와 주차 시키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형!”

주차를 시키고 돌아서는데 저 멀리서 새벽이 단유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눈밭 위에서 마치 인디언 제례의식을 따라 하듯 뛰어다닌 탓에 볼을 불그레 물들인 새벽을 보며 단유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뭐가요?”

“너 얼굴 되게 빨간데?”

“아, 괜찮아요.”

새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 살던 곳에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어요. 연화지 같은데 가서 놀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무튼,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얼굴이 많이 땅길 텐데.”

새벽은 등에 맨 가방을 돌려 보이며 말했다.

“안에 로션 있어요.”

“로션도 들고 다녀?”

솔직히 새벽이라면, ‘이 정도는 그냥 참는 거죠. 남잔데’라고 반응할 줄 알았다.

“피부 관리는 20대부터 해야 한댔어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단유는 살짝 놀랐다는 시늉을 보였다.

“가시죠.”

단유는 눈과 함께 고요가 내려앉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새벽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얗게 뒤덮인 교정의 고적함은 단유의 감성을 전혀 자극하지 못했다.

종강 이후, 단유는 줄곧 집에서 자기 공부하기 바빴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개강할 때까지 계속 방에 틀어박혀 실험과 공부를 병행하며 겨울을 지내고픈 마음이었으나, 어제 저녁 유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빠, 방학 때 스터디 하실래요?

“스터디?”

―토플 시험 있잖아요? 그거 공부하려고 하는데 같이 공부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단유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턱을 긁적거렸다.

“토플 공부하는 데 다 같이 할 필요가 있을까?”

대학에 들어온 뒤 놀랐던 것은 스터디란 이름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한다는 점이었다. 공부는 원래 혼자 하는 것, 이라는 게 단유의 생각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 가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시험공부를 하긴 했어도, 그건 같이 공부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공부가 부족한 친구―정확히는 명수와 상미―를 가르쳐준다는 개념이었기에 스터디라고 보기 힘들었다. 조별 과제야, 억지로(!) 임무를 나눠서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었기에 함께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혼자서 해도 무리가 없다고 여겼다.

더구나 토플 공부는 별거 없다. 이미 대입 때 최상위 점수를 얻기도 했거니와, 어차피 교재만 보며 공부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스터디라는 형식을 빌려 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아마 이런 스터디를 한다고 해도 단유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형식이 될 텐데,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누굴 가르치면서 자신의 시간을 뺏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유의 말에서 꺼리는 느낌을 받았는지 유영이 말을 바꿨다.

―토플이 아니더라도, 내년에 전공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미리 공부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제야 단유는 유영의 속내를 알아챘다. 비록 사전 지식은 없었지만 1학년 중에서 2학년 전공을 위해 미리 스터디를 하는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단유는 유영의 수작이 귀엽다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겠는데?”

―어···그렇죠? 하긴 우리끼리 공부한다고 뭐가 나아지진 않겠죠.

“그렇지. 그런데 마침 내일 도서관에 갈 일이 있는데, 너도 내일 학교 올 일이 있으면 만나서 식사나 할까?”

―네? 아, 네. 저도 마침 내일 도서관에 가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그럼 중도 앞에서 볼까요?

“도착해서 연락할게.”

―네, 오빠.

물론 유영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지어낸 말은 아니다. 비록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더라도 공부를 위해서는 책이 필요했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에 들러 일주일간 읽을 책을 대출했다. 그리고 내일은 ‘마침’ 도서관에 들르는 그 날이었을 뿐이다.

****

“너는 왜 왔어?”

“나? 왜, 나는 여기 오면 안 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하는 유영은 단유의 앞이라 애써 표정을 관리했지만,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형이 같이 밥 먹자고 했거든?”

단유는 유영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도서관 안을 가리켰다.

“일단 책 좀 빌리고 나올게. 여기서 기다릴래?”

“이왕 온 김에 저도 책 좀 볼게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번역하는 거 때문에 좀 봐야 할 책이 있거든요.”

“니가 무슨 번역을 해?”

유영이 살짝 놀란 투로 묻자, 새벽이 으스대며 대답했다.

“몰랐어? 나 번역 알바 하잖아.”

그리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유영이 콧김을 흥, 하고 뿜었다.

“너도 볼 책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유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단유와 함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

모처럼이니 단유와 함께 오붓이 외식을 즐기고 싶었던 유영. 하지만 눈도 오는 마당에 굳이 멀리 나가서 먹을 필요가 있냐는 새벽의 제안에 단유가 수긍하면서 결국 학생 식당으로 오게 되었다.

방학이지만 학생 식당에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방학이라도 학교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학생들이 찾아오고, 그 외 교직원들도 식사를 위해 찾기 때문에 식당은 학기 중처럼 많지는 않아도 손님은 늘 있었다.

식판을 들고 식당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은 세 사람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번역 알바, 그거 어때? 괜찮아?”

말로만 듣던 번역 알바를 직접 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했던 유영은 새벽에 대한 반발심을 억누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뭐, 나쁘진 않아. 그런데 내가 하는 건 그냥 제품 설명서 번역하는 수준이고, 진짜는 형이지.”

“오빠? 오빠도 해요?”

“너 몰랐구나? 이 형은 진짜 번역가야. 번역한 책도 있다고.”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지난번에 보니까 형이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에도 올랐었다고.”

“···너한테 안 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하던 단유가 웃으며 유영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새벽이 말대로야. 예전에 우연히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간간이 의뢰가 들어오는 건만 하는 중이야.”

“대박!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응? 내가 이야기 안 했었나?”

“안 했어요.”

그때 또 새벽이 끼어들었다.

“니가 안 물었으니까 그렇겠지.”

“넌 좀 빠져라.”

“야, 나도 여기 있거든? 내 귀 아직 잘 들리거든?”

“귀도 좋고, 눈도 좋은데, 제발 그 입만 좀 닥쳐줄래?”

“우아, 말 험하게 하는 거 보소? 형, 얘랑 놀지 마요.”

“아우, 유치해.”

“유치하면 어쩔 건데?”

두 사람이 즐겁게(?) 만담을 즐기는 동안 단유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언제까지 저 만담이 이어질까 기대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듣기만 했다.

“너도 하고 싶어서 그러냐?”

“야, 나도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쁘거든?”

“너 아르바이트 해?”

“요즘 아르바이트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넌 뭐하는데? 편의점? 카페?”

“과외한다. 왜?”

“정말? 와, 부럽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과외야 말고 저근로 고소득 직종 아냐? 입만 털면서 대충 문제 몇 개 풀면 돈 나오고.”

“너 과외 한 번도 안 해봤지? 안 해 봤으면 말을 마라. 과외가 얼마나 중노동인줄 아냐?”

“과외가 무슨 중노동이야? 넌 과외로 무슨 삽질이라도 하냐?”

“니 개그는 재미없거든? 그리고 과외가 말이야, 응? 신경을 얼마나 써야 되는지 알아?”

“모르지 난.”

“···에휴, 됐다. 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니.”

“그래도 돈은 잘 벌잖아?”

“그게 다 서비스 직종의 고통이 담긴 수당이다, 이거야. 학생 비위 맞춰줘야지, 학부모 비위 맞춰줘야지. 만약 애가 성적이 안 오르거나 올라도 눈곱만큼 오를 정도면 눈치 보여서 수업도 제대로 못 해. 떨어지면 당연히 지옥이고. 그나마도 말이야, 애가 공부할 생각이 있는 애라면 다행인데, 공부할 생각도 없는데 엄마가 억지로 시킨 애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수업이 아주 전쟁이야, 전쟁.”

새벽은 대꾸하는 대신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곧 로션을 꺼내더니 볼에 바르기 시작했다.

“뭐하냐?”

“얼굴 땡겨서.”

“참···가지가지 한다.”

“너도 얼굴 빨간데 괜찮냐? 빌려줄까?”

“됐거든?”

유영은 씩씩거리며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새벽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시 로션을 챙겨 넣은 뒤 숟가락을 들었다.

“아, 그런데 형.”

“응?”

“형, 성적 확인 하셨죠? 잘 나왔어요?”

“아.”

“어? 아직 확인 안 하셨어요?”

“응.”

“그거 이번 주까지가 성적 이의신청 기간일 텐데요?”

단유는 상관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댄 뒤 국을 떠먹었다. 조금 짠 무순장국이었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성적도 이 무순장국과 다를 바 없다. 성적이 좋든 나쁘든 무슨 상관일까? 밥 먹을 때 목메지 말라고 먹는 의미 이상은 없다. 단유에겐 그랬다.

“넌 성적 어떤데?”

“그런 거 묻는 거 예의 아니다?”

“야, 내가 니 쓰리 사이즈라도 물었냐? 성적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강새벽! 너 그거 성희롱이야!”

새벽이 손을 합장하고 앞으로 쭉 내밀었다.

“미안!”

새벽의 빠른 사과에 유영은 그의 손을 찰싹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새벽은 맞은 손등을 비비며 말했다.

“난 이번에 B가 3개야. 왜 B 받았는지 모르겠어서. 난 나름 시험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C 안 받은 게 용하네.”

“나름 안 놀고 열심히 했는데, B를 받으니까 도대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받았는지 궁금하더라고.”

새벽은 어느새 식사를 마쳐가는 단유를 힐끔 보며 말했다.

“형이야 분명히 잘 받았을 테니 비교 대상이 안 되고.”

“그럼 나는 비교 대상이 된단 소리야?”

“뭐 그냥 그렇다고. 넌 B 없냐?”

“너보단 적어.”

“한 개 이상이란 소리네? 크큭.”

“왜 웃냐? 기분 나쁘게.”

“쏘리.”

단유는 물로 입을 헹군 뒤 조금 의기소침해진 새벽을 달래듯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앞으로 잘하면 되지.”

“사실은요, 점수 잘 받아서 장학금 신청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B가 세 개나 되니까 자신이 없어진 거죠.”

장학금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새벽의 다운 텐션이 이해됐다.

“기운 내라.”

“그래야죠. 그런데 일단 물리2는 한 번 이의신청 해보려고요. 그때 형 덕분에 시험도 잘 봤었는데 점수가 너무 낮은 거 같으니까. 그래서 여쭤본 거예요. 형은 점수 뭐 받았는지.”

“사실 나도 확인 안 해봤어.”

“아직도 성적 확인 안 했어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역시 쿨한 형이야, 라며 감탄하는 새벽의 말을 흘리며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성적 확인에 들어갔다.

‘음?’

성적을 확인한 단유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단유의 표정이 살짝 변한 것을 본 유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단유는 즉답을 못 했다. 단유가 보는 핸드폰을 엿보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거리를 뒀던 새벽도 의아하다는 듯 단유를 쳐다보다 물었다.

“왜 그러세요?”

단유는 보고 있던 화면을 새벽에게 보여주었다.

“어?”

“넌 또 왜? 뭔데?”

“···형, 이거 이상한데요?”

결국,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유영이 참지 못하고 일어나 단유의 곁으로 다가와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

유영도 말을 잇지 못했다. 화면에는 단유의 과목별 점수가 공개되어 있는데, ‘프로그램방법론’이라는 과목에 A+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A가 없었다.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과목은 C였다. 정확히는 두 과목이었다.

“형, 이건 따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누구보다 오래 단유와 함께 했던 새벽이니 단유의 점수가 이해되질 않았다. 새벽과 겹치는 과목이 많았던 단유였는데, 새벽이 A를 받은 과목에서 단유가 더 낮은 점수를 받는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아무리 점수에 개의치 않는 단유라도 이쯤 되면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둔한 미각을 가진 단유라도 못 먹을 정도의 국이라면 클레임을 걸어야 정상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