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24화 (624/956)

믿으셔도 좋습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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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의 목적은 단순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시길, 그리고 앞으로도 부모님의 도움―그리고 제재―없이 잘살아 보겠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친구네 집에 얹혀 사는 것이지만, 조만간 독립해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을 닦아놓았다는 것을 보여드리면 부모님도 상미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미가 의도했던 바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을 구경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살짝 부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어머니가 2층 거실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을 때, 상미는 차후에 있을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미안한 마음도 느꼈다. 이제껏 부모님께서 상미에게 딱히 경제적 도움을 요구한 적은 없지만, 상미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돈도 벌고 좋아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인터넷 방송에 관심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어머니의 저런 모습을 보니 지금껏 아무런 도움도 못 줄 뿐만 아니라, 그저 속만 썩이는 딸이 된 거 같아 마음 한쪽이 씁쓸했다.

“엄마, 내려가자.”

“그래.”

다시 1층 상미의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자신들의 안방만큼, 어쩌면 그보다 넓을지도 모를 상미의 방을 둘러보다 상미에게 물었다.

“좋니, 여기 있으니까?”

“좋지, 그럼.”

애써 표정을 풀고 웃음을 짓는 상미의 모습에 어머니는 혀를 찼다.

“속없는 년아.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퍽도 편하겠다.”

“누가 평생 이 집에서 살겠대? 나도 돈 벌어서 나갈 거야. 나 지금도 돈 많이 벌고 있어. 저금도 잘하고 있고.”

“밥은?”

“응?”

“밥은 집에서 잘해 먹냐고?”

“그럼, 잘 먹지.”

“아까 보니까, 주방에서 밥을 잘 안 해 먹는 것 같던데?”

그저 깔끔하게 보여드릴 것만 생각해서 청소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집안 살림을 하시는 어머니의 눈에는 그런 게 다 보였던 모양이다.

“다들 바쁘고 그래서 그래. 나도 방송하느라 바쁘고. 그래도 가끔은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그래.”

“청소는?”

“봐봐? 깨끗하잖아?”

“니가 직접 청소해?”

“이상한 걸 묻는다. 설마 이런 집에 사니까, 드라마처럼 청소하는 아줌마라도 불러서 할까 봐? 아니거든. 내가 다 청소하거든.”

“네가? 엄마가 널 몰라? 지금 이 방도 오늘 청소한 거지?”

뜨끔한 표정을 짓는 상미에게 어머니가 면박을 줬다.

“거실이랑 여기랑 얼마나 다른지 아니? 저기 봐라. 저기 먼지 쌓인 거. 그리고 너 빨래하고 나서도 제대로 안 개지? 니 옷장 정리한 거만 봐도 훤해, 이것아.”

“아이씨. 왜 또 엄마 마음대로 봐?”

“이게 어디서 큰 소리니?”

미안하던 마음도 싹 사라진다. 입술이 댓발은 나온 상미를 보며 아버지가 헛기침을 한 뒤 문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명수야.”

“예, 예!”

“들어와 봐라.”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명수가 얼른 뛰어들어왔다. 그런데 그 뒤에 단유가 손목을 붙잡힌 채로 끌려 들어왔다.

“너는 왜?”

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니, 단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명수에게 붙잡힌 소매를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이 단유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손을 놓는 명수의 얼굴이 새빨갛다.

“명수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너나 단유나 둘 다 어릴 적 착하던 모습 그대로여서 이 아저씨가 너무 기분이 좋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이는 아버지의 태도에 명수가 바짝 긴장했다.

“너랑 상미, 계속 사귀는 거 맞지?”

“네? 네.”

“고등학교 때는 그래, 통금시간도 잘 지키기도 했고, 명수 너를 믿으니까 교제를 허락했어. 지금도 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명수 정도면 훌륭하지.”

칭찬을 듣고 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지 굳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 때문만은 아니리라. 명수가 몰래 침을 꿀꺽 삼킬 때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런데 너희 둘 만난 지 이제 꽤 오래됐지? 게다가···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내 딸이란 놈은 지 남자 친구 집에서 살고 있는 형편이다보니 솔직히 애비로서 마음이 편친 않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귀밑머리로 흐르는 땀방울은 마치 후반 30분 0:0 상황에서 상대의 골문을 향해 쇄도할 때 흘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즘은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들 하지만, 딸 가진 입장에서는 솔직히 용납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동거’라는 말까지 나왔다. 페널티 라인에서 공을 차기 직전에 깊은 태클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뛰어난 공격수인 명수는 무의식적으로 태클에 대응했다.

“동거 안 합니다.”

“응?”

“네? 아, 저 그러니까, 제가 집에 잘 안 들어오니까요. 저는 숙소에 살고 한 달에 한두 번만 집에 오는 형편이라서요.”

아버지의 눈빛이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하나’라는 의미로 해석되자 명수는 손을 등 뒤로 돌려, 뒤에 서 있던 단유를 향해 백조 다리 같은 구조 요청을 보냈다.

“아저씨, 사실 상미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건 저예요.”

“너라고?”

“네. 사실 상미가 명수의 여자친구라지만, 저에게도 오랜 친구잖아요? 운 좋게도 저한테 돈이 생겨서 여유가 생기니까, 제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전 고아니까요.”

단유의 담담한 자기 고백에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 ‘고아’라는 말 속에 자리 잡은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침 상미가 원룸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조금 위태로워 보였어요.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 가끔이지만 뉴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 친구가 그런 원룸에 있다는 게 조금 불안했어요. 그리고 만약 저만 사는 집이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저희는 선생님도 계시잖아요? 그래서 상미를 저희 집에서 같이 머물도록 제가 먼저 상미에게 부탁했어요.”

“···그래. 네 말은 알겠다. 그래도, 시작이야 어쨌든 크게 보면 별로 의미가 다르진 않을 것 같구나.”

“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자.”

상미와 어머니는 침대에 앉은 채로, 그리고 단유와 명수는 침대 옆에 서서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상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생각은 그렇다. 다 큰딸이 남의 집에 얹혀 사는 건 불편하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남한테 민폐만 끼친다면 더더욱 말이다.”

“상미, 민폐 아닙니다!”

명수가 반사적으로 외쳤고, 단유가 얼른 명수의 등을 쿡 찔러서 뒷말이 더 나오지 않게 막았다.

“···조용히 있어라.”

나직하게 경고를 해주니, 아버지가 슬쩍 눈치만 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할 것 같다.”

“네?”

상미와 명수가 동시에 되물었다.

“너희, 결혼 생각은 있냐?”

****

이야기를 마치고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사양했다.

“됐어, 밥은 무슨.”

“근처 식당에 예약을 해뒀어.”

“무슨 예약이야? 됐어. 아빠랑 엄마는 이만 갈란다.”

단유가 나서서 두 분을 말렸다.

“저희가 아직 요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집에서 대접해드리기 어려워서 그래요.”

“됐어. 그럼 너희들이나 가서 먹어.”

“아뇨, 명수랑 상미, 그리고 아저씨, 아주머니 이렇게 가서 드시고 오세요.”

“얘, 왜 너는 빼?”

“오늘은 네 분이서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셔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있으면 좀 그렇죠.”

단유가 명수의 팔을 끌고 와서 등을 쿵 쳐 주자, 명수가 짝을 맞췄다.

“네, 어머니. 같이 가서 식사하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누가 너한테 쏘라든?”

“에이, 왜 그러세요? 저 돈 잘 벌어요.”

“이놈아, 돈 많다고 펑펑 쓰면 나중에 고생해.”

“어머니, 아버지 식사 한 끼 대접할 정도는 충분히 벌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벌 거고요.”

“그래, 엄마. 명수 이제 국가대표도 됐으니까 돈 더 많이 벌 거야.”

상미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었다. 국가대표가 되었다고 팀에서 돈을 더 주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다음 계약 때 더 많이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만.

결국 네 사람은 식당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단유에게 계속 같이 가자고 했지만, 단유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가족들끼리 나누실 이야기가 있으실 거 아녜요? 전 다음에 불러주세요.”

어머니는 단유의 거듭된 사양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단유야. 나한텐 너도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알지?”

“네. ···명수, 믿으셔도 좋은 놈인 거 아시죠?”

마지막까지 명수에 대해 확신을 심어주려는 단유의 태도가 기꺼웠는지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셨다. 그렇게 잠시 보시던 어머니가 한 걸음 다가서더니 단유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단유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번듯하게 자란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기뻐.”

그 순간에 단유는, 만약 진짜 어머니가 자신을 봤다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물음은 떠오른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

“그래서 명수가 뭐라고 했는데?”

“뭐라긴요. 상미랑 결혼할 겁니다, 장인어른! 이라고 했죠.”

“뭐? 장인어른?”

“걔가 그때 조금 정신이 없긴 했어요.”

하은은 단유의 대답을 듣고 깔깔대며 웃었다. 명수가 바짝 긴장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다 상미의 방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쟤랑 명수랑 이제 결혼하는 건가?”

“나중에 들어보니까, 당장은 아니래요. 명수도 이제 대표팀 발탁돼서 바빠질 텐데 결혼 준비하는 건 무리라고 아버지가 그러셨대요.”

“그래?”

“상미나 명수나 아직 나이가 그러니까, 한 2, 3년 후에 보자고.”

“하긴 그때도 너희는 26밖에 되지 않았을 테니까. 부럽다, 너의 젊음이.”

“부럽긴요. 선생님도 아직 젊으세요.”

“뭘 모르는 소리. 너 지금 젊다고 방심하다간 한순간에 훅 간다. 니 나이 때는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고, 시간도 잘 안 가지? 30대만 돼봐라. 하는 일 없이 있어도 1년 금방 간다. 2년, 3년? 그러다 어, 하는 순간 내일 모레가 40이야.”

“선생님도 아직 30대 초반밖에 안 되시면서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내 나이 되면 알게 된단다, 애기야.”

“그럼 이제 선생님 차례시네요.”

“뭐가?”

“선생님도 빨리 짝을 찾으셔야죠.”

“이 녀석이 또 선생님 놀리지?”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요.”

“···됐어, 신경 꺼. 선생님 일은 선생님이 알아서 한다.”

“명수에게 들었는데, 선생님 남자친구도 있으셨다면서요? 저 여행 중이었을 때?”

“명수가 그래? 아니거든, 남자친구.”

“그럼요?”

“···잠깐 썸 탄거지, 남자 친구는 아니었어.”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간만 봤대요?”

“뭐!”

“아니, 선생님 말고, 그 사람이요. 우리 선생님 정도면 간 볼 필요없이 적극적으로 대시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놔. 이제 사람을 들었다놨다, 아주 선생님이 장난감이야. 그치?”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럼 너는?”

“저요? 저야 아직 어리고···그리고 뭐 선생님이시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가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뭐···.”

“뭐? 뭐?”

“아시면서.”

“이런 능구렁이 같은 녀석. 사람들이 너 이러는 거 아나 모르겠다.”

단유는 웃으며 맥주캔을 들었다. 하은은 코를 찡긋거리며 맥주캔을 마주 들었다.

“단유야.”

“네?”

“우리 노력하자. 명수한테 지면 안 되잖니?”

“선생님만 노력하시면 돼요.”

“이게 정말!”

그때 상미의 방이 열리고, 상미가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며 나왔다.

“어? 왜 둘이서만 마셔요? 나 좀 부르지?”

“너 방송하는 거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 그랬지. 끝났어?”

“어. 오늘은 피곤하다고 일찍 끝냈어.”

“피곤하면 그냥 쉬어.”

“피곤해도 맥주 한 잔은 할 수 있거든?”

하은이 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한다?”

“에이, 무슨 약혼이에요?”

“그 정도면 거의 약혼이지 뭘.”

“저희보다 선생님이 먼저 가셔야죠.”

“너희 둘, 짰니?”

상미와 단유는 얼굴을 찡그린 하은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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